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문화행정이란 뒤에서만 하는 거지, 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은 별로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아이템, 사업, 제도가 성공해서 그 분야가 발전이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 저절로 웃음이 난다. 이 길을 동행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고 대할 때마다 마치 내가 문화예술의 전도사가 된 것 마냥 열심히 용기를 북돋워주고, 하는 일을 주어진 소명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내 삶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종인
[사상계] 표지
[사상계] 표지
콘택600 신문광고(1974)
콘택600 신문광고(197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원 기사
[경향신문] 1973년 10월 11일자
 1977년 발간된 첫『문예연감1977년 발간된 첫『문예연감』
월간 [문예진흥] 1981년 4월호
▲ 1977년 발간된 첫『문예연감』
▼ 월간 [문예진흥] 1981년 4월호
동숭동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동숭동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종인
문화행정 연수과정 모습(1996)
문화행정 연수과정 모습(1996)
문화행정 연수과정 모습(1996)
신설 문화부 어떤 일 해야 하나” 문화발전연구소가 연 공개토론회 기사 [경향신문] 1988년 5월 20일
“신설 문화부 어떤 일 해야 하나”
문화발전연구소가 연 공개토론회 기사
[경향신문] 1988년 5월 20일
이달의 문화인물로 만들어진 공중전화 카드
이달의 문화인물로 만들어진 공중전화 카드
지역문화의 해 이후 자생적으로 조직된 지역문화네트워크의 창립총회(2003)
지역문화의 해 이후 자생적으로 조직된
지역문화네트워크의 창립총회(2003)

예술경영(Arts Management)과 예술행정(Arts Administration)은 흔히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또 구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예술경영은 민간부문의 예술 공간이나 단체의 운영관리를 뜻하는 말로, 예술행정은 정부영역을 포함한 공공부문의 예술과 관련된 운영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술경영과 예술행정이란 용어조차 생소했던 70~80년대, 이 두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문화계의 멀티플레이어 이종인은 후학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민간단체의 예술경영에서 공공부문의 예술행정과 문화정책의 기본 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현대 예술행정과 경영의 초기 흐름의 변곡점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는 우리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상계]의 편집장으로, 광고기획자로, 예술행정가로, 문화연구자로, 정책수립과 전략기획자로서, 문화가 척박했던 시대에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지식인의 삶을 살면서 새로운 문화지식체계를 개척해온 ‘제도권 속의 문화게릴라’(언론인 안병찬의 글)였다.

1980년대 후반 막 대학을 졸업하고 문예진흥원에 입사했던 나는 덕수궁 석조전에 사무실을 둔 문화발전연구소에 발령을 받아 당시 소장이었던 그에게 행정의 기본을 배웠던 인연이 있다. 당시 그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문화행정의 달인’으로서 풍모가 있었다. 연구소장실은 연구소의 직원들에게 한 때 두려움의 장소였다. 그는 올라온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서류를 집어던지곤 했다. 그나마 통과된 보고서라도 그가 깨알 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첨삭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행정에 엄격한 그였지만, 술자리에서는 어린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다감한 선배였고, 특유의 소년 같은 웃음과 함께 문화계 어른들의 흥미로운 일화를 술술 풀어놓아 ‘살아있는 문화 야사(野史)’로 불리기도 했다.

이종인은 1934년 12월 10일, 충북 청원군 남이면 대련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청주 교동초등학교, 청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58년에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그의 문화계와 인연은 군에서 제대할 즈음,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김준엽 선생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사상계, “제일 많이 찍어본 게 15만부”

“[사상계]의 장준하 선생 동생 중에 장창하라는 친구가 있는데, 학교는 다르지만 나랑 동기다. 그 친구랑 알게 되어 대학 다니는 동안에도 가끔 아르바이트로 [사상계] 일을 도와주곤 했다. 내가 제대할 무렵이 가까워 오는데 장준하 선생 퇴근 무렵이면 내가 내리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는 거의 매일 저녁술을 샀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사상계]에 와달라고 해서, 술 많이 얻어먹은 죄 때문에 [사상계]에 들어갔다.”

[사상계]는 당시 지식인들과 학생층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잡지로 정치·경제·사회·철학·교양·문학·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특히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어 당시 문예지가 적었던 상황에서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크게 넓혀 주었다. 이종인은 [사상계]에서 60년부터 67년까지 만 6년 동안 편집부장과 취재부장을 번갈아 하며 우리나라 각계의 저명인사들과 교류를 맺는다.

“[사상계] 사무실은 종각 옆 화신백화점 맞은 편 한청빌딩이라는 5층짜리 건물의 5층에 있었다. 그곳에서 잡지를 만드는 일에 관여했는데, 그 무렵에 만났던 선생님들, 필자들, 편집위원 분들이 내가 나중에 문예진흥원에서 일할 때 직간접으로 연관이 된 분들이다. 각계의 원로, 작가들을 다 그때부터 만났다. [사상계] 시절에 기억나는 인물들을 죽 적어봤더니, 장준하, 김준엽, 안병욱(철학), 양호민(조선일보), 故 신일철 교수(고대), 지명관, 함석헌, 신상초, 최석채(언론인), 부완혁(언론인), 홍종인(조선일보) 같은 분이 계셨다. 홍 선생은 나랑 이름이 같아서 홍 선생이 사무실에 오면 회사친구들이 나를 보고 ‘종인아, 종인아’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 여석기(영문학자), 이만갑, 이극찬, 김상협(고대 총장), 조지훈, 김유택, 유창순(산은총재), 엄민영, 한태연, 황산덕, 이병도, 이희승, 이숭녕, 양주동, 김활란, 김옥길, 이봉순, 송지영(전 문예진흥원장), 고정훈, 김철(김한길 父), 이런 분들이 [사상계] 때 만났던 분들이고, 그 무렵에 만났던 작가로는 황순원, 김동리, 안수길, 박목월, 김성한, 선우휘, 오상훈, 전광용, 이호철, 전상국, 이범선, 한남철, 이청준, 김승옥, 홍성원, 서기원, 구상(시인), 조경희, 전숙희, 김춘수 선생과 같은 문인들로 거의 다 [사상계] 필진에 속했던 분들이다. 그 중에는 사상계 출신 작가도 있고. 나중에 문예진흥원장을 했던 곽종원, 송지영, 정한모, 여석기, 정한숙, 서기원, 김정옥, 차범석, 문덕수 이런 양반들도 다 필자로 관여했다. 정한모 선생은 서울대 졸업하고, 공주사범학교 선생으로 가 계셨는데, 어쩌다가 우리가 원고를 청탁하면, 꼭 붓글씨로 ‘시골에 있는 저에게까지 차례를 주셔서 고맙다’고 편지를 써서 보내시곤 했다.”

[사상계]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면서 잡지를 만드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그 당시에 우리나라 각계각층의 저명 필자들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문화연구자로 다양한 정책을 기획하고 수립하는데 실질적인 자양분이 된다.

“내가 [사상계]에서 편집을 맡았을 때 제일 많이 찍어본 게 15만 부다. 당시 보통 한번에 5만부를 찍었는데, 세 번 더 찍었으니 15만부였다. 그땐 1만부만 나가도 대형 잡지였다. 15만부까지 더 찍어서 전국으로 다시 내려 보냈는데, 나중에는 보낸 책이 묶여있는 그대로 반품이 올라왔다. 뜯지도 못하게 한 거다. 다 그런 식으로 공작을 했다. 주문이 와서 찍어 보냈는데, 밑에서는 막혀서 그대로 돌려보내는 거다. 완전히 망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못살게 굴어서, 재정이 어려웠다. 한참 어려울 때는 제날에 월급 받아본 예가 없다, 직원들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장준하 사장이 잡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정치 쪽으로 나가려 하고, 말리다 통하지 않아서 결국은 [사상계]를 그만두게 되었다. 폐간되기 1~2년 전에 그만둔 셈이다.”

사회조사방법 도입, 광고기획의 새바람

[사상계]를 떠난 이종인에게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에서 광고기획 업무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대학에서 전공한 사회조사방법을 활용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광고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유한양행에서 광고기획을 담당하면서, CM송 만들고, CF 만들고, 카피라이터도 하고, 콘티도 짜면서 재미있게 일했다. 한번은 유한양행에서 신제품을 도입 한다고 해서 감기약을 하나 들여온 게 있었다. ‘콘택600’. 그걸 미국에서 가져와서 판매해야겠는데, 시장조사도 하고 광고전략도 짜라는 거다. 그게 초기감기약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감기에 걸렸다고 할 적에 어떤 증상이 나오는지 물어봤다. 조사 결과 시민들이 답한 순서가 재채기, 콧물, 코막힘 순이었다. 그래서 “재채기, 콧물, 코 막힌 데, 감기라고 생각되면 콘택600”이라는 광고 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그 약 이름은 바뀌었지만, 카피는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한킴벌리에서 처음 나온 휴지의 구매력 조사를 하면서 길거리에서 판촉활동을 벌여 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러다 회사에서 일본 광고연수까지 보내주겠다는 것을 물리치고, 잠시 여원사의 광고국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유한에서 일 년 있다가 68년 말에 여원사에 가서 광고료 제값 받는 일에 열중했다. 재미있는 일은, [여원] 표지에다가 장미꽃 그림을 싣고 장미향이 나게 인쇄를 하면서 표지광고(표1)를 하나 넣기로 했다. 엄청 비싸게 받았다. 덩달아 다른 잡지들도 따라했다. [여원] [주부생활] [여성동아]의 광고부장들과 함께 잡지광고료 제값받기에 협력했던 일도 생각이 난다.”




사상계 하던 사람이 어떻게 문공부 일을…

1970년 광고와 편집업무를 대행하는 개인회사를 차린 것이 그만 화근이 되었다. 부도를 내서 집도 날리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전전긍긍 하던 때에 선우휘 선생의 권유로 문공부 홍보조사연구소 여론조사 담당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다.

“72년 초인가 그럴 거야. 사업을 하다 부도내고 전전하는데, 하루는 선우휘 선생이 나를 찾는 해 만났다. 당신 그러지 말고 다시 월급쟁이 하는 게 어떠냐, 문화공보부 홍보조사연구소라는 데서 전문위원을 구하는데 나를 몇몇 사람이 추천해서 문공부에서 나를 찾고 있다는 거다. 내가 ‘[사상계] 하던 놈이 어떻게 문공부로 가느냐’고 했더니 공보는 아니고 여론조사 전문위원이다고 하더라. 그전까지는 여론조사를 대학교수 몇 사람이 용역 받아 하고 그랬는데, 전문위원을 두기로 하고 대학에 사람을 문의했더니 학교에서 나를 추천했던 모양이다. 내가 학사논문을 ‘소년범죄에 대한 사회조사’에 대해 썼는데 사회학과에서 사회조사를 해서 논문 쓴 게 내가 처음일 거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나를 추천했던 것 같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집에서도 ‘어떻게 할래, 빚쟁이한테 쪼들리면서, 월급이라도 타야 빚을 갚지 않겠느냐’ 했고. 그래서 들어가기로 했는데, 들어갈 때, 함석헌 선생이 정말로 거기 갈 거냐고 물으셨다. 함 선생은 우리 보고 장준하 씨를 군단장, 나를 사단장이라고 부르던 사람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거길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씁쓸해 했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여론조사 일이고 하니 이해해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

여론담당 전문위원으로서 그는 문화행정 관련 조사 2건, 국책 여론조사 3건 등 총 5건의 조사를 진행했다. 특히 문화행정 전달체계에 대한 조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문화공보부에는 8.15, 6.25 등 계기성 홍보가 있었다. 그런 때 팸플릿을 만들거나 홍보책자, 포스터를 만들어 지방으로 보내고 그러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어떨 때는 지방에서 한참 뒤에나 그걸 받아 붙이는 거다. 그래서 ‘문화행정의 전달체계’를 조사했더니 면단위까지 내려가려면 두 달 반이 걸리는 건들이 나오고 그랬다. 그래서 난리가 났다. 장관이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불러다 놓고 나보고 조사결과를 보고하라는 거다. 그래서 보고했더니 이게 뭐냐고 기합이 떨어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문공부가 발칵 뒤집혔다. 문공부 관리들은 당신이 뭔데 이런 조사를 해서 고생시키느냐고도 하고. 말도 많고 그랬다."

문예진흥원에서 다시 책을 만들다

홍보조사연구소에서 한 2년쯤 일하고 있을 때, 문화공보부 산하에 새로운 문화기관이 생겼는데 거기 좀 가서 일을 도와주라는 연락이 왔다.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특수법인으로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73년 개원해서 이제 막 지원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홍보조사연구소장이 어느 날 부르더니, 문화공보부 산하에 문예진흥원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생겼는데, 윤장관이 당신 거기 보내라고 부탁을 하더라고 하기에, 내가 거기 가서 뭘 하느냐고 했더니 책 만드는 일이다고 하더라. 그래서 무슨 책을 만드냐고 했더니, 장관이 진흥원 발족하면서 얘기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문예연감』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월간지 [문예진흥](후에 [문화예술])이었다.”

“문예진흥원은 1973년도에 설립돼서 처음에는 지금의 광화문 버스정류장 우리은행 자리에 있었다. 1973년도 7월인가부터 문예진흥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했고, 1974년 3월 20일에 내가 갔을 때는 국악고등학교 2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 해부터 지원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지원부서로 국학진흥부, 예술진흥부가 있고 사업부와 총무부 등 아마 네 개 부서가 있었는데, 나는 사업부 소속으로 1974년 5월에 [문예진흥] 창간호를 만들었다. 창간호 커버 사진은 (마침 5월이고 해서) 어린이 대공원에 전시된 어린이 조각 작품을 직접 찍어다가 실었다. 『문예연감』은 76년도에 처음 나왔다. 그 전 74년에는 조선조 시대까지의 우리나라 문화예술 관련 역사적 사건을 모아서 기록한 『문예연표』를 만들고, 75년에는 구한말에서 개화기, 일제 강점기 말까지의 문화사를 엮은 『문예총감』을 먼저 냈다. 그다음 76년부터 『문예연감』은 매년 한권씩 나오고 있다.”

진흥원 초기 주로 월간 [문예진흥]과 『문예연감』 출판에 전념하던 그는 최창봉 사무총장의 부임 이후 기획실을 맡아 본격적인 문화행정의 기초를 쌓아 나가게 된다.




서울대 본관이 헐려나가던 것을 막고

“아마 76년 초일 거다. 당시에는 진흥원 본관이 출판회관 건물 안에 있었고 충무로에 연극인회관(문예극장 전신)이 있었고, 안국동에 미술인회관이라는 미술관이 있었다. 나는 출판회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땐데, 최창봉 씨가 사무총장으로 부임하면서 감원이 있었다. 그때 나는 기능직 특급으로 있었는데, (당시는 책 만드는 일을 기능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때다.)갑자기 기능직 3급으로 강등이 되었다. 당시 기능직 3급은 운전기사 급이었다. 기분도 상하고 해서 그만 둘 생각으로 출근을 안 했다. 그래도 [문예진흥]에 게재하려고 조사했던 ‘문예진흥에 관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책에 실어야겠기에 집에서 그걸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최창봉 씨로부터 만나서 얘기하자는 연락이 왔다. 이 양반이 자기가 잘못 알아서 이렇게 된 거니까, 잊어버리고 서로 없던 일로 하고 같이 일하자고 하는 거다.”

최창봉 사무총장은 이미 마음이 상한 그를 붙잡기 위해 며칠 밤을 함께 술을 마셨고, 그러다가 ‘문예진흥원을 제대로 키워보자’는데 서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렇게 며칠을 밤술을 마시면서 얘기하다가 나온 게, 진흥원을 제대로 키워보자, 청사부터 잡아보자, 그러면서 얘기가 서로 맞아서 의기투합됐다. 그렇다면 같이 하자, 그렇게 되었다. 당시 동숭동 서울대 본관이 막 헐리고 있을 땐데, 중간에 중지시키고 그곳으로 진흥원이 이사를 했다. (이미 건물의 한 쪽 벽이 헐려버린 상태여서 개보수했다. 현재 ‘예술가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건물의 한 쪽 벽은 건물의 다른 몸체와 다르다.) 그때가 1976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 일대에 문예회관과 미술회관을 짓겠다고 하니까, 서울시에서 지금의 낙산가든 자리까지 전부를 묶어서 우리한테 다 사라고 했다.”

“서울대학교 터 전체를 예술촌, 문화마을을 만들기로 계획을 짜서 우선 문예회관과 미술회관 건립계획을 짰다. 공간의 김수근 씨가 설계하고, 돈이 생기면 야금야금 넓혀가자 해서 나중에는 예총회관 터까지는 샀다.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기다리다 못해서 나머지 묶어놓았던 땅을 풀고 말았다. 그때 진흥원에 돈이 있었나. 당시에는 기금이 들어오는 대로 매년 다 썼다. 그렇지 않고 그걸 조금만 쌓아놨더라면 훨씬 넓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지원국장이 돼서 봤더니 문제가 산더미”

현재 국립예술자료원으로 성장한 문예진흥원 자료관의 처음 출발도 그때 이루어졌다.

“2층 방 한 칸을 자료실로 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흥원 원장실부터 각 직원들에게 오는 프로그램, 안내장 같은 것까지 다 모았다. 미술, 음악 프로그램과 연극포스터를 모으기 시작하고, 연극대본, 시나리오까지 모았다. 나중에는 마로니에미술관이 건립되어서 그곳2층으로 자료관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문예강좌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본관 3층 강당에서 했다. 처음에는 문학강좌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마로니에백일장이 생겼다. 봄에 마로니에 공원에 꽃필 적에, 수강생들 위주로 백일장을 열었던 게 연중행사가 되었다.”

그는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을 담당하는 지원국장으로 공모방식의 지원제도를 도입하고, 지금은 없어진 ‘작가기금 융자제도’를 개선하는 등 지원제도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그러다 77년인가 78년에 지원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지원업무를 맡고 봤더니, 초창기 문예진흥원이라는 데가 정말 돈만 지원하는 기관이지, 스스로 버는 기관이 아니었다. 남이 모아준 돈을 걷어서 나눠주는 기관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례가 없더라고, 유사한 기관도 없고. 그때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한다는 식으로 했다. 그러니까 지원정책, 행정체계가 제대로 서있지 않았다.

“초창기의 경우 지원사업이 한건 들어오면 한건 심의하고 그랬다. 신청 받는 건당 바로 심사를 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업은 지원금보다 심의료가 더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수시심의를 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예술계 있는 분들한테서 왜 나는 지원금을 안주느냐, 왜 누구보다 지원액이 적냐부터 하다못해 지원금 신청서는 왜 필요하냐, 돈 주면 그만이지 건방지게 그런 걸 내라고 하느냐 하는 얘기도 나오고,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국장이 돼서 봤더니 문제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그 당시에는 ‘작가기금 융자제도’가 있었는데, 작가들이 작품을 쓰는데 필요한 돈을 융자해주는 거다, 100만원부터 500만원까지. 어떤 경우는 장편이라고 1500만원을 지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기한이 지났는데 회수는 안 되고, 작품을 내고 나면 돈을 갚아야하는데, 그게 안 들어와서 몇 년을 미수금으로 싸여있는 거다. 지원국장 되고 제일 먼저 하라고 하는 게 작가기금을 해결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마지막으로 회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갚으라고 하고, 돌아가신 분은 할 수 없이 결손처리 하는 걸로 하고. 작가기금융자제도가 없어졌다.”

“지원제도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자 싶어서, 지원신청을 공모제로 하고, 일 년에 한번 심사해서 지원대상을 선정하자, 해서 공모심사제를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이다. 9~10월에 신문광고를 내고, 거기에 지원신청서식, 심사방법 등을 고쳐서 일 년에 한번 신청하고 심사하게 만들었다. 그때 찾아본 것이 미국의 NEA 자료다. 그 당시 만든 정산제도, 심사제도, 사업계획 등 기본적인 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70년대 말, 기획실장으로 임명되어 이전에 담당했던 출판업무도 총괄하게 되는데, 이미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 [문화예술]과 『문예연감』외에 ‘문화예술총서’ 13권, ‘공연예술총서’ 10권, ‘문예진흥문고’ 30권을 출판했고, 유네스코 자료를 토대로 각국의 ‘문화정책 시리즈’ 15권을 번역 출판했다. 특히 문화예술총서는 『예술경영』 『문화행정』 『예술공학』 『예술경제』 『문화운동』 등 이후 후학들의 필독서가 된 책들이다.

이때에 시작된 또 하나 중요한 사업은 한국문학번역서의 해외출판이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오면 한국에서 만든 영문 자료나 프로그램은 다 휴지통에 버리고 갔다. 호텔 사람들이 그러는데, 안 읽히고 재미가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칙을 세웠다.

“외국인이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필요하면 한국인하고 같이, 둘이 함께 번역을 하든지, 외국인이 번역한 것도 외국어를 아는 한국 사람이 다시 봐서 손질을 하기로 하고, 그렇게 번역한 책을 한국에서 출판하지 않고 외국출판사에서 출판하기로 했다. 외국 출판사를 물색하는데 처음에는 안 나타났다. 그러다 뚫은 게, 영국의 하이네만 출판사의 홍콩지사인 홍콩하이네만 출판사였다. 거기서 시작해서, 몇 년 후에 프랑스, 독일, 스페인에 하나씩 뚫어서 출판되기 시작했지. 나중에 한국문학번역원이 별도로 독립되어 사업을 이관하게 되었다.”




문화예술진흥계획과 적립금제도의 시작

그는 앞서 살펴본 대로 문예진흥원에서 기능직과 사무직, 임원(상임이사)을 두루 거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며, 기획실장으로서 최장수한 기록도 갖고 있다. 그가 문예진흥원 기획실을 이끌면서 정부차원의 문화예술진흥계획은 매년 그의 손을 거쳐 갔다

&ldquo;기획실장이 되면서 매년 연도별 문화예술진흥계획을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1979년도에 <제2차 문화예술진흥계획>을 문화공보부 문예진흥관실과 협의해서 만들어 추진하기로 했는데, 10.26 사건이 나고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빛도 못 보고 시작하자마자 사장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오면서 &lsquo;경제개발계획&rsquo;이 &lsquo;경제사회개발5개년계획&rsquo;으로 바뀌고 &lsquo;제5차 5개년 계획&rsquo;의 수정계획이 생기면서부터 문예진흥계획이 포함이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기획에 참여했고 그 후 6차, 7차 경제사회개발5개년계획에도 내가 위원으로 참여해서 경제기획원 측과 의논해서 문화예술계획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rdquo;

&ldquo;기획실장 당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문예진흥기금 적립금제도를 처음 시작한 거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지원금 정산을 받으면서 못쓴 돈, 남은 돈 다 반납을 받았다. 그걸 다 모아서 적립금에 집어넣었어. 정산 제대로 받아보면 엉터리 정산이 있다. 그걸 반납 받아서 적립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거 만들면서 기금확충계획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복권 수익금을 문예진흥기금으로 조성하자는 것이다. 영국 사례를 본 따와서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복권기금 얘기는 정부에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문화예술인들이 반대를 했다. 점잖은 예술인들이 사행성 복권 돈을 어떻게 문화예술에 쓰느냐며 반대 소리가 높았다.&rdquo;

&ldquo;또 하나 기금확충 방안으로 릴테이프(공테이프)에다가 문예기금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안 되었다. 오디오/비디오 테이프 사가면 다 복사하는 데 쓰는데, 그건 저작권 침해행위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도 릴테이프 자체에다가 판매금액의 몇 퍼센트를 문예기금으로 붙이자고 했다. 문공부는 그럴만하다고 했는데 상공부에서 반대했다. 또 하나 억울해서 하는 얘긴데, 내가 광고도 해 보고 최창봉 사무총장이 방송, 광고에 관해서 잘 아는 분이라, 방송광고에다가 문예진흥 타임을 달라고 했어. 예를 들어 KBS, MBC 연속극 방송의 광고료에서 진흥기금을 떼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문공부 사람들이 그걸 듣고는 일 년 넘게 아무 얘기가 없더니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를 만들더라. 그래서 나하고 최 총장이 남의 저작권, 아이디어 빼먹는 거라며 항의를 한 적이 있다. 그 때문인지 초창기 방송광고심의위원에 문화예술분야 위원을 꼭 하나씩 넣었고 공익자금의 상당액이 문화예술부문에 투입되었다.&rdquo;






문화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와 문화통계를 시작하다

문예진흥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문화정책을 체계적으로 연구․개발하기 위한 연구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정부 산하에 문화예술 연구기관이 전무한 시기였다. 문예진흥원 기획실이 매년 정부차원의 문예진흥계획을 작성하곤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론회, 보고서를 통해 문화정책 연구기관 설립을 건의하곤 했다.

&ldquo;연구소 출범은 문예진흥원이 설립된 지 12년이 지난 86년에 이루어졌다. 그런 게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얘기했는데, 다짜고짜 국가연구기관으로 출범하기 어려우니까 문공부에서 하는 얘기가 그럼 진흥원 안에 연구기관을 하나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86년도 사업계획에 연구기관을 만든다는 것이 반영되었다. 86년도 11월 중순까지 아무 얘기가 없다가 어느 날 정한모 원장이 저녁에 삼선동 자매집(당시 문화예술인들이 잘 가던 술집)에 가서 술 한 잔 하자고 부르더라. 그 자리에서 연구소를 나보고 맡아달라는 거였다. 그동안 적임자를 문공부와 여러 군데서 찾아봤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이형에게 어렵게 부탁하는 거라고. 그래도 나는 못 맡는다 하고 헤어졌다. 그러더니 며칠 있다가 연구소장으로 발령을 내더라. 나는 86년 12월 초인가, 진흥원 기획실장을 퇴직하고 새로 생기는 문화발전연구소 연구소장(상임이사)으로 발령받게 되었다.&rdquo;

1987년 2월 25일 정식 개소한 문화발전연구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정책 연구기관으로서 덕수궁 내 미술관을 개조하여 사무공간을 사용했으며, 조사연구부, 연수관, 자료관 3개 부서를 두었다. 문화발전연구소는 92년 예술의전당으로 이전했고 94년 6월, &lsquo;한국문화정책개발원&rsquo;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종인은 연구소장으로 3연임하게 된다. 연구소가 문화행정분야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문화정책에 대한 체계적 조사연구와 문화통계를 처음 만들었고, 문화행정교육과정을 개설하여 운영한 것 등이다.

&ldquo;연구업무로 문화발전과 관련된 정책, 자료, 연구보고서 등 140여 건을 제작, 발표, 배포했다. 그 중 특히 얘기하고 싶은 것이 문화통계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계청에서 인정되고 있는 문화예술 통계를 내가 연구소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86년부터 87년 말까지 2년에 걸쳐서 한국의 문화지표 체계를 연구했다. 처음에는 정신개발연구원 쪽에 외주를 줘서 만들었는데 내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진흥회 멤버들, 관련된 통계 전문가, 문화인류학 전문가, 사회학 전문가들을 모아서 문화예술 지표체계를 조사연구해서 만들었다. 여기에 근거해서 실제조사를 한 것이 「문화향수 실태조사」「문화예술인 및 단체 실태조사」이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3년마다 「문화예술 통계」를 냈다. 지금도 문화관광연구원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초창기에는 국가통계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연륜을 쌓다보니, 지금은 문화예술 통계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문화통계를 내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거다. 한번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서 국제적으로 알려야겠다고 하기에 조사표에 영문 설명을 같이 넣었다. 유네스코 측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rdquo;

&ldquo;북한문화예술연구도 우리 연구소에서 처음 시작했다. 북한 문화예술과 관련된 자료들, 책자에서부터 영상, 비디오테이프 등이 자료실의 특수자료 소장실에 있어서 허락받고 오는 사람들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 그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문화예술 연구자료가 10여 권으로 고려원에서 나왔는데 지금도 북한문예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인용, 참고가 되고 있다. 북한의 신문, 잡지, 오리지널 텍스트를 맘 놓고 볼 수 있었고, 북한 관련 영화, 영상도 미국이나 유럽 쪽의 한국문화원 등을 통해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다 수집했다. 그땐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꽃 파는 처녀> 같은 걸 보러 우리한테 오곤 했다.&rdquo;




&ldquo;현장에서 종종 졸업생들을 만난다&rdquo;

&ldquo;연수관에서는 일반인 대상의 문화예술강좌와 함께 문화행정 연수과정을 처음 개설했다. 이 과정에는 문화부 공무원과 예총, 문화원 사무국장, 방송국기자들도 와서 강의를 듣곤 했다. 아직 대학에 문화행정 관련 학과가 거의 없을 때였으니까. 문화행정 연수과정을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은, 연수를 끝내고 수료식을 하고 난 뒤에 학생들이 몇 명씩 찾아와서, 이런 것에 대해 계속해 연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곤 해서, 내가 대학원 과정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외국 유학을 추천하기도 했다. 나중에 문화부 차관을 지냈던 모 씨도 그 당시 문화행정과정 강의를 듣고는 내가 조언한 영국 시티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문화원에서 일하다 나중에 경기도박물관장을 했던 모 씨도 그 당시 이 과정을 수강하고 대학원에서 이 분야를 전공했다. 이 연수과정이 많이 알려지면서 문화기관이나 문화부에 들어오는 신규직원들은 으레 이쪽으로 보내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rdquo;

문화발전연구소에서 새로 시작한 교육 가운데 &lsquo;공연예술아카데미&rsquo;가 있다. 나는 당시 연수관에서 교육프로그램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종인 소장이 부르더니 성균관대 독문과로 이상일 교수를 만나 예술인력을 육성하는 전문아카데미를 개설해 보라는 것이었다. 공연예술아카데미는 성균관대 이상일 교수(이론강의)와 문호근(연기,연출), 양혜숙(극작,평론), 신선희(무대미술) 교수를 대표강사로 1989년 제1기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개설과정에 참여했던 고 문호근씨가 &lsquo;공연예술계에 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는 느낌이다&rsquo;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ldquo;공연예술아카데미는 연출, 연기, 극작에서부터 무대, 조명, 의상, 음향에 이르기까지 공연예술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실제 현장에 투입될 신진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1년 과정이었다가 나중에 2년 과정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 설립되면서 당시 공연예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이던 김우옥 교수가 초대 연극원장을 맡는 등 연극원 설립에 모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92년에는 무대스태프를 육성하는 무대예술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연수관은 벽제에 위치한 지금의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으로 옮겨 강의동과 숙소, 실험무대와 무대미술제작소, 음향녹음실 등 실습시설을 갖춘 전문교육시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rdquo;

공연예술아카데미와 무대예술아카데미가 배출한 현장 예술인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연출의 박장렬, 조광화, 평론의 성기숙, 진옥섭, 연기의 유오성, 권해효, 오지혜, 문화기획 김의숙, 오세형 등이 초기 공연예술아카데미 출신이다. 무대예술아카데미는 민경수(무대), 하성옥(무대), 최원(의상), 권영만(무대디자인) 등 수많은 현장전문가를 배출해왔다.

&ldquo;아카데미 졸업생들을 현장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한번은 수안보온천에 세미나 차 갔는데, 어떤 사람이 쫓아와 &lsquo;교장선생님&rsquo;하고 인사를 하는 거다. 누구시냐고 했더니,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며, 올 초에 이곳에서 무대를 만들면서 스카우트 되어 내려와 있다고 하더라. 또 지역문화시설을 평가하러 돌아다닐 때였다. 창원 성산아트홀에 가서 보니까 굉장히 특이한 걸 하고 있었다. 무대장치 관련된 두꺼운 장부가 세 개인데, 매일 무대장치를 체크해서 일지를 쓰고 있었다. 조명기계, 음향기계, 무대설비부터 전구까지 매일 체크해서 검사를 해서, 장부를 기록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아서, 내가 나중에 성산아트홀을 우수상으로 뽑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저녁을 먹는데 담당했던 친구를 격려차 같이 오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내가 거기(아카데미)서 배워서 하는 거라고 하더라. 현장에 다녀보면, 교육효과가 상당히 컸다는 걸 알 수 있다.&rdquo;




문화발전10개년계획과 문화부 독립

문화발전연구소가 추진한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lsquo;문화발전10개년계획&rsquo;을 입안한 것이다. 문화발전10개년계획은 90년 1월 문화부 발족과 더불어 추진해야 할 문화정책에 대해 각계 의견을 수렴한 광범위한 문화정책서였다.

&ldquo;문화발전10개년계획(90-99년 계획. 실제로는 2001년까지 계속된다)은 내가 연구소 시절에 만든 것이다. 원래 노태우 정부 대통령 공약 중에 문화부 독립이 들어있었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문화부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계속 되어 겨우 본궤도에 올라 착수하게 되는데, 문화공보부가 자기들 손으로 하기는 거북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날보고 알아서 계획을 짜라고 하더라. 문화발전10개년계획에 문화부 독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청회까지 우리 손으로 직접 진행했다. 문공부는 아예 관여를 안 했다. 이 계획은 내가 만들었던 장기계획 중에서 제일 긴 계획이었다. 이거 만들 때 전국에서 직접 관계되어 인터뷰, 조사한 관련자가 대충 해봐도 1,500명이 넘는다. 이 10개년계획의 보고서는 <10개년 계획 개요> <전국지역문화행정요원 설문조사> <사업 해설서> <사업계획서> 등 총 4권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최병렬 씨인데, 나하고 최 장관은 점심시간만 되면 으레 언론사 문화관련 논설위원이나 문화부장들을 초청해서 함께 점심 먹으면서 문화부 독립을 포함해서 문화발전을 위한 다양한 얘기들을 나누고, 그 내용을 10개년계획에 반영하곤 했다. 여담인데, 최 장관이 나중에 문화부장관으로 오게 되면 해주겠다고 나한테 약속한 게 있었다. 남한강수련원을 연구소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런데 공보처장관으로 가면서 남한강수련원도 그쪽으로 가져갔다.&rdquo;

&ldquo;1990년 1월 3일, 문화부 독립과 함께 초대장관으로 부임한 이어령 씨가 한번은 10개년계획 만든 것 보러 덕수궁 연구소에 찾아왔다. 이 장관은 대학 다닐 때부터 문리대 학보에 함께 관여하면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내가 [사상계]에 있을 때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이장관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가 10개년 계획 마무리 작업을 할 때였다. 이건 여담인데, 마무리 단계에서, 그때는 컴퓨터 쓸 때가 아니니까 사업명칭과 내용을 전부 카드 한 장, 한 장에 다 기록했다. 이걸 이렇게 맞추고 저렇게 맞추고 블로킹하는 거다. 예를 들면, 10개년계획이 내세운 기본방향이 복지문화, 조화문화, 민족문화, 개방문화, 통일문화 등의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실제 표현은 그 양반 쓰기 좋게, &lsquo;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문화&rsquo;, 이런 식으로 말은 바꿨는데, 여하간, 계획에 나오는 각 사업들을 어느 카테고리에 집어넣어야 하느냐 하는 작업을 하는 건데, 저녁만 되면 장관실 옆방에서 문화부 문화정책국장, 이중한, 김문환, 정기영(부여전통예술학교)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서 이 카드를 매일 저녁 한 번씩 바꾸면서 며칠을 작업했다. 오늘은 이정도 하고 저녁 먹고 소주 먹자하고, 다음날 다시하고 해서 한 일주일을 블로킹 작업해서 만들어내었다.&rdquo;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은 이후 새로 발족된 문화부가 주요 사업을 추진하는 정책지침서 역할을 하게 된다.

&ldquo;문화부 독립 이후 실제 실행했던 10개년 계획과 관련된 사업은 민족문화의 정체성확립 분야에서는 문화유산 정비로 경복궁 강령전, 교태전, 창덕궁 인정전의 정비복원, 신라/백제/가야 중원문화권 정비, 내 고장 문화재 알기․찾기․가꾸기 운동 전개, 전통생활문화 확산의 일환으로 우리 색(오방색) 우리 소리 찾기, 민속공예공방 설치 등의 사업이 전개되었다. 특히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행사와 맞추어 이어령 장관이 일본에서 강연을 하고 한국의 색 자료집을 일본어로 번역해 내기도 했다.&rdquo;

&ldquo;문화예술의 창달과 사회적 기능 증대로서는 창조성 고양을 위해서 문예진흥 기금을 확충하는 것과, 예술의전당 건립,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 시작, 무대예술연수회관 건립(고양),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음악원의 설립계획안도 연구소에서 만들었다. 예술종합학교 설립에 대해서는 프랑스문화성이 콘서바토리에 투자하는 것을 참조했다. 줄리아드 수준의 예술영재를 위한 전문교육기관을 만들자는 의도로 일반 예술대학과 달리 종합학교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rdquo;




예술종합학교설립안, 예술의해, 이달의 문화인물, 문화학교

&ldquo;또 한 가지, 매년 &lsquo;예술의해&rsquo;를 지정해서 운영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1991년 &lsquo;연극영화의 해&rsquo;부터 2001년 &lsquo;지역문화의 해&rsquo;를 마지막으로 해마다 장르를 바꿔가면서 예술의 해로 지정하고 사업비로 10억 원씩을 지원했다. 2000년 &lsquo;새로운 예술의 해&rsquo;는 20억원 을 지원하기도 했다. &lsquo;예술의해&rsquo;에 대한 아이디어는 프랑스가 89년 &lsquo;무용의 해&rsquo;로 지정하며 관련 사업비를 대폭 증액한 것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다. 가급적 덜 발전된 장르를 골라 &lsquo;예술의해&rsquo;로 지정하여 해당 장르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사업이나 연구, 조사를 하도록 하는 기획이었다. 첫해는 연극영화의 해로 지정했는데, 그때 연극관객 개발을 위한 사랑티켓이 처음 시행되었다.&rdquo;

&ldquo;이달의 문화인물을 지정하여 집중 조명하는 사업도 10년간 추진했다. 우리나라 어린이나 학생들한테 존경하는 위인을 대라고 하면 이순신, 세종대왕 빼고는 에디슨 같은 외국 사람들만 댄다. 우리나라에도 문화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자 해서, 역사적으로 살펴서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선양, 현창하자는 취지였다. 처음 시작할 때 내 손으로 2년 동안의 문화인물을 다 선정해놨었다. 선정할 때에 제일 신경 쓰인 것이 친일파로 몰리는 사람이 선정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달의 문화인물 사업을 제일 환영한 사람들은 초중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이었다. 왜냐하면 전교생 한 달에 한 번씩 교장훈화를 해야 하는데, 써먹기에 유용했다고 하더라.&rdquo;

이어령 장관이 특히 애정을 갖고 추진했던 것은 작은 동아리를 지원하는 문화가족운동과 소외계층을 위한 찾아가는 문화학교 운동이었다. 현대그룹에서 기증 받은 버스를 개조해서 도서관으로 꾸며 책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lsquo;움직이는 문화학교&rsquo;도 이어령 장관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ldquo;문화부 산하의 미술관, 박물관, 극장, 국악원, 문화원 등에서 행하는 각종 문화예술강좌를 한데 모아 문화학교 운동을 시작했다. 덕수궁 문화발전연구소에 각종 문화학교를 총괄하는 한국문화학교라는 간판을 세우고 교장은 이어령 장관이, 사무총장은 내가 맡아 문화학교 운동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995년에는 문화예술진흥법 14조에 문화예술 강좌 설치근거를 마련해서 문화학교가 법적 근거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2000년 통계를 살펴보면 전국에 강좌수가 3,686개(문화학교 등록), 수료자가 252,316명이다. 2001년에는 전국에 307개 문화학교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도서관이 58개, 박물관 26개, 지방문화원 148, 기타 75)&rdquo;

&ldquo;지방 문화학교의 수료식에 참석해보면 재미있던 일이 많다. 한번은 함양문화원의 국악문화학교에서 국악을 초보부터 가르쳐서 졸업식을 하는데, 아줌마, 할머니들이 생전 처음 학사모에 학사가운을 걸치고 졸업사진을 찍으며 그렇게 좋아했다. 매년 문화학교 운영요원들을 모아 연수를 시켰는데, 이 연수교육은 별도로 기부금을 받아서 운영했다. 각계 인사 20명이 한 달에 50만원씩 기부한 것으로 문화학교 운영과 관계자 연수비용을 충당했다. 문화학교 업무는 92년 진흥원 그만두면서 함께 넘겨줬는데, 문화부에서 업무를 가져갔다가 참여정부시절에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 생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이어령 장관이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문화학교 운동이 끊어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내가 지금도 강의할 때 강조하는 것이 문화학교운동은 문화권 신장, 국민정서 함양, 문화복지 증진, 국민의 문화화 운동이라는 것이다.&rdquo;



94년 7월에 연구실장 겸 이사로 개발원에 취임하면서 개발원 업무의 기초를 다지고 96년에 퇴임을 하게 되는데, 초창기에 개발원을 만들면서 문화발전연구소 시절부터 있던 연구원 일분화 새롭게 공채로 뽑은 직원들로 연구원을 구성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예술 정책 연구의 첫 세대라 할 수 있다.

문화부 산하 독립정책연구기관의 탄생

이종인은 1994년 6월, 8년 가까이 소장으로 재직했던 &lsquo;문화발전연구소&rsquo;가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문예진흥원을 20년 근속하고 사직을 하게 된다. 문화발전연구소의 해체는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에서 언급한대로 문화부산하 독립정책연구기관인 &lsquo;한국문화정책개발원&rsquo;이 개원됨에 따른 것이다.

&ldquo;진흥원 퇴직 후 20년 동안 일한 휴식으로 보름 동안 중국을 여행하고 있는데, 호텔로 전화가 왔는데,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거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7월 중 개원식을 하려고 하는데, 새로 내정된 정책개발원장이 나 없으면 안하겠다고, 만든 장본인을 꼭 데려와야 한다고 해서 또 불려왔다. 94년 7월에 연구실장 겸 이사로 개발원에 취임하면서 개발원 업무의 기초를 다지고 96년에 퇴임을 하게 되는데, 초창기에 개발원을 만들면서 문화발전연구소 시절부터 있던 연구원 일부와 새롭게 공채로 뽑은 직원들로 연구원을 구성했다. 연구소 시절에 전문위원이었던 정갑영, 이장섭, 이춘길과 새롭게 뽑은 사람들로 이흥재, 임학순, 장미진, 양현미, 이연정, 이원태, 김세훈, 임채욱(북한관계), 정준성 등이다. 이들이 초기 멤버다. 정광렬은 개발원 발족 실무작업을 담당하다가 나중에 연구원으로 옮겨왔다.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예술 정책연구의 첫 세대라 할 수 있다.&rdquo;

&ldquo;1996년 6월, 초대 원장이 바뀌면서 나도 문화정책개발원 상임이사직을 사임하고, 개인 연구소인 &lsquo;문화행정연구소&rsquo;를 만들었다. 마침 문화부에서 연구소 주관으로 『한국의 지역축제』라는 책을 만들어달라고 하더니 공무원들이 연구소 이름에 &lsquo;한국&rsquo;을 붙이라더라. 『한국의 지역축제』를 만들면서 교육부 일도 하고, 2000년에는 문화원연합회의 『한국의 향토문화자원』 총 6권짜리 전집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200여 개 기초 지자체별로 문화자원을 정리해서 중요 문화유산, 문화인물, 문화재들을 수록했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rdquo;




지역문화의 해, 1년간 계속된 백가쟁명 토론회

2001년 &lsquo;지역문화의해&rsquo;에 그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추진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아 젊은 문화운동가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열띤 토론을 벌인다. 1년여에 걸친 백가쟁명식 토론은 문화정책에 문외한이었던 지역의 문화관계자들이 문화정책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문화네트워크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ldquo;2001년, 지역문화의해가 지정되고, 상임위원이라고 맡아달라고 해서 1년 동안 살림을 맡았다. 전국을 방문하면서 &lsquo;지역문화의 현황과 대안&rsquo;이라는 토론을 1년간 계속하고 다녔다. 한번은 전국 섬 관련 지자체 공무원들을 백령도로 불러서 배를 타고 같이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움직이는 국악학교와 미술관도 함께 갔다. 해병 여단 연병장에서 주민과 군인이 보는 데서 공연하고 전시했다. 관객들은 난생처음 보는 문화행사를 무척 좋아했다. 지역문화의해에는 특별한 이벤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출범식은 제주도부터 애월 횃불놀이 태우는 걸로 시작해서 전국을 도는 그 행사 하나 있었다. 그리고 1월 15일 경에 대전에서 &lsquo;전국 문화예술 관련자대회&rsquo;를 열어서 공무원, 예총, 민예총, 문화원, 문화연대 등 모두 가리지 않고 200명이 모였다. 분과를 7~8개로 나눠서 밤새워 토론하고 얼굴도 익히고, 다 모였다. 지역 운동권 사람들을 그때 다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다.

일 년 그렇게 하고 12월 폐회식날 다시 모아놓고 보고대회를 했는데, 웅성거리는 얘기가, 참여자들이 &lsquo;지역문화의 해를 폐회하다니 무슨 소리냐,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10년은 더 해야 하는 거 아니냐&rsquo;라고 하는 것을 다독여 폐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연판장을 돌려 만나자고 하면서, 가까운 지역끼리 모여서 지역 간 상호 교류를 하면서 몇 회 모임을 가졌다. 네 번인가 몇 번 다니고 나서 경주에서 모임이 있다고 해서 나하고 이중한 선생하고 같이 참석을 했더니, 그 멤버들이 지역문화네트워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공식 출범식을 갖고 1년에 한 번씩 대표를 바꿔가면서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고문으로 되어 있어서, 2~3번 빼고 거의 다 참여했다. 재미있는 것이 지역문화네트워크는 자기부담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면 체재비 2만원씩을 내고, 나머지는 그쪽에서 식사 대접하고 술대접하고 잠자리 제공하고, 문화자원 보고 그러는데, 전국에서 기꺼이 자기 돈 내고 자기 차 몰고 와서 밤새워 얘기꽃을 피운다. 난 가서 같이 술 마셔주고, 얘기해주고, 그러는 것이 지역문화네트워크와의 관계다.&rdquo;

&ldquo;제도가 성공해서 발전하는 것을 보면 빙긋 웃음이 난다&rdquo;

그의 나이 올해 일흔일곱.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57년. [사상계]에 들어간 60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만 50년 동안 그는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왔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ldquo;문화예술인도 아니면서 문화예술을 이해해야 했고, 관료출신도 아니면서 행정을 알아야 했으며, 경영인도 아니면서 문화예술경영을 논하기 위해 애쓰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살아온 것이 내 일생인 것 같다&rdquo;고 했다.

앞으로 예술경영이나 문화정책을 공부하는 사람은, 예술지원제도와 문화정책의 기반을 닦은 문화연구자로 그를 언급하거나, 적어도 그가 만들었던 책이나 정책보고서 서너 권쯤은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늘 문화행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문화적 유목민의 삶을 살았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ldquo;남이 뭐라 하든 말든 내가 택한 이 길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 길이 좋아서 걷고 있는 거지. 이 길을 동행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고 대할 때마다 마치 내가 문화예술의 전도사가 된 것 마냥 열심히 용기를 북돋워주고, 하는 일을 주어진 소명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내 삶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rdquo;

&ldquo;문화행정이란 뒤에서만 하는 거지, 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은 별로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아이템, 사업, 제도가 성공해서 그 분야가 발전이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 저절로 웃음이 난다.&rdquo;



양효석 필자소개
양효석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문예진흥원에 입사하여 공연예술팀장, 지원총괄팀장을 거쳤으며, 예술위원회 정책실장, 예술진흥실장, 문화협력사업본부장을 역임하였고, 지난해 7월부터는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hsyang@ark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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