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마을이라니, 어디 한 번 꿈이라도 꾸어 봤을까. 작가들이 창작과정을 공유하고 에너지를 향유하며, 그러면서 독립을 보장받는 유목상상의 예술공동체를 말이다. 특히나 국공립 미술기관의 창작스튜디오 제도가 형성하는 미학적 카르텔의 아우라와 그로 인해 상대적 소외와 박탈을 겪는 지역 미술인에게는. 전위와 전복의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조차도 예술계 내부의 비평, 미학, 미술이론이 아닌 막강한 자본이 가로채가는 이 모순의 현실에서 더더욱.

여름의 내건너 창작촌 전경
겨울의 내건너 창작촌 전경
여름과 겨울의 내건너 창작촌 전경
내건너 창작촌
내건너 창작촌
컨테이너 북카페
컨테이너 북카페
컨테이너 북카페
특별한 선물꾸러미
특별한 선물꾸러미

19세기 황혼에서 20세기 새벽까지 새로운 예술창조자의 한 사람으로 살았던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8.26-1918.11.9)는 그의 시집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노래』(1909)에서 축복받은 사랑의 도시 가나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은하수, 오 빛나는 누이여/가나안의 하얀 시냇물이여.”

가나안에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러 신들이 살았고, 예언자 아브라함에게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었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지는 않았으나 영롱한 자연의 산과 들은 분명히 드넓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역사적 판타지도 잠시, 지금 우리에게 그 땅은 열사의 모래둔덕만이 나부끼는 사막이며, 헷, 아모리, 기르갓, 히위, 여부스,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까지 섞이는 다족속 거주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조차 격렬한 투쟁을 통해 성찰하고 정복해가야 했던 가나안. 히브리어로 ‘자줏빛 고장’인 이곳 가나안은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는 미리내일까?

물을 건너면 ‘멋진 신세계’?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고, 아니,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으니,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안양천 방죽 위에서 투덜댔던 시인이 있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 안개는 여전히 샛강을 따라 흐르고 때로는 화성시 발안으로 달리는 309번 지방 국도를 뒤덮기도 한다. 그 길, 봉담을 관통한 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발안으로 가는 길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삽시간에 몸을 숨기듯 왼편 동리 길로 접어들면 샛강을 따라온 지천 하나를 건너게 된다. 내 건넜다.

‘내 건너 창작마을(화성시 봉담읍 당하리 17-4)’의 ‘내 건너’는 ‘내(川)를 건너다’, ‘내(川) 건너편’의 뜻이다. 창작마을이 들어선 이곳은 원래 논밭 일색이었고, 그래서 지천의 저쪽 사람들은 이곳을 ‘내 건너’라고 불렀다. 내(川)가 물이니 물 건너의 뜻도 있고, 내를 ‘나’로 돌리면 ‘내 건 네 것’이라는 말도 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조각가인 이윤숙은 어느 날 ‘내 건너’ 밭을 일구다 별똥을 맞았다. “내 것을 네 것으로!”라는 별똥을.

가나안이 그랬듯 ‘내 건너’ 또한 산과 들이 드넓으나 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섞이는 공장지대이고, 바로 그 옆은 KTX 고속철도가 지나는 철로변이다. 젖과 꿀은커녕 도랑에는 미꾸라지 한 마리 살지 않는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청정지역이었던 이곳이 공장과 창고들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농사도 농사지만, 예술가로서 늘 삶의 투쟁과 성찰을 지속해야 했던 그에게 ‘내 건너’의 별똥은 낯설고 기인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날부터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오, 빛나는 작가들이여/내 건너의 신세계여.”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조차도 자본이 가로채는 현실에서

‘내 건너’가 약속의 땅 가나안이 되기 위해 그는 농가 창고로 쓰던 건물을 작가들이 쓸 수 있는 작업실로 개조했다. 칸을 나누고 막이를 세워 각각의 방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동을 세웠다. 새로 짓는 창고는 아예 작업실 용도를 계산한 뒤, 조각 작업이 수월하도록 공간을 크게 나눴다. 밭의 일부는 계속 밭으로 두었으나, 새 작업실이 들어선 곳부터는 복토작업도 하여 마당을 조성했다. 울타리 둘레에는 나무를 심고, 창고동 옆에는 세미나와 전시가 가능한 작은 갤러리도 덧댔다. 그 사이, 필리핀 베트남 몽골 인도네시아 사람을 닮은 이들이 그 앞을 오갔고, 수원과 화성의 동료 선후배 작가들이 품삯 없는 품을 팔았으며, KTX의 쉼 없는 쇅-쇅- 소리와 함께 겨울가고 봄 새싹이 돋았다.

2007년 5월 23일, 회화 4인, 조각 3인, 영상 1인, 소설 1인, 평론 1인 등 총 10인의 작가, 평론가들이 입주하면서 동시에 ‘내 건너 창작마을’이 공식 오픈했다. 창작마을이라니, 어디 한 번 꿈이라도 꾸어 봤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 창동스튜디오나 서울시립미술관의 난지스튜디오가 아니더라도 작가들이 창작과정을 공유하고 에너지를 향유하며, 그러면서 독립을 보장받는 유목상상의 예술 공동체를 말이다. 특히나 국공립 미술기관의 창작스튜디오 제도가 형성하는 미학적 카르텔의 아우라와 그로 인해 상대적 소외와 박탈을 겪는 지역 미술인에게는. 전위와 전복의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조차도 예술계 내부의 비평, 미학, 미술이론이 아닌 막강한 자본이 가로채가는 이 모순의 현실에서 더더욱.

입주한 작가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의 결과물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최규조의 《Excremental》, 경수미의 《꿈꾸는 물고기의 자유로운 유영》, 이윤숙의 《명상-삶에 대하여》, 유지숙의 《Homevideo-안방극장》, 황은화의 《Another View II》전이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다. 그들의 예술둥지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쉬지 않고 불을 지폈다. 기자, 큐레이터, 평론가, 화랑디렉터, 콜렉터 등이 다녀가면서 지역의 예술생태계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터이다. 그리고 그 앞을 오가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공장과 창고들로 둘러싸인 그 곳은 한국의 일반적인 농촌 일상이나 소도시의 그것이 아니다. 막다른 길, 이상한 창고 두 동, 그런 둥지로 범상치 않게 생긴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는 노동자들의 눈빛.

창작을 해부하다, 지역을 해부하다

새 봄은 빠르게 돌아왔다. 창작마을 외에 대안공간 눈(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을 운영하는 이윤숙 대표와 김정집 관장은 새 봄에 입주한 김지훈 작가를 더해 《내 건너 창작마을 입주작가전-11개의 방》을 4월에 대안공간 눈에서 기획했다. 불과 1년이지만, 작가들의 작품은 눈에 띄게 다채롭고 풍요로웠다. 이 전시는 또한 이 대표와 김 관장의 신혼 살림집이었던 대안공간 눈의 개관 3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기도 했다. 전시와 더불어 “지역에서 찾는 지역담론의 문화정체성”을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고, 창작마을에서는 1주년을 기념해 오픈스튜디오와 세미나를 개최했다. 주제는 “창작을 해부하다”였다.

근본적으로 예술가들의 예술창작에 따른 예술적 태도 문제를 건드리기 위해 제안된 “창작을 해부하다”라는 주제는 창작마을과 창작공간의 탈정체화를 위해 기획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창작마을을 둘러싼 다양한 예술환경 및 생활환경, 지역환경에 대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토론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적인 주제기획은 창작마을이 다국적 외국인 노동자들이 근무하거나 거주하는 공장지대에 속해있다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적극적 이해 때문이었다. 예술가 개인의 개별적 혹은 독립적인 활동으로서의 창작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마을 고유의 예술적 공동체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아니면 그들이 창작마을의 주민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 사람들과 아무 관계도 맺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들과 혼인도 하고 교역도 했으며 결국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섬기게 된다. 신의 명령을 어긴 것이 훗날 그들에게는 뼈아픈 후회일지 모르나 사람이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은 이처럼 ‘신도 어쩌지 못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창작마을 입주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의 관계 맺기가 신의 명령과 무관할진대 어찌 넘어서지 못할쏜가.

이윤숙 대표는 노동자들이 창작마을로 ‘건너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컨테이너 북카페를 겨울 초입에 오픈했다. 2008년 12월 9일, 그날은 지천의 저쪽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창작마을 예술가들,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 신부와 수녀님, 초대받고 달려 온 타 지역의 예술가들, 그리고 다종다양의 사람들이 모여 작은 축제를 벌인 날로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소소한 파티가 참 많았다. 오픈스튜디오와 세미나가 열리던 날도 그랬고, 북카페를 오픈하는 날도 그랬다. 풍성한 떡과 고기가 빠지지 않는 잔칫날들이었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함께 했다.

사람들이 내를 건너와

북카페를 오픈하고 곧 1기 입주작가 퇴실과 2기 입주작가 입주가 있었다. 다섯이 나가고 셋이 들어왔다. 물론 2009년 새 봄에 새 작가 둘이 입주했다. 1기 입주작가가 이윤숙 대표와 가까운 후배들이었다면 2기 입주작가는 그야말로 청년 작가들로 채워졌다. 나간 작가들의 전시가 대안공간 눈에서 쉬지 않았고, 창작마을 2주년이 되는 5월에 역시 《내건너 창작마을 입주작가전》이 개최되었다.

2007년이 개관을 준비하며 모색하고 전망하던 시기라면, 2008년은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통해 내건너 창작마을의 미래 설계를 도모하는 시기였다. 간간히 ‘왕언니’ ‘보스’ ‘대모’ 따위로 불려 지기도 하지만, 이윤숙 대표는 권력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개척교회 권사에 가깝고 예술공동체의 향유권을 무상무한 리필하는 자선가를 닮았다. 2009년은 입주작가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작업에 빠져들 수 있도록 도전보다는 관리에 힘쓴 듯하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그의 가족이 창작마을로 아예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주하자 창작마을의 분위기는 안정 속에서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다.

컨테이너 두 동을 올려서 북카페를 오픈했듯이 그는 몇 개의 컨테이너를 더 들여와 ‘공장단지 내 특별한 선물꾸러미’를 오픈시켰다. 작가들을 위한 미니 갤러리와 물물교환 장터도 오픈했고, 외국인 노동자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도 기획했다. 창작마을이 창작스튜디오이면서 동시에 더불어 함께하는 ‘마을’이라는 것을 그는 직접 실천으로 옮겼다.

스튜디오, ‘마을’이 되다

2010년, 해가 바뀌어 3기 입주작가들이 입주했고 여름엔 오픈스튜디오도 개최했다. 필자는 1기 입주평론가였고, 현재 명예입주 평론가다. 이름만 올라있는, 아마도 가장 긴 ‘입주’일지 모르겠다. 창작마을과 가까운 거리에서 더군다나 이미 5년 전에 화성시로 삶터를 옮긴 필자로선 더 없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들과 함께 예술생태계의 작은 고리를 담당할 수 있으니.

어쨌든 지역의 청년 작가들로 채워진 내건너 창작마을엔 빵 굽는 냄새가 아니라 예술 굽는 냄새가 가득하다. 그들은 그들의 예술을 달구질 하면서 창작마을의 공동체를 더 뜨겁게 일구고 있다. 작업실이 없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이 작은 스튜디오는 그래서 결코 작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제 다양한 주체들의 공간으로 다변화 한 창작마을은 기존의 창작스튜디오 개념으로는 해석 불가능한 ‘마을’이 되었다. 그 마을의 출발은 이랬다.


&ldquo;창작마을은 조각가 이윤숙이 <자연콩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면서 유기농 경작지로 사용하던 밭을 일부 전용하여 농가와 창고, 사무실 용도로 지은 조립식 건물 3동(40평, 60평, 60평)을 창작스튜디오로 오픈한 곳입니다. 주변은 다양한 공장들이고 바로 뒤로는 KTX가 수시로 지나가구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남아있는 주말에는 노동자들을 비롯해 다른 공장 사람들과 지역주민, 어린이들을 위해 교육 및 체험공간, 쉼터로 항시 열어둡니다. 문화공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작가들이 입주한 뒤에는 오픈스튜디오, 입주작가전,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더 넓은 세상으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rdquo;-내건너 창작마을 소개글 중


김종길 필자소개
김종길은 미술평론가이자 현재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로도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와 녹색대학교에서 문화예술 기획 및 강의를 하고 있다.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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