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젊은 연극인들은 국공립극장에서 누리기 어려운 예술적 자유를 하우에서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연을 하지 못하는 신진 연극인들의 불만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 하우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며 협력관계에 있었던 사설극단들과 어려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신진 연극인들에게 좀더 많은 공연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 점이 바로 하우가 물질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극장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를린 공연예술계는 통독이 되면서 수많은 지각변동을 경험해야만 했다. 서베를린에 위치한 몇몇 유명 극장들은 시의회의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폐쇄되었고, 동베를린의 유서 깊고 지명도 높은 극장들은 새로운 체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했다. 통독 20주년을 맞이한 2009년, 베를린의 극장들은 서서히 분단이 남긴 깊은 상처를 치유하면서 각각 다른 극장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관객확보를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들 중 변신을 위해 참신한 시도를 감행한 하우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갈구하는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베를린 연극계의 구조 조정으로 인해 기존 극장 세 곳이 통합되면서 2003년 10월의 마지막 날 새롭게 문을 연 하우(Hebbel am Ufer, 약칭 HAU)는 무엇보다 참신한 극장운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독일 연극전문지 [테아터 호이테](Theater heute)가 2004년 올해의 극장으로 선정하기도 한 하우는 확고한 예술철학이 있는 공연기획과 독창적인 홍보 전략으로 현재 베를린의 여러 극장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세 개의 극장을 통합하다

하우 1, 2, 3의 외관

세 곳의 극장이 통합되어 ';하우 1ㆍ2ㆍ3';의 약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베를린시 문화부에서 연유한다. 베를린시 문화부는 헤벨극장(Hebbel Theater, 통합 후의 하우1)의 총감독 헤르트링(Nele Hertling)의 바통을 이을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국내외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현대무용과 연극을 훌륭하게 기획하고 제작해 1990년대에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했던 헤벨극장은 실험적 연극을 선호하는 관객들의 꾸준한 지지를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극장 두 곳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바로 현대 연극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샤우뷔네가 1970년대 둥지를 틀었던 할레쉔 우퍼 극장(Theater am Halleschen Ufer, 통합 후 하우2)과 폴란드 출신의 연출가 보론(Andrej Woron)이 극단을 운영하면서 199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테아터 암 우퍼(Theater am Ufer, 통합 후 하우3)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이 두 극장은 통독 후 동베를린 지역의 새로운 공연장들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베를린시 문화부는 서로 인접한 곳에 위치한 극장 세 곳을 한 사람이 진두지휘하도록 결정한다.


작품성 높은 해외 공연과 신진들의 도전

릴리엔탈 예술감독
하우의 예술감독으로 발탁된 릴리엔탈(Matthias Lilienthal)은 1959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연극학, 역사학, 독문학을 공부하고 1991년부터 1998년 베를린 폭스뷔네의 수석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사회비판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실험적 연극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한다. 이러한 전문적 지식과 실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국제연극협회 독일본부 주관으로 2002년 라인 강변에 위치한 4개 도시에서 개최된 ';세계연극제(Theater der Welt)'; 예술감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 축제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예술감독이 시사적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실험적인 연극을 선정하는 데 남다른 안목이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릴리엔탈은 ‘세계연극제’에서 쌓았던 국제적 네트워크(벨기에, 뉴욕, 러시아, 아르헨티나 등)를 토대로 작품성 높은 해외공연을 하우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외 예술가들이 갈등 없이 실험적인 연극을 무대화할 수 있도록 극장의 경영 부분도 총괄하고 있다. 24명의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어 중소기업 규모에 준하는 하우는 베를린시가 지원하는 연간 예산 약 440만 유로(한화 약 76억)로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약 120만 유로(한화 약 20억)는 10편 정도의 실험적 연극ㆍ무용극ㆍ음악극을 자체적으로 기획, 제작하는 데 지출하고 있다. 하우에서는 평균적으로 매년 120여 작품이 초연되고 300여 회 이상 공연이 열린다. 이를 위해 하우는 베를린시의 지원금 외에도 각종 문화예술 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작품을 사전제작하거나 여러 공연단체와 협력하여 작품을 공동제작한다. 전속극단 없이 하우1(540석), 하우2(200석), 하우3(100석)으로 구성된 총 840석 규모의 이 극장을 운영하기 위해 예술감독은 국내외 초청 공연과 신진 민간극단들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우는 독일어권, 특히 베를린의 신진 연극인들이 창설한 극단들의 우수한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 예가 바로 하우가 주관하는 축제 ‘100˚ 베를린’이다. 100여 개의 베를린 민간극단들이 참여하는 이 축제는 각 극단들이 한 시간씩 하우의 곳곳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은 하우에서 공연될 수도 있고 차기 작품을 만들 때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하우는 전통적인 연극 접근 방식에 도전하는 신진 독립극단들의 등용문인 동시에 독창적인 연극미학을 제재 받지 않고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업장이기도 하다.


흠뻑 젖은 땀, 푸른 눈두덩이의 소년들

하우극장 재개관 포스터

새롭게 단장한 하우는 예술감독이 추구하는 도전적인 연극미학과 지역적 특수성을 연계시키는 홍보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우가 위치한 크로이츠베르그(Kreuzberg)와 이와 인접한 노이쾰른(Neukölln)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기초생활수급자와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인구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문화예술의 사각지대에 속한다.

극장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포스터와 현수막은 하우의 지역적 특성과 실험연극에 대한 의지를 무엇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어 2007년 독일 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이쾰른 지역의 아마추어 권투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주민 자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홍보물은 연극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극장 하우의 이미지를 형성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홍보물에는 권투시합으로 땀에 흠뻑 젖어 눈두덩이 퍼렇게 멍들어 있는 소년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소 피곤하지만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아렴풋이 짓고 있어, 마치 하우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울러 하우는 인근지역을 소재로 한 연극도 자체적으로 기획하여 지역주민들을 관객층으로 흡수하고자 노력한다.


더 넓게, 더 예리하게

하우에서는 최대한 현실에 밀착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주로 공연된다. 자체적으로 기획한 공연 은 극장 인근 지역에 위치한 가정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낯선 개인 공간에는 공연자와 간단한 설치미술이 있는데, 관객들은 12곳의 공연 장소에 따라 이주민, 독거노인, 경비원, 유명 영화감독 등의 삶을 접하게 된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어디서부터가 연극이고 현실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공연되었던 아르헨티나 출신 안무가 마크라스(Constanza Macras)와 연출팀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작품은 하우의 연극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크라스가 안무해 2003년 하우에서 공연된 무용극 <노이쾰른의 상처>(Scratch Neukőlln)는 외국에서 이주한 부모님을 둔 어린이들이 낯선 곳에서의 삶을 주제로 삼아 무용수들과 함께 직접 무대에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이어 2008년도에 공연된 <지구상의 지옥>(Hell on Earth)은 <노이쾰른의 상처>에 등장했던 어린이들이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든 후 다시 모여 성인이 되어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희망을 춤으로 구현한다. 또한 독일 실험연극의 선두주자로 각광받고 있는 리미니 프로토콜은 하우를 주 무대로 전문배우가 아닌 현실의 전문가들과 작업을 하면서 연극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환시키고 있다. 이처럼 하우는 연극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고자 한다.

<노이퀼른의 상처> <지구상의 지옥> <콜커타>(Call Cutta), 리미니 프로토콜



용기 있는 도전을 지지하는 관객들

하우는 공연 외에도 대학의 연구기관, 학술단체들과 연계해 수많은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한다. 어떤 경우에는 주제에 따라 전문가들을 대거 초대해 관객들이 자리를 이동하며 이들에게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고 약 5분씩 대화를 나누는 재미있는 행사가 진행된다. 이곳에서 개최되는 학술행사, 축제, 연주회, 영화시사회, 출판기념일을 계기로 하우는 점차적으로 다양한 관객층을 형성하고자 한다.

아울러 하우의 참신한 극장운영은 도전 정신과 용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진연극인들에게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다 보니 매년 많은 작품들이 초연되고 있지만, 이 중에서 35% 정도만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객석 점유율 또한 천차만별이다. 하우는 18세에서 40세에 걸친 관객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 학생과 지식인이 대부분인 주요 관객층은 실험적 형식의 공연을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구현하고자 하는 하우의 도전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젊은 연극인들은 국공립극장에서 누리기 어려운 예술적 자유를 하우에서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연을 하지 못하는 신진 연극인들의 불만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 하우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며 협력관계에 있었던 민간극단들과 어려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신진 연극인들에게 좀더 많은 공연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 점이 바로 하우가 예산, 시설 등 물질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극장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은기

필자소개
이은기는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연극학, 문화학, 철학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연극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베를린 문화작업장(Werkstatt der Kulture) 주최의 공연 조연출과 막심 고리키극장에서 근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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