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린 결정이 '우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는 말자라는 다소 생뚱맞은 다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한 프로그램을 만든 다음, 그 결과로 무슨 일이 발생하든 그때그때 부딪혀보자'는 마음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방송에 관여할 뜻은 없으니 &lsquo;가운데만 갖다 놓으라&rsquo;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한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lsquo;정부의 방송 개입&rsquo;이 아니냐는 질문이 들어오자,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lsquo;해석&rsquo;이며, 해당 방송도 &lsquo;KBS';에 한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몇몇 신문에서 정말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진의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식채널e>를 처음 맡았던 지난 8월 초의 상황이었다.

프로그램을 처음 맡은 나에게 처음 들어온 주문들 중 하나가 바로, &lsquo;프로그램의 편향성&rsquo;을 바로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좁게는 현 정부, 넓게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더 강하게 해 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그런 주문들이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궁금하신 분들은 &lsquo;지식채널e 17년 후&rsquo;를 검색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새로 프로그램을 맡은 시점에, 그렇게 &lsquo;이념적&rsquo;인 주문들이 양쪽 모두에서 너무 강하게 들어왔다는 상황만 말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불편했다. 우선 그런 주문들이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폭력적이라는 것이 불편했고, 그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양쪽의 요구를 모두 감안하여 적절하게 균형을 맞춘 프로그램을 &lsquo;계산&rsquo;해서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lsquo;우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는 말자&rsquo;라는 다소 생뚱맞은 다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한 프로그램을 만든 다음, 그 결과로 무슨 일이 발생하든 그때그때 부딪혀보자&rsquo; 는 마음이었다.

스스로 &lsquo;좌파&rsquo;다 혹은 &lsquo;우파&rsquo;다 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편이다. 그건, 그런 &lsquo;정체성&rsquo;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혹은 시간이 지난 후에 스스로 회고적으로 내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솔직히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lsquo;무엇을 위해서?&rsquo;라고 묻는다면, 또 자신이 생각하는 &lsquo;좋은 목적&rsquo;을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그 목적이 &lsquo;좌파적&rsquo;, 혹은 &lsquo;우파적&rsquo;이라고 스스로 혹은 타인이 사후에 판단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중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처음부터 &lsquo;좌&rsquo;와 &lsquo;우&rsquo;를 먼저 규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먼저 &lsquo;좌&rsquo;인지 &lsquo;우&rsquo;인지를 밝히고 시작하자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한국에서는, 너무나 정치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런 &lsquo;정체성&rsquo;에 대한 소모적인(현실적인 이익을 위한 싸움임을 생각하면 당사자들에게는 그저 소모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논쟁 틈에서 솔직한 삶들이 가지는 다양성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좌/우의 이념투쟁(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기득권 싸움)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정작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좌와 우 사이의 중립지대가 아니라(그런 &lsquo;중립지대&rsquo;는 없다)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이어야 함을. 그렇게 솔직해지고 난 다음에야 싸움도 제대로 된 싸움이 되지 않겠는가.



김현우

필자 소개
김현우는 2002년도에 EBS에 입사하여 <시네마천국>, <애니토피아>, <인터뷰다큐 - 성장통> 등 연출을 맡아왔다. 현재는 <지식채널e>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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