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월간 고양문화재단이 발행하는 월간 [누리]와 공동기획으로 공연예술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편집자 주
스네이프 몰팅의 초기 비전은 이 지역의 자연, 공간의 역사적 배경, 이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인 예술가와 관객을 중심에 두고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름다운 자연환경, 보존된 건물, 사람의 조화라는 비전을 60여 년간 함께 나누었다. 초기의 방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운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40여 년을 기다렸다. 이 자체가 스네이프 몰팅의 역사고 문화이자 가장 큰 자산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고즈넉한 바닷가, 드넓은 갈대 숲, 야생생물이 풍부한 늪지대가 많은 잉글랜드 동부 서포크의 작은 해변 마을 스네이프(Snape)는 매해 6월이면 이웃 마을에서부터 멀리 유럽 대륙에서 온 음악인과 음악 애호가들로 활기가 넘친다. 스네이프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알드버러페스티벌(Aldeburgh Festival)이 열리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작은 어촌으로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현대적 시설을 갖춘 웅장한 아트센터가 아닌 갈대숲 한 가운데 있는 낡은 건물들이 운집한 스네이프 몰팅(Snape Maltings) 지대로 모여든다. 이곳에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이 자리 잡고 있다.

스네이프 몰팅 주변 갈대 숲



맥아 제조 공장이 창의캠퍼스로

19세기 말 맥주 주원료인 맥아 발효를 위해 만들어진 이 건물들은 영국 내 관계 산업의 쇠퇴로 폐쇄되었다. 그러던 것이 1948년 영국 작곡자 벤자민 브리튼과 성악가 피터 피어즈에 의해 시작된 알드버러페스티벌이 점점 성장하면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폐쇄되었던 맥아 제조 공장이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예술 공간이 1967년 개관한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이다.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은 배의 위와 아래를 거꾸로 한 모양의 웅장한 천장 구조, 시야를 가리지 않는 좌석 배치, 뛰어난 음향 시설, 나무와 벽돌을 사용한 세련된 실내 분위기로 콘서트 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준다. 당시 재건축 자문위원을 맡았던 예술가들과 담당 건축가 하이워드 톰킨스(Haworth Tompkins)은 건물의 콘셉트를 21세기 예술가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예술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면서 빅토리안 시대 산업용 건물의 순박하고 검소한 외관은 보존할 것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콘셉트는 고스란히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에 묻어나 있고, 이후 스네이프 몰팅에 지어지는 다른 공연장에도 나타난다.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 건설 이후 40여 년 만인 지난 2009년 5월 9일에 스네이프 몰팅 지역에 새 건물 호프만빌딩(Hoffmann Building)이 문을 열었다. 콘서트홀의 활용이 많아짐에 따라, 벤자민과 피어즈는 스네이프 몰팅이 좀 더 대중적인 예술센터가 되길 바랐다. 더불어 음악과 오페라뿐만 아니라 춤,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 음악이론 강습과 시각예술 분야를 위한 워크숍까지 가능한 공간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리허설 룸, 음악전문 도서관, 전시장, 스튜디오, 워크숍 공간이 더 필요했다. 호프만빌딩의 개관으로 스네이프의 맥아 제조 공간을 음악과 예술을 위한 국제적인 ‘창의캠퍼스’로 변환시키고자 했던 브리튼과 피어즈의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총 1600만 파운드(한화 280여억 원)의 자본이 투자된 호프만 빌딩에는 340석의 브리튼 스튜디오, 75석의 저우드 키린 스튜디오, 리허설 룸, 예술가 워크숍 공간, 만남의 장소, 부대시설 등 주로 작은 행사를 위한 다양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 홀 내부



전문 예술인과 아마추어를 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스네이프 몰팅은 알드버러 뮤직(Aldeburgh Music)이라는 예술 전문 단체에서 소유하고 운영한다. 알드버러 뮤직은 스네이프 몰팅이 아름다운 자연과 건물과 사람(예술가, 관계자, 관람객)이 어우러진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몇 가지 방안을 모색해 왔다.

우선, 스네이프 몰팅이 음악과 예술가들에게 활력과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 풍부한 음악 유산, 음악인들과 관객들 모두에게 휴식과 재충전할 공간을 제공해 왔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와 젊은 예술가들에게 각자의 음악세계를 생각하고, 작곡하고,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영국 내 젊고 세계적인 프로페셔널 음악가들에게 공연을 통해 훈련을 하고 관객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한다.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은 1년 내내 수준 높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6월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품으로 구성된 알드버러페스티벌이 펼쳐지고, 8월에는 스네이프 프롬(Snape Proms)이 진행된다. 또한 연중 내내, 다양한 장르의 공연과 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 작품 제작, 마스터 클래스와 초청 강연 등이 이루어진다. 콘서트홀 개관 당시 알드버러페스티벌의 행사 장소로만 사용되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브리튼 스튜디오 내부, 브리트-피어즈 오케스트라

특히, 알드버러 뮤직의 중요 사업이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벤자민 브리튼과 피터 피어즈는 축제를 처음 개최했을 때부터 스네이프 몰팅이 실력이 있는 예술가들이 차세대 음악인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유럽의 ‘창의캠퍼스’로 발전하기를 꿈꾸었다. 1967년 콘서트홀 개관 때부터,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5년 후인 1972년 9월, 피어즈와 루씨 매넌에 의해 현장에서 뛰고 있는 젊은 성악가들 대상으로 첫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이후 현악기 코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네이프 몰팅 연수 코스를 열었다. 1979년, 이전의 마스터 클래스 코스와 트레이닝 코스를 좀 더 체계화 하고 심화과정으로 발전시켜 ‘브리튼-피어즈 고급 음악학교(Britten-Pears School of Advanced Musical Studies)’를 열었다.

1998년 조나단 리키가 알드버러 뮤직의 예술총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일 년 내내 콘서트 개최와 신규 작업 의뢰가 가능하도록 하고 기존의 콘셉트를 발전시켜 전문 음악인들을 위한 ‘알드버러 레지던시’와 전문가들을 위한 발전 구상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또한 예전의 ‘브리튼-피어즈 고급 음악학교’를 ‘브리튼-피어즈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이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전문 예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를 유도하도록 아마추어를 위한 다양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왔다.


신작, 새로운 해석 그리고 재발견
음악인들이 사랑하는 알드버러페스티벌

알드버러페스티벌은 현재의 스네이프 몰팅이 예술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축제이다. 이 축제는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래식 음악 축제이다. 알드버러페스티벌은 지속적인 신작 발표, 기존 작품들의 새로운 해석, 잊혔던 음악의 재발견 등 프로그램의 독특한 콘셉트와 전문성으로 영국 내에서도 BBC 프롬(BBC Proms) 축제 못지않게 음악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2009년 알드버러페스티벌 개막공연 'The Corridor'
2009년도 알드버러페스티벌은 6월 12일부터 6월 28일까지 개최되었다. 62회를 맞는 올 축제는, 2007년 말에 임용된 프랑스 피아니스트 출신의 새 예술총감독 피에르 로렌 에이마드(Pierre-Laurent Aimard) 체제 하에 처음으로 치러지는 페스티벌이었고, 호프만빌딩이 새로 개관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이목이 집중된 행사였다.

2009년 프로그램은 이전 프로그램보다 창의적이면서 알드버러에 친근했던 음악, 공연자들과 친근하지 않았던 음악, 공연자들을 잘 배합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축제 개막 및 호프만빌딩 완공을 축하하는 공연으로 영국의 대표 작곡가 버트위슬(Harrison Birtwistle)의 갈라 작품 ‘Semper Dowland, Simper Dolens: theatre of melancholy & The Corridor’가 런던심포니에타의 연주로 공연되었다.

평소 한 팀 정도 참석하였던 오케스트라단이 올해는 블라디미르 유로브스키 지휘의 런던 필하모닉,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BCMG 3개 단체가 참석하여 내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이전 축제보다 규모가 커졌음을 보여 주었다. 이외에도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을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성악가들이 선보였다. 또한 새롭게 문을 연 여러 개의 작은 공간에서 정원 콘서트들이 진행되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가장 활성화된 예술 공간


스네이프 몰팅의 공연장과 각종 프로그램은 교육,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네이프 지역으로 이주하는 학생들의 증가, 페스티벌 참석과 공연 관람을 위한 외부인들의 방문, 일자리 창출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고, 이 점은 문화를 지역 경제 재개발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영국 문화정책의 좋은 모범 사례로 꼽힌다. 그리고 알드버러 음악발전계획이 2003년 잉글랜드문화예술진흥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3대 예술 투자 사업으로 선정되어 스네이프 몰팅 지역에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는 등,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호프만 빌딩 전경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네이프 몰팅이 지역민과 지역 사회를 연결해 주는 매개자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알드버러 뮤직은 각종 프로그램과 제반 시설을 지역 학교, 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예를 들면, 매해, 수천 명의 나이 어린 아마추어들과 일반 지역민들은 오케스트라, 합창, 각종 음악 그룹 활동을 통해 스네이프에서 공연을 한다. 또한, 공연장 주변에 이웃 농가에서 만든 각종 기념품, 야채와 과일, 골동품 판매를 허가하는 등 지역주민과 시설을 공유한다. 이는 지역민과 함께 하고 지역민의 생활공간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노력들은 스네이프 몰팅 콘서트홀이 잉글랜드 동부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운영되는 지역 예술 공간으로 평가 받는 결과를 낳았다.

스네이프 몰팅의 초기 비전은 이 지역의 자연, 공간의 역사적 배경, 이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인 예술가와 관객을 중심에 두고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름다운 자연환경, 보존된 건물, 사람의 조화라는 비전을 60여 년간 함께 나누었다. 초기의 방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운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40여 년을 기다렸다. 이 과정 자체가 스네이프 몰팅의 역사이고 문화이자 가장 큰 자산이다.





주미영

필자소개
주미영은 서울예술단 프로듀서를 거쳐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진예술가 해외연수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영국 ITC(International Theatre Council)에서 예술마케팅 코스 연수, 영국 워릭대학교(Warwick University) 유럽 문화정책 및 문화경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대회지원부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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