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의 등장 이후 세계가 다시 인공지능(AI) 문제로 떠들썩하다. 급기야 6개월간 AI 개발을 중지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이에 따른 위험 요소가 없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약 1천 명의 인사들도 공개적으로 AI의 위험성을 우려하고 나섰다. 저명한 AI 개발자들까지 참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 하나 AI 개발을 ‘멈추자’는 사람은 없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간의 감성을 앞지르기 시작한 지 오래다. 과연 ‘AI 개발을 멈추자’고 할 만큼 용감한 발언자가 얼마나 나올지, 있기나 할지조차 의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 발전에 비윤리적인 점은 없는지 살펴보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그 속내야 어찌 됐든 말이다.

AI 개발의 근원적 토대는 ‘근대적 정신’

엄밀히 말하면, AI는 단순히 딥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가 그간 효율성이나 예측 능력 위주로 치우쳐 온 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효율성 및 예측 능력’ 중심의 역사 자체가 AI 개발의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시 근대적 정신의 탄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아쉽게도, “AI 개발을 6개월간 멈추자”는 발언에도 이와 같은 근원의 통찰은 빠져 있는 듯하다. 경제학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도 한 신문의 기고문(‘AI 개발 6개월 중지 호소문의 뜻’, 경향신문 2023년 4월 4일)을 통해 이 점에 동조를 표했다. AI 발전이라는 결실을 거두는 시점에서 이러한 ‘무작정의 발전’에 대해 진중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진화심리학자 장대익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는 챗GPT에게 ‘헛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헛소리’가 반영된 것이라며, 이 또한 인간중심주의라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들은 대부분 근대인의 ‘헛소리’일 수 있다. 근대에 살므로 우리는 모두 근대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대익 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지능이 영겁의 시간 동안 엄청난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로 진화한 농축 솔루션”(‘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틀린 전제, 생성형 AI는 어디로 가야 하나’, 경향신문 2023년 3월 28일)이라면, 우리가 근대에 산다고 해서 우리의 심성 깊숙한 곳까지 모두 근대적이라는 전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축적된 근대 이전의 흔적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인간의 지능만을 거론해서는 인간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의 AI 시대를 맞게 된 것도 인간의 속성을 ‘지능’에 둔 사고의 결과인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면, AI가 생성한 텍스트는 ‘언어’가 되고 이미지는 ‘그림’이 된다.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과연 이것은 인간의 언어 또는 그림과 대등한 것일까.

AI와 인간의 언어는 대등한 관계인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릴케론’)라는 글에서 시인을 “더욱더 모험적인 자들”이라고 불렀다. 시인들은 “존재 자체에 대해서 모험하고, 그래서 존재의 구역 속으로, 즉 언어 속으로 모험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자 ‘파수꾼’이라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는 우리가 정보 전달 목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낱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사유가 이미지가 아닌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의 ‘언어’를 뜻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는가 여부와는 별개로 인간은 여전히 언어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언어는 “존재의 구역”에서 솟아오르는(포이에시스(Poiesis)1))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AI의 ‘헛소리’는 좀 더 명확히 구분된다. 즉, 인간의 ‘헛소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프로그램의 헛소리, 그 자체인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헛소리’가 만연해 있다면 그조차 이미 AI의 거대한 데이터 안에 흡수되고 분석되어 정돈이 끝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처럼 AI의 역사를 테크놀로지의 맥락으로만 살피면 우리는 사태의 본질에 제대로 가닿을 수 없다. 테크놀로지 자체가 자연의 사물을 대상으로 한 인간의 ‘헛소리’ 때문에 발달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랭귀지(언어)’는 인간의 언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난도의 프로그래밍일수록 그 랭귀지는 압축적이고 수학적이다. 디지털 이진법, 즉 ‘0’과 ‘1’ 자체가 그 중간도, 다른 맥락도 두지 않는 환원주의라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디지털 문명 자체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단순 사고에 기반한다. 따라서 현대 인간의 사고가 편협하고 피상적이며 편파적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디지털 문명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같은 본질적 심연 속으로 들어가기를 다들 꺼려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러한 심연이 있다는 것 자체를 망각하고 산다.

예술은 지능과 기술 영역 너머에 있다

이젠 AI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며 경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AI를 통해 새로운 예술이 가능하게 됐다며 ‘적응’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예술에 대한 이만한 헛소리도 드물 듯하다. 그리고 장대익 교수의 말마따나 이런 헛소리들은 죄다 AI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종국엔, 지능적인 존재인 인간의 헛소리와 AI의 헛소리가 서로를 부추기며 서로를 필요로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은 전연 다른 문제다. 예술은 인간의 지능이나 기술에 있지 않다. 심지어 미디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예술 분야에서도 단지 기술의 이용을 넘어 “존재의 구역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단지 문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둠에서 솟아오르지 않는 밝음은 기술을 이용한 조명일 뿐이다. 심지어 태양도 우주라는 어둠에서 솟아난다.

또 하나, AI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와 일으키는 파장이 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일종의 프로그램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프로그램은 컴퓨터 본체나 전기라는 물질 기반 없이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만큼 거대한 능력 이면에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AI 예술 ‘데이터 조합 초월한 고유성 확보’까지 가능할지 의문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효과와 파장에 짓눌려 사태의 다른 맥락을 살펴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도 심리적인 위축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지능으로만 보는 근대인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해 보면, 인간 역시 ‘몸’이라는 본체 없이는 지능을 발휘하는 두뇌도, 또는 그 두뇌에 여러 ‘정보’를 전해주는 느낌이나 감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아니, 지능 자체도 몸이 일으키는 작용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AI를 근대 기술이나 그 기술을 촉진하는 자본주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인간의 지능 또한 인간의 몸과 그 몸을 이루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AI가 예술 작품을 창작할 가능성은 극히 긍정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AI란 그 이용자가 요구하는 정도만 조합해 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I가 예술 작품을 창작하려면 데이터의 조합을 넘어선 어떤 고유성을 가져야 하는데, 과연 이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이 그 영역까지 이를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유는, AI와 인간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역할은 양자간의 ‘대화’가 아니라 특정한 결과물을 얻기 위한 ‘요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국 인간의 질문이 관건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질문이란 본질적으로 일정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심화하거나 방향을 전환하여 맥락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AI와 인간 사이의 대화를 가능케 할 수 있을까? 앞서도 말했듯이, 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AI가 탑재된 컴퓨터 본체는 외부 사물을 감각할 수 없고, 감각이 없다면 감정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의 논리상, 감각이 없다면 대신 감정 데이터를 심어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하다. 이를테면 ‘마음.dat’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이런 시도도 실제로 진행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란 전혀 선형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감정은 개인의 경험이 ‘농축’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각자의 감성 구조와 판단, 결단, 의지를 좌우하는 지성의 역할에 따라 개인마다 차이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데이터화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감정을 한 가지로 패턴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디스토피아에 속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 가령 실시간으로 생체 정보를 저장해 ‘마음.dat’를 업데이트한다 해도, 이것 또한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설령 기술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인간이 기술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세상을 뜻한다. 이 경우, 예술 자체를 논할 수 없는 단계다. 인간에게서 예술이 사라진 상황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의 종말을 뜻하기도 한다.

예술은 AI 지배 사회의 ‘최후의 보루’

그렇다면 AI라는 문제적 상황이 현실이 된 국면에서 예술의 자리는 어디이고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술도 역사의 전개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러나 이 말이 마냥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고 적응하자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예술은 역사에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AI가 인간의 삶과 존재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면, 그 최전선에 예술이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흐름을 막고 못 막고는 다음 문제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AI가 자본의 자기 혁신이 낳은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본의 자기 혁신은 어디까지나 이윤의 증대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 이를 위해 인간의 조건인 지구(『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를 부단히 파괴한다는 사실, 그렇게 인간의 조건이 파괴될수록 예술은 치욕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일각엔 예술이 무용하다는 속설도 퍼져 있다. 그것은 예술이 근대 문명의 특징인 효율성이나 계측 가능성을 벗어나, 인간의 존재가 제 본질을 발현할 수 있도록 언어로, 그림으로, 몸짓으로, 소리로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의 이윤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을 제거한 ‘예술 무용론’은 예술가 자신의 허무주의를 가리는 커튼일 뿐이다.

테크노크라트들2)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AI 개발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인간의 본질에서 떠나지 않는 한 예술의 자리는 여전히 고유하고 굳건할 것이다. 피폐해지는 인간과 영혼의 지성소가 될 것이며, 그래야만 AI가 초래할 인간 정신의 파괴에도 우리가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나 낙관도 아니며, 예술의 특권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이를 통해 세계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 고요와 고유를 나날이 잃어가는 오늘날, 예술의 자리를 사유하는 것은 예술가의 책무이자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 필자 소개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고 몇 권의 산문집이 있다. 제22회 백석문학상 수상.

각주 1) 시(詩)’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영어 ‘poetry’의 어원이기도 하다. 포이에시스는 원래 ‘만들다’, ‘생산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때의 ’생산‘은 현실의 사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 감추어져 있거나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시’로서의 포이에시스는 현실을 넘어선 이 세상 너머의 지식을 뜻한다. 2) 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지닌 ‘기술 관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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