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아치스 지하는 컨템퍼러리 공연장인 동시에 유럽에서 손꼽히는 나이트클럽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대담한 운영전략이지만, 이 공간만큼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즐기고, 감상하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서로 섞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영국에 속해 있으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스코틀랜드. 비록 행정수도는 에든버러지만, 여전히 스코틀랜드 경제와 문화를 언급할 때, 글라스고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는 우리의 개성에 비할 만큼 상인의 도시로 맹위를 떨쳤고, 현재는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과 함께 브릿팝을 선도하는 음악도시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글라스고의 공연문화를 이끄는 삼두마차는 트론씨어터, 트램웨이, 아치스이다. 트론씨어터(Tron Theatre)는 16세기에 지어진 교회를 1980년에 극장으로 바꿔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극문학 발전에 기여해왔다. 신예 극작가들이 여기에서 입봉작을 올렸고, 스코틀랜드 출신 연출가와 극작가들이 매년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트램웨이(Tramway)는 20세기 후반, 현대미술과 퍼포먼스 계열의 컨템퍼러리 예술활동에 불씨를 당긴 곳이다. 트램웨이는 교통 박물관으로 쓰던 낡은 전차 터미널을 개조해 1988년에 공연장, 갤러리, 창작 스튜디오가 함께 있는 복합문화시설로 문을 열었다. 영국의 컨템퍼러리와 실험예술의 창작기지로 큰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세 곳 중에 가장 최근에 문을 연 공연장이 아치스(Arches)이다. 아치스는 글라스고 센트럴 기차역 아래에 쓰지 않는 기차 터널을 개조해 1991년에 문을 열었다.

"바로 이 아래가 몇 개월 전까지 일하던 사무실이야." 글라스고 센트럴 기차역 플랫폼을 발로 툭툭 차며, 여행에 함께 동행해준 아치스 전 프로그래머 에린이 말했다. 순간 해리포터가 마법학교로 들어가기 위해 9와 3/4 플랫폼으로 힘차게 뛰어들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치스의 메인 홀 외관

기차에서 내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 아치스(Arches)라고 쓰인 둥근 아치형 입구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을 그대로 품은 붉은 벽돌이 아늑함과 안정감을 주는 메인홀에는 꽤 이른 아침 시간에도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컴퓨터로 어떤 영상을 함께 보기도 하고, 다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매우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입구의 맞은편에는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왼편에 있는 두 개의 출입문은 각각 사무실과 백스테이지로 통했다.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의 목조 시계탑은 이곳이 기차역 지하라는 걸 상기시켜준다. 덜컹. 갑자기 온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플랫폼에 막 기차가 도착한 걸까. 쉬이-. 정거하는 기차의 엔진 꺼지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덜컹덜컹.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온 몸으로 여행의 출발과 도착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예술과 여행은 닮았다는 말을 이렇게 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니. 이곳을 방문하는 관객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기차역 지하, 컨템퍼러리 공연장과 나이트클럽의 동거

1991년, 글라스고 센트럴 기차역 지하에 쓰지 않는 터널이 있다는 걸 발견한 아치스의 초대 예술 감독, 앤디 아놀드는 국영 철도 회사와 글라스고 시 정부를 찾아가서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들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공간을 기획할 당시, 앤디는 기존 극장이 할 수 없는 다른 역할을 아치스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간의 성격을 전통적인 장르나 규범으로 정의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지난 18년간, 아치스의 운영목적은 극장과 갤러리에서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또는 최신의 현대예술을 담아내는 것에 있었다.

장르 성격 때문에, 관객 수를 제한해야 하기 때문에, 스튜디오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어서, 그 밖의 여러 이유들로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설 수 있는 열린 공간(open platform)이 되는 것이 공간의 미션이었다. 리허설 스튜디오는 누구든지 간단한 협의를 통해 무료로 임대가 가능하다. 공연장(또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공연장이 될 수 있는 아치스의 내외부의 모든 공간)은 프로그래머와의 협의를 통해 최저 비용으로 대관이 가능하고, 기술과 홍보를 지원받는다. 아치스는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영국 내에서도 젊은 예술가들에게 꿈의 무대가 되었다. 영국과 유럽 내 최대의 라이브아트 축제이자, 프로페셔널 포럼인 ‘라이브아트 내셔널 리뷰’도 매년 봄 이곳에서 열린다.

아치스는 연간 운영 예산의 88%를 자체 수입으로 충당한다. 나머지는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 등 국고 보조금의 지원을 받는다. 공간의 법적 지위는 수익 창출을 도모할 수 있는 ‘민간 공연장’으로, 이사회가 예산과 지출을 심의하고 예술감독과 행정감독을 선임할 권리를 갖는다. 아치스의 조직은 공연, 전시, 다원예술, 기타 비정형 예술 이벤트를 주관하는 예술감독이 이끄는 프로그래머팀과 공간운영, 레스토랑과 바, 클럽 이벤트, 라이브음악 공연을 책임지는 행정감독 아래의 운영스태프팀으로 구분된다. 높은 재정자립도를 유지하고 있는 아치스의 재원은 대부분 행정감독이 맡고 있는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특히 클럽과 라이브음악이 행정감독 아래에 편재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음악을 수익 창출이 가능한 산업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치스의 음악 프로그래머들은 재능 있는 스코틀랜드 출신 인디밴드와 디제이들이 영국 내 음반시장에 진출해 독립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갤러리 전시, 바 겸 레스토랑, 아치스의 박스오피스 앞

아치스 지하는 컨템퍼러리 공연장인 동시에, 유럽에서 손꼽히는 나이트클럽이다. 처음에는 클럽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믿기도 힘들고, 수긍이 가지 않았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에 대해 진지한 문제제기를 하는 실험연극이 펼쳐졌던 공간이 열두 시 이후에는 천여 명의 젊은이가 몸을 부대끼는 클럽으로 변하는 것이 가능한가.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논란이 될 수 있는 대담한 운영전략이지만, 프로그래머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넌 공연만 봐? 춤 안 춰?”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아치스가 클럽을 운영하는 이유는, 이 공간만큼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즐기고, 감상하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서로 섞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창립자의 생각 때문이었다.


비헤이비어(Behaviour),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라

비헤이비어(Behaviour) 홍보 엽서
나이트클럽으로서, 최신의 컨템퍼러리 창작 실험실, 두 방향에서 아치스는 모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앤디의 의도대로 현대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춤추는 젊은이들이 섞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아치스는 공연장/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와 클럽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다르다. 다른 입구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은 각각 공간을 찾은 목적이 다르며, 입장 시간대도 다르고, 연령대와 성격도 다르다. 반대편에 다른 입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라이브 아트 페스티벌’(Live Arts Festival)이었다.

여름마다 아치스에서 직접 프로그래밍하는 축제로, 한 달여 기간 동안에 모든 장르에 걸친 비정형예술과 실험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 기간만큼은 각개전투로 움직이던 장르 프로그래머들이 협력해서 기획하며, 텍스트, 연극, 무용, 다원예술, 행동주의 예술, 라이브음악(Gig), 디제잉, 클럽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거나, 때로는 충돌한다. 평소에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두 종류의 아치스 방문객-현대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춤추러 온 젊은이들-의 우연한 만남과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다.

2007년, 라이브 아트 페스티벌은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을 버린다. ';라이브 아트';와 ';페스티벌';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선입견이 방문객에게 강하게 작용한다는 판단 아래, 아치스는 ';비헤이비어(Behaviour)';라는 축제 이름을 새롭게 선택한다. 영어 단어 ';비헤이비어';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선택한 태도 또는 결과를 실천에 옮긴다’는 의미이다. 축제 안에서 무엇을 보든, 경험하든 주관적인 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축제의 철학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컨템퍼러리라고 불리는 현대예술의 목적과 방향성을 가장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영어단어가 아닐까.



20대 예술감독, 프로그래머의 선택과 행동력

';비헤이비어';는 일 년 내내, 아치스에서 공연하거나,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 중에서 재능 있는 신진 예술가의 국내 데뷔 무대가 되는 역할도 한다. 축제는 평소보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에 가능성을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축제를 통해 영국 예술계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아치스는 다원예술과 실험예술을 하는 신진예술가의 성장과 지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에서 2009년에 시작한 ';메이드 인 스코틀랜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메이드 인 스코틀랜드';는 재능 있는 스코틀랜드 신진예술가 또는 단체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든 지원제도로, 선발된 작품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프로덕션 제작비와 컨설팅을 지원한다. 아치스는 2009년에 ';메이드 인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두 작품을 에든버러 프린지에 올렸고, 바비칸센터 관계자가 이 중 한 작품인 <트릴로지>(Trilogy)를 보고, 2010년 1월에 런던 시즌에 초청했다.

아치스 제작의 사이트 스페시픽 피지컬 씨어터 <내추럴 모르테> 포스터(2009) 러시아 극단 데레보, 아킨, 스코틀랜드 극단 컨플럭스의 공동작업설립자이자, 초대 예술감독인 앤디가 트론씨어터의 새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어 떠나고, 2008년에 새 예술감독이 된 사람은 아치스에서 5년 간 프로그래머로 일한 재키 와일리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살에 불과했지만, 아치스만큼은 젊고 혁신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앤디의 뜻이 강력하게 이사회에 전해져 어렵사리 통과되었다고 한다. 축제의 이름을 ';비헤이비어';로 변경하고, 스코틀랜드 신진예술가의 성장과 지원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스코틀랜드와 해외 아티스트 간의 공동제작을 기획하는 등 역동적인 최근 아치스의 행보는 재키의 판단과 행동력 덕분이었다. 예술감독뿐 아니라, 프로그램 스태프들도 20대 후반이 가장 많고,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마흔을 넘지 않는다. 물론 혈기 왕성한 젊은 스태프들 간의 충돌이나, 섬세하지 못한 운영 등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젊은 조직이 하나쯤은 있어서 생각나는 대로 시도해보고, 실패해보고, 다시 시도하는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스코틀랜드 예술계의 관용과 인내가 부럽기도 했다.

세상은 우리가 의식할 새도 없이 빠르게 변한다. 문화와 예술도 한 곳에, 하나의 형태로 머물지 않는다. 글라스고 아치스는 늘 현재진행형으로 흐르고 있는 우리의 삶과 의식을 문화와 예술이라는 그릇으로 담아내기 위해 기존의 공간들과 다른 대담한 운영전략을 선택했다. 20년이 되지 않은 극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 섣부르다. 그러나 이곳은 컨템퍼러리가 뭔지 답답해하는 사람들에게 설렘과 새로운 발견을 선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민경

필자소개
신민경은 서울프린지네트워크에서 축제와 해외업무를 담당했으며,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교류팀, 2009 의정부음악극축제 해외팀장으로 일한 바 있다. 지금은 영국 워릭대학교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에서 공연예술 국제교류 관련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