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경영 전문성, 인력의 전문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직군(무) 분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예술경영 현장의 요구는 여전히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관리하는 만능인이다. 이러한 담론과 현장의 간극을 살피기 위해 [weekly@예술경영]은 분화가 뚜렷한 직군을 중심으로 각 직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획경영인들에게 각 직군의 경력 개발 과정과 전망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예술경영 전문인력과 직군 분화의 현 단계를 살핀다. 연재순서: ① 큐레이터


분화는 당연한 흐름, 총체적 시각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김영민 _ 가나아트갤러리 기획팀장

예술은 변종생산을 통해서 계속 자기를 갱신하고 유사영역을 통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에서 '생산'을 담당하지 않는 모든 일들이 예술경영의 직군으로 불릴 것이다. 당연히 일은 섬세하게 분화될 것이다. 그 분화에 따라 전문성은 제고되겠지만 자기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영역과 유사영역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목적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총제척인 시각에서 자신의 일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예술경영';이라는 말 혹은 그와 유사한 많은 예술과 관련된 말들, 예컨대 문화마케팅이랄지, 미술경영이랄지 하는 것들이 예술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회자되는 의미의 소통이라는 문제도 돈이 유통되어야만 하는 시장의 전제조건처럼 ‘만’ 보인다. 예술을 상품으로 ‘유통’시키는 여러 가지 방식을 개발하고, 좀더 상품으로서의 다양한 시장을 만들려는 자본주의적 노력, 즉 문화와 돈을 어떻게든 만나게 해서 문화를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려는 의지의 산물인 듯하다.


요즘은 미술 창작자가 아닌 직업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너도 나도’ 그런 일에 종사하려 하는 것 또한 자본주의가 훨씬 정교하거나 보다 허영에 기댄 상품을 생산, 공급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너도 나도’ 그런 자본의 의지를 포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술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줄고, 예술이 어떻게 폼 나는 밥벌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난다.


내가 이 일(이것이 큐레이터인지 갤러리스튼지 뭔지 잘 모르던 시절이었고, 지금도 잘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다. 미술이론을 전공하는 대학의 학과가 생긴 초창기 졸업생이었고, 졸업을 즈음하여 미술잡지와 갤러리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추천서가 학과 사무실로 들어오면 그중 한두 군데의 면접을 보고 이 일을 시작했다. 무슨 증권회사가 세운 재단에서 미술관과 작가 레지던시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가 나의 첫 직장이었다. 미술관이 어떻게 지어져야 하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운영안을 마련하고 어떤 전시를 어떻게 할 지 기획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의 조수였다. 그 이후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근 10년간 새롭게 미술계에 진입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시를 ‘운영’했고 그것이 너무 지겨워 직장을 그만두고 4년을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국민소득이 높지 않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건달처럼 놀았다. 그리고 건달처럼 노는 것이 지겨워 올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프로세스가 전문성은 아니다


지금은 일이 좀더 세분화되고 직장이라는 것이 체계화되어 일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 혹은 너무 많은 사람이 이 일을 하려 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아지고 인력의 과잉공급으로 인해서 일하는 환경이 더욱 열악해진 듯하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인 1990년대 초만 해도 대학원을 다니면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해서는 대학에서 수업을 했다. 직장에서 전시관련 일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여러모로 일을 잘하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이 된다.


전시를 기획하는 일이라는 것이 미술과 관련한 이론과 현재 진행형인 미술계, 그리고 사회적인 논의라든가 사회구성체의 조건들이 총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면, 일과 학업 그리고 ‘놀이’를 병행하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워낙 그림을 보는 일을 좋아했으므로 일이 일정 부분 놀이였던 것도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이유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경력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쌓여가는 것이지 개발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나은 일을 하거나, 좀더 잘하기 위하여 무엇엔가 관심을 기울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연계선상에서라면 훨씬 부드럽고 쉽다.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다. 미술 밖에서 미술을 어떤 눈으로 볼까하는 호기심에서.


가나아트갤러리


반도체를 만든다거나 발광다이오드를 개발하는 일과는 다르게, 이쪽 일에서 중요한 것은 ';총체성';인 듯싶다.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그리고 문화를 넘어 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이 가진 의미관계 같은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재 미술계와 그 계를 구성하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그것에 돈을 내는 사람들과 잠재적으로 돈을 낼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정말 전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다분히 이율배반적이지만) 예술이 가지는 인류학적 보편성이나 예술 자체의 예술다움 같은 일반적인 것의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이해가 예술작품을 다루는 일, 혹은 예술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들의 근간이다. 전공 바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전공한 것을 제외한 것에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이 말은 최소한 문화예술 관계자들에게는 독(毒)이다. 세상이 정교해지고 있으므로,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진행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중요할 수는 있다. 외국과 미술품을 거래한다든가 지구 건너편의 다른 문화권과 장사를 한다든가 전시도록을 잘 만든다든가 등등. 뭐 이런 일들을 진행하는 과정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 프로세스 자체가 전문성은 아니다. 그건 그냥 일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노하우일 뿐이다. 게다가 그건 금방 배운다.




휴머니티와 보편성이 최고의 덕목


아마도 이 일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지금보다 더욱 더 노골적으로 돈과 만날 것이다. 흡사 연예계처럼 계약상의 분쟁이 끊이지 않을 날도 멀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도 계속해서 파생될 것이다. 예술의 영역은 계속해서 변종을 생산할 것이고, 그 변종은 늘 새로운 것일 개연성이 크다. 예술은 변종생산을 통해서 계속 자기를 갱신하고 유사영역을 통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에서 ‘생산’을 담당하지 않는 모든 일들이 예술경영의 직군으로 불릴 것이다. 당연히 일은 섬세하게 분화될 것이다. 그 분화에 따라 전문성은 제고되겠지만 자기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영역과 유사영역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목적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총체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일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문화라는 일의 종사자는 ‘죽으나 사나’ 휴머니티와 보편성이 최고의 덕목이다.



김영민

필자소개
김영민은 1966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하여 홍익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하였으며, 같은 학교 박사과정에서 미술비평을 전공 수료하였다. 대유문화재단과 한전프라자 갤러리에서 10년 동안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초록뱀아트센터 학예실장을 역임하였다. 서울산업대학교, 홍익대학교, 경희대학교, 단국대학교 등에서 10여 년간 강의를 했으며 지금은 가나아트갤러리 기획팀장, 한국조형디자인학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장기적 안목의 전문성 구축 필요


김준기 _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한국 뮤지움 10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술 관련 뮤지움에서 종사하는 전문 지식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지위와 역할은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미술관의 업무는 전시기획뿐만 아니라 작품 수집, 보존수복, 교육, 자료 등 다양한 분야로 세분화한다. 직제분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학예직 인원 확보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계에서 일을 시작한 지 13년째다. 미술전문지 기자로 가나아트에 입사한 것이 1997년의 일이다. 그동안 미술계는 참 많이 변했다. 미술계가 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한국사회가 변했다. 나는 그 극심한 변동의 과정에서 30대 청년기를 보내면서 미술계의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했다. 미술전문지 기자, 갤러리 전시기획자, 건축물미술장식품 컨설턴트, 사립미술관 큐레이터, 비엔날레 전시팀장, 공공미술 프로젝트 매니저, 독립큐레이터, 그리고 공공미술관 큐레이터에 이르기까지.


<ART IN DAEGU 2007: 분지의 바람 > 전시 포스터앞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온 길에도 많은 위기와 기회, 좌절과 희망이 교차했다.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 전까지 나는 미술제도의 호명 체계에 있어 다소간 애매한 입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입기자에서 미술관 큐레이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거치면서도 내가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은 가치 지향이 뚜렷한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원칙으로 삼은 것은 역시 예술로서 세상을 사는 삶, 특히 예술생산을 매개하는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에 관한 소명의식을 키우는 것이었다.


기자를 사회 첫 경험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미학과 미술사, 그리고 예술학 등의 기초학문을 접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글쓰기로 처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 신분을 벗어난 이후, &lsquo;미술평론가&rsquo;라는 직함을 쓸 수 없어 &lsquo;예술학&rsquo;이라는 대학 전공이름을 쓰기도 했다. 박사과정에서 예술학을 전공하고, 석남미술상 젊은이론가상을 수상하면서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쓰기 시작했다. 비평 영역의 진입장벽에 대해 나름의 자기 검열을 통과한 과정을 생각하면 이렇게 평론가 연하는 자신이 멋쩍기도 하다. 학력자본도 쌓이고 이른바 수상제도를 통해 인정 시스템 속에 들어갔으니 평론가일 수 있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심중의 심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평론가 연하는 게 아니라 좋은 생각을 가다듬고 현장으로 뛰어들어 실천하는 일이다. 평론가를 자임하거나 호출 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라는 가치경쟁의 장에서 어떤 입장으로 유의미한 실천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미술에 관해 공부하고 글 쓰고 기획하는 나의 삶에 대해서 고정적이고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해 보인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시절,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시에 매달렸다. 이응노, 박생광, 권진규 등의 대가 전시에서부터《동강별곡》과 같은 기획전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전시기획자로서의 삶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2001년 여름, 나는 성곡미술관 별관에서 독립전시를 기획했다. 윤상진 큐레이터가 외부기획안을 연결시킨 이 전시는 《건너간다》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지난 시대의 정신을 계승한 386세대 작가들을 조망해보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가나아트 기자 겸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로 일하다가 잡지 폐간 이후에 환경조형물 컨설팅 일을 하는 팀에 속해 있었던 고로 전시를 기획할 일이 없었다. 1998년부터 99년까지의 짧지만 굵직했던 전시기획 이후 2000년 한 해 침묵해야 했다. 그 침묵이 두려워 여름휴가와 사비를 바쳤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전시기획자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독립기획을 한 것이다. 전시에 대한 평가도 엇갈려서 현장미술의 정신을 재발견하려는 기획의도를 긍정하는 리뷰도 있었고, 퇴행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은 전시기획자로서의 길을 걷게 한 불씨였다.


글쓰기를 전제로 한 전시기획 이력은 오늘날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나의 밑거름이다. 기자나 특정 전시공간의 기획자로서 주어진 일이 아닌 독자적인 활동은 힘겹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다. 월드컵 직후 쌈지스페이스에서 연《로컬컵》, 카페시월에서의《대통령 選巨前》《A4반전》등의 전시기획으로 나는 시사기획자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2008) 부산시립미술관
사립미술관에서 2년 재직 후에 부산비엔날레와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프로젝트 매니저 경험은 미술계에 대한 나의 안목을 넓혀주었다. 2006년 말에 전시기획자 최금수와 공동기획한 《아시아의 지금》전은 동아시아 전체로 눈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세계화와 지역성이라는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베이징에서 싱가포르까지 여러 도시를 돌면서 나는 조금씩 나름의 화두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대추리 현장미술은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다. 대추리 아카이브를 진행하면서 비로소 제도와 비제도, 주류와 비주류, 전시장과 현장, 관념과 실재 사이에 선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체계적 직제 분화 미흡


2007년 가을 이후 지난 2년간 나에게는 ';학예연구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것도 지방계약직 &lsquo;나&rsquo;급이라는 급수가 매겨진 계약직 공무원 신분이다. 큐레이터는 보물창고를 가진 큰 집의 일꾼이다. 특히 그 보물창고에 있는 물건들에 관해 아는 게 많은 지식노동자이다. 근대 이전의 큐레이터들은 권력자를 섬겼지만, 근대 이후의 큐레이터들은 이른바 공화주의에 입각해서 공공을 섬기는 일꾼들이다.


그러나 한국 뮤지움 10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술 관련 뮤지움에서 종사하는 전문 지식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지위와 역할은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아직 지자체가 설립한 미술관을 갖지 못한 도시가 허다하고, 기존의 미술관들도 컬렉션의 수나 양으로 보아 갈 길이 멀다.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역할 또한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만큼 미술관 종사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쌓일 시간적 거리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체계적인 직제 분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의 업무는 전시기획뿐만 아니라 작품 수집, 보존수복, 교육, 자료 등 다양한 분야로 세분화 한다. 직제 분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학예직 인원 확보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직제의 거의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해야 하는 초기 증상은 축적된 역량 강화와는 거리가 먼 만능인 학예연구사를 양산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안팎의 인식으로 인해 조금씩 해결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일례로 내가 몸 담고 있는 미술관도 올해 들어 학예연구실을 전시교육과 소장품 두 분야로 나누고 인력을 보강했다.


<인터시티>(2009) 부산시립미술관
그러나 앞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것 같다. 경기도미술관에 이어서 국립현대미술관도 법인화를 예고하고 있어 안정적인 재원조달 등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미술관뿐만 아니라 사립미술관들의 열악한 조건도 미술관문화의 정착과 큐레이터라는 직군의 전문화 과정에 있어서 큰 숙제이다. 사립미술관은 공공미술관이 채우지 못하는 풀뿌리 수준의 미술관 문화를 활성화하는 초석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미술관을 꾸리느라 여러 가지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사립미술관들의 고군분투가 돋보인다. 특히 간송미술관의 체계적인 소장품 수집과 깊이 있는 학예연구 역량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사례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립미술관 큐레이터란 &lsquo;환상 속의 그대&rsquo;일 수밖에 없다.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미술관 문화


큐레이터라는 직군은 순발력과 진중함을 동시에 요한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기는 쉽지 않다.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도 각자의 체질과 지향에 따라 다르다. 새로운 담론과 동시대성을 좇아 치열한 예술담론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전자의 가치라면, 과거를 정리해서 동시대의 길을 밝히는 연구자의 길이 후자에 가깝다. 근대성에 입각한 미술관 모델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역사성을 우선시해야 하지만, 탈근대적 개념의 새로운 미술관 모델에 따르자면 전자의 동시대성을 앞세울 수 있다.


바야흐로 분화에서 통합으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전문 영역의 분화를 전제하지 않은 채 탈근대적 통합을 꿈꾸는 망상은 금물이다. 역사성과 동시대성,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공존하는 지금 여기의 미술관 문화를 고려했을 때, 큐레이터들은 좀 먼 곳을 바라보고 각자의 전문성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이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시대에 이제 막 전문성을 찾아가고 있는 한국 큐레이터들의 소명이자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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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갤러리스트/아트딜러 ③ 에듀케이터




김준기

필자소개
김준기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가나아트 기자와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2006 부산비엔날레 전시팀장,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 경희대 겸임교수 등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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