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정부가 없었던 일제 식민지 시대나 재정이 빈약했던 해방 이후 70~80년대까지 신문사의 각종 문화사업은 문화예술 진흥과 국민들의 문화향유, 신진예술가의 발굴과 육성 및 대형 문화프로젝트까지를 감당하며 예술경여의 초석을 놓았다.

지금이야 정부가 문화예술의 진흥이나 국민들의 문화향유, 신진예술가의 발굴과 육성을 주도해 나가고 있지만, 정부가 없었던 일제 식민지 시대나 재정이 빈약했던 해방 이후 70~80년대까지 그런 역할을 누가 해왔을까? 현재는 비엔나 필하모닉, 볼쇼이발레, 유명 개인연주자, 블록버스터 미술전 등 많은 투자가 필요한 대형 해외 문화프로젝트 시장을 민간 기획사와 대형문화시설들이 주무르고 있지만 이 땅에 이런 시장이 형성되기 전에는 누가 그런 위험천만한 프로젝트를 과감히 할 수 있었을까?

답은 신문사다. 명분으로서의 ‘문화창달(文化暢達)’과 실리로서의 ‘사세확장(社勢擴張)’이 견인차가 되어 해방 이전부터 최근까지 우리사회 ‘예술경영’의 초석을 놓는 데에 신문사 문화사업의 역할은 적지 않다. 특히나 [동아일보](이하 동아), [조선일보](이하 조선), [중앙일보](이하 중앙)의 활동이 그렇다. 한때 장기영(張基榮) 사장 시절의 [한국일보]도 그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그의 사후 3개 신문사보다는 문화사업의 세도 약해졌다.

한국현대예술경영의흐름의 일곱 번째 순서는 개인이 아니다. 앞서 다루었던 여러 원로들의 사례는 우리 예술경영의 흐름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개인들의 기록이자 공(功)이지만 그러나 신문사의 문화사업은 기록이든 공이든 개인보다는 조직의 그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문사란 조직에 몸담고 조직에서 활동해온 주역들 세분이 한자리에 모여 각사의 문화사업 면모를 좌담 형식으로 엮게 되었다.



일시: 2011년 1월 21일 참석자 한진석_(전)[중앙일보]문화사업국장(전)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 이민희_[동아일보] 문화사업팀장(부국장) 주용태_[조선일보]문화사업단 부장

계몽과 사세확장으로 출발

이용관(이하 사회) 우선 신문사 문화사업은 어떤 동기에서 시작되었는지부터 정리해 달라.

이민희 동아일보 문화사업팀장
이민희 동아일보 문화사업팀장

이민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만 신문사에 이렇게 문화사업을 전담하는 조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에 전시를 하는 신문사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일본을 통해서 개화기 이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 시스템을 자연스레 도입하다 보니, 의도했던 안했던 그 조직을 만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신문사가 나라를 대신해서 사회를 계몽하고 문화적인 공헌을 하는 여러 활동을 한 것은 거의 ‘지사(志士)적’ 성격이 강했던 신문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1919년 3.1 운동 직후 창간된 [동아]는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다. 따라서 [동아]는 무엇보다도 사시인 문화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문화사업을 벌여왔다. 물론 70~8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문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세확장이라는 동기도 작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용태 계몽과 사세확장이 맞물려서 문화사업이 시작된 것은 [조선]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일례로 1929년에 문자보급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했다. 캐치프레이즈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였다. [조선]의 문자보급운동을 통해서 문자를 깨친 사람이 30년대에 수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신문이 국민계몽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선] 창간 당시에 지식인, 소설가 등이 모두 신문사로 몰렸다. 당시 자료를 보니 신문사가 지식인들의 ‘정신적인 정부(政府)’였다는 표현도 있더라. 뉴스뿐 아니라 국민을 깨우쳐야 한다는 소명감 같은 것이 근저에 깔려 신문사의 각종 문화사업이 태동되었다고 생각된다.

한진석 그런 점은 [중앙]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그렇지만 신문사에는 원래 홍보실이 없었다. 그래서 홍보실 기능을 대신하여 문화사업 부서에서 사세 과시, 독자 확보를 위해 문화사업을 시작했다. [동아] [조선]은 1920년대부터 했지만, 1965년에 창간한 후발주자인 [중앙]은 사세확장을 위해 대중이 많이 모이는 행사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체육행사도 많이 했고, 오케스트라나 아이스쇼 같은 대형 행사를 열었다. 당시에는 수지보다는 홍보에 중점을 뒀고 특히 동양방송(TBCKBS, MBC와 함께 3대 방송사로서 1965년에서 1980년까지 [중앙일보]에 의해 운영되다가 1980년 신군부의 강제 ‘언론통폐합’ 조치로 KBS로 흡수됨. 현재의 KBS2.)도 같이 경영을 했으므로 다른 신문사들과는 달리 방송콘텐츠의 확보라는 실리적인 측면도 있었다.

사회 신문사들은 오늘날 예술경영의 한 분야인 공연기획 사업도 많이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발레단, 연주자 등의 초청공연이었다. 그런 일을 왜 신문사가 했어야 했나?

주용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나 단체는 신문사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었다. 독자들은 그런 공연에 목말라 있었고, 그런 욕구를 채워주면서도 단체의 유명세를 업고 신문사의 이미지가 올라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이 성공하려면 알다시피 막대한 재정과 홍보력뿐만 아니라 공신력 같은 것이 필요했는데 당시 그런 능력을 가진 곳이 신문사였다. 재정에서나 운영에서나 능력을 갖춘 민간매니지먼트사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언론사에서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서 경제적 능력, 조직, 시스템이 강한 [중앙] [동아] [조선]이 경쟁적으로 해 온 것이다.

이민희 기본적으로 국민이나 독자에 대한 서비스였다. 물론 이런 공연을 통해 주최하는 신문사의 이미지가 제고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세계적인 예술가나 단체의 초청공연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동아]의 경우 1960년대에 이르러 해외 유명 연주자나 단체를 초청하게 된다. 당시는 초청공연을 할 만한 역량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해외특파원을 비롯한 조직과 홍보력, 그리고 재정적 능력을 가진 신문사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돈을 벌기 힘든 초청공연을 하게 된 데는 국민이나 독자를 위해 쉽게 접할 수 없는 세계최고의 문화예술을 국내에 소개한다는 뜻이 가장 컸다. 150명이 내한한 로열발레단공연(1975, 78, 83, 87, 95, 2005년), 320명의 로열오페라단공연(1979, 86년), 400여 명의 볼쇼이오페라공연(1989년) 등 거액이 소요되지만 수익성이 없는 공연을 사세확장이나 이미지를 높이자는 측면에서만 주최할 수는 없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이런 공연에 대하여 당시 회사내부에서는 반대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경영진은 세계최고의 공연단체를 초청해도 수지상 적자고 초청하지 않아도 국내문화예술계로는 손해인데, 그럴 바에는 초청을 하자고 결정했고 결국 적자부분은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당시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측에서는 매표실적을 알고 있으므로 적자를 보면서 공연하는 신문사들을 한편으론 의아하게 한편으론 대단하게 봤다.




신문사 문화사업의 기록들 - [동아일보]

사회 자, 그럼 이제 각사 문화사업의 역사를 특징별로 일별해 보자. 기록을 보면 [동아]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민희 1920년 4월 1일에 [동아]가 창간되었는데, 그때는 나라도 뺏기고 정부의 역할을 신문사가 해왔던 것 같다. 우리는 4월 1일에 창간하고 11일에 첫 사업으로 단군영정 공모사업을 했다. 당시 자료를 보니 민족의 조상인 단군 영정이 없어서, 그를 숭모하기 위해서 영정을 공모한다고 했다. 이 사업은 당선작을 찾지 못해 몇 차례 접수를 연기했는데 같은 해 9월 25일, 총독부의 1차 무기정간 조치로 성사되지 못했다. 두 번째 사업이 야나기 가네코라는 일본 알토 가수의 독창회였다. 그때는 회사 내에 사업조직이 없었던 것 같다. 신문사 자체가 워낙 원시적인 조직이었을 테니까. 독창회는 서울 YMCA에서 1920년 5월 4일에 열렸는데 1300여 명이 입장해 만석이 됐다. 그 입장 수입을 한국 문화재 보존을 위해 쓰겠다고 전액 기부했다. 당시 이 일을 실제 담당했던 사람이 [동아] 학예부(지금의 문화부) 기자였던 소설가 염상섭과 시인 남궁벽 같은『폐허』(廢墟) 동인들이었다. 일본에 가서 당시 친한 인사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남편)를 만난 것도 그들이었다. 만나 보니 부인이 알토 가수였고, 야나기 무네요시의 제안으로 독창회를 하게 된 거다. 수익금을 기부하는, 한마디로 자선음악회를 한 거다.

사회 남편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에서 문화재 반출 반대 운동을 했던 인사로 알려져 있다.

(야나기 가네코 독창회) 기사 출처 동아일보 자료
(야나기 가네코 독창회) 기사
출처 동아일보 자료

이민희 당시 총독부가 광화문을 헐어버리겠다고 하니까 ‘아, 광화문!’이라는 글을 [동아]에 기고해 헐지 않고 그 옆으로 옮기도록 하는 데 기여한 사람이다. 그 부인인 가네코 독창회가 [동아]의 두 번째 사업인데 그걸 시작으로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 그때만 해도 스포츠대회가 별로 없었고, 더구나 여자가 규방에서 나와 마음대로 활동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를 처음 개최했다. 이 대회는 현재 국내에서 열리는 가장 오래된 스포츠행사로 올해 89회가 된다. 당시 짧은 치마저고리에 바지를 입은 여자선수들의 경기모습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남자들은 입장할 수가 없어 경기장 밖 나무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등 장안의 화제였다. 이 대회는 한때 없어질 뻔 했었는데, 국내 최고(最古)의 상징적인 대회여서 계속하고 있다. 1925년에는 신춘문예를 국내에서 처음 공모했고, 스포츠대회인 동아수영대회(1929), 전조선빙상대회, 동아마라톤대회(1930)가 생겼다. 31년에는 이순신장군 유적 보존 운동을 였는데, 지금 아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유족들의 빚 때문에 팔리게 된 걸 알고 모금운동을 벌여서 빚을 갚고 유족들한테 돌려주기도 했다. 또 같은 해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농촌 문맹퇴치운동을 했었다.



60년대 이후 문화사업 본격화

이민희 [동아]의 문화사업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는데 1920년 창간부터 40년까지가 위의 내용으로 국가가 없었던 시절에 정부 대신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 여러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했던 제1기이다.

그 다음이 1941년부터 60년 사이의 제2기로, 1940년, 2차 대전 막바지가 되면서 우리와 [조선]이 모두 폐간됐다. 그러다가 해방 후 복간되었는데, 6.25, 4.19, 5.16 같은 사회 격변기를 거치면서 문화사업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1946년 8월,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기념 마라톤대회를 비롯하여 47년 황금사자기 쟁탈 고교야구대회 등 체육행사를 펼쳤으며 56년에는 최초 프로바둑대회인 국수전을 창설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 59년에 제1회 신인무용발표회를 개최했는데 각 대학에서 추천을 받아 심사를 한 다음 공연하게 한 것이다. 요즘의 신인음악회 식으로 3년간 했다. 그 정도가 1941~60년까지 했던 것들인데, 그때는 사회전체가 해방과 한국전쟁 후 사회재건에 집중되어 있어서 예술은 불모지 시절이었다.

동아연극상 첫 수상자 발표기사 [동아일보] 1965년 1월 1일자
동아연극상 첫 수상자 발표기사
[동아일보] 1965년 1월 1일자

그 다음, 1961년부터 90년까지 30년이 제3기로 우리들, 문화사업 담당자 입장에서는 [동아] 문화사업의 부흥기, 전성기, 황금기라고 얘기한다. 이 황금기는 김상만(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장남) 전 회장이 이끌었다. 61년에 동아음악콩쿠르를 창설했고 62년에는 명인명창대회를 국악협회하고 같이 했는데 국악 자체가 일제시대에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고 기방(妓房)을 중심으로 겨우 연명했던 시기여서 그것을 계승, 보존하는 대회로 시작했다. 63년에 동아사진콘테스트라고 사실주의 사진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을, 66년에는 국제사진살롱이라는 예술성 있는 사진전 등 두 개를 시작했다. 64년에는 동아무용콩쿠르(신인무용발표회에서 발전)와 동아연극상을 처음 개최했다. 당시 동아연극상은 소극장운동을 지원하자는 뜻으로 시작했는데, 상금이 30만원(당시 쌀 백가마니 상당)으로 파격적이었다. 이처럼 61년부터 90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새로운 문화예술사업을 창설했다. 그 후에도 68년에는 전국을 2주 동안 도는 동아사이클대회를 시작했고, 70년에는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공모전 형태로 했다. 1971년에는 판소리유파발표회를 판소리보존회와 같이 시작했고, 78년에는 동아미술제를, 85년에는 동아국악콩쿠르를 창설했다. 64년부터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초청공연을 시작으로 수많은 초청공연을 주최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개인들 즉, 공연기획사의 역량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회사 내부에서도 '개인과 경쟁하면서까지 문화사업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있어서 점차 손을 떼고, 기회가 되면 공동주최 방식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정도로 초청공연이 현저히 줄게 되었다.

전문공연기획사 역량 커지면서 초청공연 점차 접어

한진석 이 시기에 3개사가 경쟁적으로 오케스트라를 들여오는 등 좋은 사업을 많이 했다. 콩쿠르, 미술전, 고교야구대회, 바둑대회 같은 유사 사업들이 이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시작되었다. [중앙]은 후발주자였으므로 주로 따라가는 형국이었지만.

이민희 [동아]가 해외 연주단체를 초청한 것은 50년대 말에도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초청공연을 갖게 된 것은 60년대 들어와서였다. 런던심포니(64, 71, 80년), 신시내티 오케스트라(66년), 첼리스트 야노스 스타커(67, 75년), 런던필(69, 80년) 등이었다.

주용태 [조선]이 4관 편성의 외국 오케스트라 처음 부른 것이 80년이었으니까 [동아]가 16년이나 앞섰던 셈이다. 우리는 그 전에는 솔리스트나 현악 실내악단을 주로 초청했었다.

1978년 내한한 영국로열발레단원들과 인사하는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왼쪽) 출처 동아일보 자료
1978년 내한한 영국로열발레단원들과
인사하는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왼쪽)
출처 동아일보 자료

이민희 이어서 70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75년 로열발레단, 79년 로열오페라단 등을 활발하게 초청했다, 로열오페라는 국내 공연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주역가수를 비롯해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 무대스태프 등 320명 전 단원을 초청한 케이스였다. 당시 무대장치만 40피트 컨테이너로 12대였는데, 나는 담당자로서 오페라단이 국내에 체류하는 2주 동안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어 81년 BBC심포니, 84년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필과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의 파리오케스트라를 초청했고, 88년에 모스크바필과 볼쇼이발레&소비에트발레스타라는 두 공연단체가 왔었다. 서울올림픽 문화사절로 구 소련이 보낸 것이다. 이처럼 열정을 갖고 쉼 없이 황금기를 펼쳐간 것은 앞서 말했듯이 김상만이라는 오너가 문화예술의 후원자로서 많은 관심과 함께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올림픽을 계기로 개인들 즉, 공연기획사의 역량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회사 내부에서도 ‘개인과 경쟁하면서까지 문화사업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있어서 점차 손을 떼고, 기회가 되면 공동주최 방식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정도로 초청공연이 현저히 줄게 되었다.

한진석 그 이전부터 개인매니지먼트사들이 언론사의 솔리스트 초청은 손을 떼 달라고 당부를 해왔다. 자기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해서 신문사 측에서는 솔리스트는 가능한 한 안 하는 것으로 방침을 굳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오면서는 신문사는 해외 예술단체 초청까지 거의 손을 놓게 되었다. 하더라도 돈 들여서 불러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사들과 공동주최하는 방식이 드물게 있는 정도다.

이민희 공연시장에 공급이 워낙 많아지니까, 적자를 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리스크도 나누고 공연제작비도 분담하면서 적자를 안보기 위해 협찬을 붙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도쿄 출장 때마다 [아사히신문]에 들러 의견을 나누는데, 아사히도 전시 이외에는 단독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것이 추세인 것 같다.

주용태 [동아]에 김상만 회장이 있었다면 [중앙]엔 홍진기 회장이 있었다. 두 오너가 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았다.

사회 [조선]의 방우영 회장은 어땠나?

한진석 다른 두 분 보다는 관심이 좀 덜했던 것 같다.

이민희 김상만 회장의 대표적 일화가 있다. 김혜식 전 한예종 무용원장이 64년에 동아무용콩쿠르 발레에서 1등을 한 뒤, [동아]에서 영국 로열발레스쿨로 유학 가는 비용을 대줬다. 그건 공식적인 부상(副賞)도 아니었고 소질이 있으니까 공부해 보라고 한 것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계몽사업을 주로 했는데, 문명퇴치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은 초기에 스포츠사업도 많이 했다는 점이다. 37년에는 최승희가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고별무용회를 [조선]에서 개최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신인음악회가 3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음악 전공자들을 위한 무대가 없으니까 데뷔무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신인 음악도들에게는 꿈의 무대였고 이 대학생들이 전국을 돌면서 공연했다.

신문사 문화사업의 기록들 - [조선일보]

사회 이번엔 [조선일보] 차례다.

주용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 부장
주용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 부장

주용태 이번에 나도 좌담회 준비를 하면서 [조선일보] 사사(社史)를 보고 많이 알게 되었고 또 놀라기도 했다. 1926년에 소련 피아니스트 파울 코발로프를 초청해 서울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공연한 기록이 나를 놀라게 한 케이스 중의 하나다. 그 전 1923년에는 한 달 동안 도쿄유학생 단체인 형설회(螢雪會) 학생들의 전국순회 연극을 주최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문화사업의 시대구분도 [동아]와 유사하다. [동아]보다 [조선]이 20일 먼저, 1920년 3월 5일에 창간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계몽사업을 주로 했는데, 앞에서 말한 문맹퇴치운동이 대표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에 [조선]은 스포츠도 많이 했다는 것이다. 22년에 한미야구대회를 열어 미국 양키스 프로야구단이 한국을 방문해서 전조선청년단과 야구를 했는데 우리가 3대23으로 졌다. 당시에 [조선]이 야구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23년에 전조선소년야구대회도 있었고. 이어 역기대회, 여자배구, 농구, 씨름, 축구 이런 것이 굉장히 활발했다. 29년 경평축구대회도 [조선]에서 주최했다. 35년엔 전조선남녀음악현상경연대회를 했는데,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 36년에는 독자를 위한 영화순례가 있다. 독자개발을 위해 영화상영회를 이른바 마케팅 수단으로 썼던 것 같다. 37년에는 최승희가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고별무용회를 [조선]에서 개최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신인음악회가 3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음악 전공자들을 위한 무대가 없으니까 데뷔무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신인음악도들에게는 꿈의 무대였고 이 대학생들이 전국을 돌면서 공연했다. 또 30년대 중반 300km에 달하는 백두산 종주행사를 가진 것도 매우 특이하다. 이 또한 민족의 정기를 세우자는 뜻에서 개최한 행사였다

[조선일보] 사시(社是)에는 아직도 35년에 만들어진 ‘문화건설’을 쓰고 있다. 그 사시가 만들어지면서 35년에 음악콩쿠르를 만들었다(지금은 없어졌다). 36년에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 38년에 향토문화조사, 특산품전람회 등 민족을 위해서 여러 사업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 40년도에 폐간되고 46년에 복간되면서 사업을 처음 벌인 것이 ‘조선민족의 진로’라는 논문 현상공모였는데, 당시 상금이 1만원이었다. 민족의 진로를 잡아야한다는 명분을 복간하면서 거창하게 내건 것 같다. [동아]가 음악을 했다면 [조선]은 스포츠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청룡기가 45년 창설되었다. 해방되면서 마라톤, 역전경기(춘천마라톤의 효시)를 시작했다. 서울과 수원을 왕복하는 역전경기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오락거리가 없었으니 경수가도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고 한다.

그 이후 60년도까지는 역시 특별한 게 없다. 63년도에 청룡영화상을 만들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 미술전람회는 [조선]이 앞섰던 것 같다. 70년도에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프랑스현대명화전》《로댕전》등을 개최했다. 당시 [조선]의 파리특파원이었던 신용석 씨가 현지에서 적극적인 유치활동을 편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재정상태 좋아지면서 문화사업 활발

주용태 우리는 [동아]처럼 어느 사주가 뚜렷하게 문화에 역점을 두고 한 것이 아니어서 역사적 변혁기(해방, 전쟁 등)별로 피동적인 시대구분을 할 수밖에 없다. 60년대에 [동아]가 런던심포니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아]가 발행부수 1등으로 재정 상태가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회장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방우영 사장이 돈을 차용하여 월급을 줄 정도였으니까 큰돈을 쓰면서 문화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80년대에 들어 1등으로 올라서서야 비로소 문화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내가 판단컨대, 80년대 들어오면서 [동아] 등에서 외국 오케스트라를 적극적으로 초청하고 하니까 [조선]은 스트링 쿼텟, 8중주단과 같은 실내악과 합창단 규모로 초청을 했고, 그러다가 유일하게 4관 편성 오케스트라가 온 게 80년이었다. 워싱턴내셔널심포니로 물꼬를 튼 이후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86년)를 초청했다. 80년대 후반 소련과 문화교류 물고가 트이기 전까지 오케스트라 초청은 고작 다섯 손가락 이내였다. 이 점이 [동아]와 상당히 비교되는 점이다. 그러다가 [동아]와 필적할 정도로 활발해진 시점이 88년으로, 이때가 문화사업의 전환점이 된 해이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경제가 좋아지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차에 소련문화의 유입이 도화선 역할을 한 것 같다.

조선일보 주최의 전시회(1995)
조선일보 주최의 전시회(1995)

올림픽 때 《마르크 샤갈 판화 포스터전》(메조 소프라노 루드밀라 남, 넬리리 초청 독창회_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모스크바 방송 볼쇼이 합창단, 로저 와그너 합창단 초청을 했고, 89년에는 레닌그라드 심포니오케스트라를 데려왔었다. 한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미자, 조용필 등의 공연을 함으로써 클래식한 공연장과 대중가수의 만남이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90년에는 러시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91년에는 키로프발레단을 초청하여 이 시기 러시아 프로젝트 붐의 정점이자 [조선] 문화사업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당시 오케스트라를 초청하기 위해 전세기를 보낼 정도였으니까 그 의지가 어땠는가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95년에는《칸딘스키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으로 러시아 프로젝트의 결말을 지었다고나 할까. 그해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후 [조선] 문화사업은 다른 신문사보다 더 일찍 직접 초청하는 해외공연 등을 접고 환경캠페인, 자전거타기 등 공익적 이벤트와 《‘엄마 어렸을 적엔’ 인형전》《고대 이집트 문명전》《아 고구려전》 같은 대형 전시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공연사업도 단독으로 초청하는 방식을 하지 않고 공동주최로 전환한 것은 다른 신문사들과 마찬가지다.




신문사 문화사업의 기록들 - [중앙일보]

사회 올림픽 전후 경쟁이 치열했던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한 번 더 해야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중앙일보] 문화사업의 역사도 정리해 달라.

한진석 (전) 중앙일보 문화사업부장
한진석 (전) 중앙일보 문화사업부장

한진석 [중앙]이 다른 신문사들과 다른 것은 텔레비전 방송이 있어서 그와 연관된 컨텐츠가 필요했고, 85년부터는 호암아트홀과 호암 갤러리라는 시설을 갖게 되어서 문화공간 운영을 같이 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가 65년 창간되어 80년까지는 문화사업도 성장기였다. 이 시기에 유명 오케스트라만 해도 비엔나필(73), 런던심포니(75),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77), 뉴욕필(78),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78) 등 쟁쟁한 라인업이 계속되었다(이런 패턴은 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다). 폴모리아악단, 아다모, 실비 바르탕, 레이프 가렛, 줄리엣 그레코 등 당대의 유명 대중음악인들도 차례로 한국무대에 세웠다. 공연장은 이대강당, 세종문화회관 등이었다. 물론 이시기에 중앙음악콩쿠르, 중앙미술대전 같은 신진발굴을 위한 예술사업, 대통령배 야구, 경호역전마라톤 같은 스포츠 꿈나무 발굴을 위한 스포츠 등 공익사업도 다른 신문사들처럼 끌고 나갔다.

특히 연극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78년과 80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당시 생각하기도 어려운 규모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3,895석)에서 유지인을 주인공으로 출연시켜서 공연했다. [중앙일보]에서 모든 지원-배우 섭외, 제작비 투자, 매표 등-을 다 해주고 제작과 연출은 현대극장 김의경씨가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순이익만 2,900만원으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중 2500만원을 현대극장에 주고 400만원을 적립해놨었는데, 김의경 씨가 나머지 400만원 왜 안주냐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전에 (하멸태자_태)라는 연극을 오태석 연출로 동랑레퍼토리(서울예전 극단)가 만들어서, 서울시의회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일주일간 공연했다. 당시 이익금으로 동랑레퍼토리 단원 등 18명이 20일간 미국, 유럽 쪽 순회공연을 했다.



뉴욕필,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 로랑쁘띠발레 등을 했다. 97년 IMF외환위기를 맞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동양방송, 호암아트홀, 호암갤러리 등 방송 극장 운영과 연계

호암아트홀 개막공연 [매일경제] 1985년 5월 2일자
호암아트홀 개막공연
[매일경제] 1985년 5월 2일자

한진석 그러다가 80년 신군부에 의한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을 빼앗기면서 그런 분위기에서 문화사업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80년도에 1천석짜리 호암아트홀과 호암갤러리가 오픈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호암아트홀에서는 연극, 영화, 솔리스트 연주회, 국악 등 다양한 중규모의 프로그램 기획을 할 수 있었고, 호암갤러리에서는 국내외 최고 수준의 미술전시를 활발하게 열게 되어 그때까지의 대형 프로젝트 위주의 문화사업을 양적이나 질적으로 보완하면서도 비영리적 문화공간 운영의 전문성을 축적해 가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내에 1천석 이상의 공연장은 공공, 민간극장을 통틀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밖에 없었다. [조선] [동아]와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다. 물론 호암아트홀/갤러리뿐 아니라 세종문화회관 같은 다른 극장에서도 대형 사업은 계속되었다. 대형공연물은 외부에서 하고 중소형은 호암아트홀과 갤러리에서 소화했으니 행사의 수가 다른 신문사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호암아트홀에서는 일 년에 많게는 다섯 편까지 명작 또는 대중극 중심의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했는데, (햄릿_임영웅, 이해랑), (수전노_이해랑), (오셀로_박용기), (화니_김동훈), (서푼짜리 오페라_정진수), (도적들의 무도회_김정옥) 등 40편에 가까운 명작들을 한번에 1개월 정도까지 공연을 했다. 89년 10월에 이해랑 선생이 (햄릿_주연 유인촌)을 개막해 놓고 운명을 달리한 기억도 생생하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서푼짜리 오페라), 러시아 말리극단의 (벚꽃동산), 마르셀 마르소, (스텀프) 등 해외 공연도 주선하여 우리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난타_뮤지컬 42번가) 등을 공동제작하여 초연한 곳도 호암아트홀이다.

특이한 것으로 호암아트홀 영화상영이 있다. 당시 여름, 겨울방학 기간은 공연으로서는 비수기였는데, 이때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명화나 예술영화를 하기로 했다. 물론 개봉영화를. (미션), (시네마천국_모던타임스), (지젤), (굿바이 마이프렌드), (쇼생크탈출), (그 섬에 가고 싶다), (하얀 전쟁) 등이 호암에서 개봉되어 흥행성적도 좋았다. 당시 영화계에서 ‘호암영화’라고 하면 호암아트홀 성격에 맞는 명작 또는 예술영화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였다.

중앙일보 문화사업의 대표작 볼쇼이 발레  사진은 2005년 공연 포스터
중앙일보 문화사업의 대표작 볼쇼이 발레
사진은 2005년 공연 포스터

[중앙] 문화사업의 정점이라면 아마도 90년도 볼쇼이발레 공연을 들 수 있다. 전막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6회 했는데 거의 매진이 되어 열흘 사이에 2만 4천명 가까운 관객이 발레를 보는 기록을 세웠다.

90년대만 해도 다른 곳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호암아트홀과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을 오가면서 볼쇼이발레 세 차례,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전》, 뉴욕필,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 로랑쁘띠발레 등을 했다. 97년 IMF 외환위기를 맞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그러다 IMF가 터지는 바람에 [중앙] 자체가 빨리 변신을 했다. 회사 조직 거의가 자회사로 변신하면서 문화사업 조직도 자회사가 되었고(지금의 중앙문화사업단), 거기서는 중앙미술대전, 중앙음악콩쿠르, 마라톤 등 몇 개를 제외하곤 문화사업보다는 다른 전시사업 등을 더 많이 했다. 이렇게 [중앙]의 문화사업도 쇠퇴기를 맞는다.




“문화사업은 공익활동” “90년대 이후 많이 달라져”

사회 신문사 문화사업이 쇠퇴한 이유로, 외환위기 이후 비수익 사업에 힘을 쏟을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문화사업이 사세확장에 크게 도움이 될 만큼의 매력도가 이전보다는 떨어졌고, 또 공공공연장들, 특히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등이 대형 초청공연사업을 하게 되고 개인기획사들도 그만큼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 신문사의 오너들이 2세대, 3세대로 바뀐 이후의 변화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그들이 선대 오너들보다 사회문화적 공헌에 대한 관심이 좀 덜한 것 아니냐 하는 것도 있겠고, 그 이후의 신문시장의 변화와 인터넷 등 다른 매체의 등장으로 신문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사회가 그만큼 다양해졌고 많은 주체들 즉, 정부나 대학들이 자기 몫을 하게 되면서 신문사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자, 이제까지 각사 문화사업의 역사를 개괄해 봤는데 그러면 3개 신문사의 성격은 어떻게 구별하여 말할 수 있을까?

이민희 [동아]는 앞서 언급했듯이 문화사업의 취지가 사세확장의 수단보다는 공익적 성격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들어와서 오케스트라, 오페라, 발레 등 대규모 공연이 활발해지면서 큰 비용이 소요되는 공연의 손익에 신경을 쓰게 됐지만 우리가 하는 사업은 주로 돈을 쓰는 사업이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연례사업이 30여 개인데, 대부분 경연대회, 공모전 등이다. 실무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다행일 수도 있었는데, 행사의 완성도를 높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수익을 올리라는 얘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익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 90년대 이후이다. 95년 이후에는 그 전까지 100% 회사 돈을 썼던 동아콩쿠르도 협찬을 얻어서 적자를 메운다.

한진석 초창기에는 기업협찬도 미미했다. 프로젝트 예산이 몇 억이면 협찬은 몇 백 정도 있었지, 요즘처럼 반을 대라, 입장권을 얼마 주겠다, 그런 건 없었다.

조선일보 주최 《세기를 넘어서》展(2000)
조선일보 주최 《세기를 넘어서》展(2000)

주용태 [조선]도 공익적인 부분을 더 중시했다. 문화예술 자체가 그렇지만, 특히 해방 이전 신간회, 문자보급, 90년대 들어오면서는 환경 쪽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자전거를 탑시다 등의 캠페인, 조선 환경대상, 국제환경상 등. 우리 사장이 “[조선] 이데올로기를 한쪽에서는 보수에 치우쳤다고 하지만, 환경문제는 상당히 진보적인 테마 아닌가?”라고 일방적으로 우파로 모는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바도 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이 앞서갔다.《아 고구려전》도 우리 역사를 다시 보는 전시였는데, 관람자가 5백만을 넘고, 중국과 외교문제까지 일으킬 정도로 전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2000년에《세기를 넘어서》라는 근대사를 돌아보는 전시를 했는데, 2~30년대 문자보급운동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졌었다.

한진석 문화사업으로 돈 버는 일은 불가능했고, 모두 그것을 인정했다. 크게 보면 모두가 공익사업이었다. [중앙]도 다른 신문사와 사업패턴이 거의 비슷했지만, 다른 것은 60년대부터 80년까지, 텔레비전 방송이 있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위해 방송에도 써먹고 신문 인지도도 높이기 위해 대형 팝 행사 등 대중성이 높은 사업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후발언론이기 때문에 냉정히 얘기하면 선발업체의 문화사업을 빨리 따라잡거나 그보다 앞서야 한다는 심정이 있었다. [조선] [동아]와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송통폐합 전에는 우리가 큰소리 쳤다. MBC, [경향신문] 그런데서 연말이 되면 전화가 왔었다. “내년에 [중앙]에 뭐 큰 거 있어?” 하고. 그 정도로 80년까지는 영향력이 컸었다. 문화공간 경영을 직접 했다는 점도 타사와 다른 점이다.

주용태 삼성의 호암 이병철 회장이나 [중앙] 홍진기 회장이 예술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사회 나도 [중앙일보] 문화사업본부에서 10여 년을 같이 했지만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호암아트홀이 명동시대의 국립극장, 현재의 명동예술극장과 유사한 제작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그 두 개 극장의 중간에 있었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햄릿)을 이해랑 연출에 유인촌 주연으로 마지막으로 한 것이 호암아트홀이었다. (도적들의 무도회) 같은 대중극도 많이 제작했다. 1천석 극장을 30일 동안 90% 이상 유료관객으로 채운 적이 한두 편이 아니었다. 스타시스템으로 운영을 했는데, 당시 최진실, 채시라, 이미연 같은 스타들이 주역으로 출연하여 연기술을 닦고 다시 TV로 돌아가고 그랬다.

유지인 주연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연진, 스태프 단체사진(1978)
유지인 주연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연진, 스태프 단체사진(1978)

한진석 스타시스템 때문에 연극계에서 욕도 먹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말이 “왜 스타가 되느냐, 연기를 잘하니까. 우린 공공기관이 아니고, 민간 극장이다. 관객이 많이 와야 하는데, 1천석에서 연극을 한다면 그렇게 안 하곤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대학로의 ‘연극열전’이나 ‘무대가 좋다’ 같은 기획은 중소규모의 극장에서 하지만, 당시 85년 호암아트홀 연극관객이 서울시내 연극관객의 세배가 왔다.

사회 그랬던 호암아트홀이 [중앙일보]가 종합편성채널을 운영하게 되면서 올해 방송스튜디오로 바뀌어 25년의 역사를 접게 되었다고 들었다. 참으로 아쉽다. 서울시내에 흔치 않은 중극장 역할을 그동안 해왔는데. 홍진기 회장이 생존해 있었다면 그런 비문화적인 선택을 했을까 싶다.

자, 각사가 이처럼 문화사업을 해오면서 불가피하게 경쟁도 많았을 텐데, 그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던 시기가 88올림픽 전후의 러시아 예술단 초청이었던 것 같다.

한진석 3개 신문사 문화사업 책임자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신문기사 쪽에서는 경쟁이 심했겠지만, 문화사업 쪽에서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선의의 경쟁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내년엔 큰 걸 한다고 하면 다른 신문사는 피해 가고 하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하긴 했지만, 매우 우호적이었다고나 할까. 알다시피 88올림픽은 언론사뿐 아니라 문화 전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경쟁도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각사가 이처럼 문화사업을 해오면서 불가피하게 경쟁도 많았을 텐데, 그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던 시기가 88올림픽 전후의 러시아 예술단 초청이었던 것 같다.

올림픽과 ‘러시아 문화전쟁’

사회 올림픽 당시 [동아]와 [조선]이 러시아 프로젝트를 몇 개씩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볼쇼이발레단의 첫 내한공연 출처 동아일보 1988년 9월 5일자
볼쇼이발레단의 첫 내한공연
출처 동아일보 1988년 9월 5일자

이민희 88년에 라고 50명 정도가 왔고, 40명 정도가 무용수였다. 또 키타옌코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하여 본고장의 슬라브음악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문예진흥원도 라 스칼라를 불렀고, 우리가 특별후원으로 참여했었다. 라 스칼라 공연비용은 올림픽조직위원회 지원과 삼성의 협찬으로 충당된 걸로 기억한다.

주용태 우리 쪽으로는 볼쇼이합창단이 69명 정도가 들어왔다. 고려인일제 강점기 때 소련으로 강제 이주된 한국인 성악가 넬리 리와 루드밀라 남도 왔었고.

이민희 당시 구소련에서 파견한 문화사절 중 (볼쇼이발레 & 소비에트발레스타) (모스크바필)이 대표적인 단체였는데, [동아]가 이 두 단체공연을 주최했던 배경은 이러했다. 1974년에 김상만 당시 사장이 일본에 출장 갔을 때, 일본 무용계의 영향력 있는 지인을 만나서 당시에 볼쇼이발레가 워낙 유명했었으니까, “볼쇼이발레를 부르고 싶다”고 했더니, 그 지인이 소련대사를 만났을 때 이 뜻을 전달했고, 그 후 일본에 갈 때마다 그 지인이 소련 대사나 문화참사관 같은 사람들하고 만나는 자리를 주선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처음 고스콘서트구 소련의 국립공연기획사 간부하고 소련문화성 부국장이 왔을 때 [동아]에서 계속 초청의사를 표명했었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때는 뭘 주겠다고 약속은 안하고 갔는데, 공연 2~3주 전에 와서 [동아]가 과거 의사표시를 한 것을 고려하여 이건 [동아], 저건 [조선] 하는 식으로 배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주용태 내가 들은 얘기는 좀 다르다. 4월에 문화성과 고스콘서트가 서울에 왔는데, [조선]과 [동아]가 소련 공연단의 유치를 위해 과도하게 경쟁을 하여 당시 올림픽조직위원회 박세직 위원장이 양사 관계자를 불러 조정했다고 들었다.

마침 88년에 내가 입사했다. 러시아 문화성 아시아국장과 고스콘서트 측에서 들어와서 [조선]과 [동아]를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인 내가 통역을 맡아 따라다닌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가 예전부터 공을 들여 온 볼쇼이 발레와 소비에트 발레스타, 모스크바필, [조선]은 볼쇼이 합창단과 메조소프라노 넬리 리 소프라노 루드밀라 남이라는 성악가를 초청하게 되었다. 특히 두 한국계 가수가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걸 계기로 회사 경영진도 공연에 대한 마인드가 바뀐 것 같았다. 그 후 일본으로 공연기획 연수를 갈 기회도 있었고 이후로 상당한 오케스트라를 초청했다. 당시 소련 정부에서 올림픽 문화축전으로 러시아 문화를 소개해준 감사의 표시로 [조선] 관계자를 초청했는데 그때 나도 동행했다. 바로 뒤에 [동아]도 간 것으로 안다. 거기서 레닌그라드 필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키로프 발레현 마린스키 발레를 초청하고, 에르미타주 박물관 유물의 한국 전시를 개최키로 프로토콜(의정서)을 맺었다.

한진석 내가 직접 다녀와서 기억하는데, 에르미타쥬 박물관 건은 호암갤러리에서 91년 1월에 최초로 미술 소장품 전시회를 했다. 그 전에도 선의의 경쟁을 했지만, 서방의 웬만한 것은 각 사가 경쟁적으로 다 들여왔는데,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중국하고 소련 것만 손을 못 댔었다. [동아]가 모스크바필을 하고, 러시아 발레리나들을 모아왔는데, 거기다 볼쇼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거지. 공연도 갈라 중심으로 하고. 정식 볼쇼이는 90년에 [중앙]이 처음으로 전막 공연을 한 것이다.

이민희 볼쇼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정한 게 아니라 당시 소련이 보낸 계약서에 단체명을 ‘Bolshoi Ballet and Soviet Ballet Stars’라고 해서 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연방 내 발레단의 스타들만 골라 임시발레단을 급조했다는데 실제로 40여 명의 무용수 중 볼쇼이발레단 소속은 15명이었고 나머지는 소련연방 각지에 있는 발레단의 스타들을 모은 것이었다.

주용태 볼쇼이는 영어로 great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그래서 볼쇼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한진석 냉정하게 말하면 볼쇼이가 아니라 러시아 각 지방 발레리나 모아온 것이었다. [조선] [동아]가 경쟁하는 동안 [중앙]은 다른 노선을 탔다. [동아]랑 볼쇼이가 프로토콜을 맺었는데, 그 과정 중 소련 사회에 변화가 왔다. 과거에는 고스콘서트만 해외공연을 팔 수 있었는데, 이제는 볼쇼이발레단 자체도 해외랑 공연계약 할 권한을 준 거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미국 에이전트를 통해 직접 볼쇼이발레단이랑 계약을 했다. 그것이 90년 3~4월인데, 그 때 [동아]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한테 내용증명 보내고 그랬다. 마치 우리가 인터셉트한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자기들은 과거에 프로토콜 맺은 걸로 안심하고 있는데 우리는 미국 에이전트 하고 가서 볼쇼이하고 바로 사인해 버렸던 거다. 삼성이 이럴 수 있냐고. 그래서 [동아]한테 내가 답신 써서 보내고 그랬다. 90년 첫 공연 이후 우리가 볼쇼이를 두 번 더 했다. 두 번째인 92년에는 볼쇼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는데 금방 매진이 될 정도였다. 90년 첫 공연에는 모스크바 직항편이 없어서 대한항공 전세기 내서, 빈 비행기로 갔다가 올 때는 발레단, 오케스트라, 기술진 등 250명을 태우고 왔다.

주용태 [조선]은 볼쇼이발레 초청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우린 레닌그란드 쪽 예술단체와 이미 협의가 있었기 때문에 레닌그란드 필, 키로프발레, 스키타이 황금전 등 ‘알짜배기’를 했다.

이민희 볼쇼이발레단 공연과 관련해서 [동아]의 입장은 이렇다. 당시 [동아] 사장이 소련에 초청받아 가서 볼쇼이발레단을 91년에 초청하기로 프로토콜을 맺었고, 귀국한 뒤 이를 신문에 발표했다. 그런데 그 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혼란에 빠졌고 컨트롤 타워가 갑자기 없어진 상태에서 발레단이 독자적으로 해외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따라 [중앙]이 초청할 수 있게 된 거다. 당시 [동아]의 입장은 우리가 91년에 볼쇼이발레단을 초청하는 걸 [중앙]이 아는데 소련의 상황이 바뀌었다고 다른 채널로 볼쇼이발레를 인터셉트해 1년 앞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상황변화에 재빨리 대처하지 못한 데 대해 자책했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신문사 문화사업의 성과와 한계

사회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예술경영사적으로 언론사 문화사업이 기여한 것이라면 아마도 척박했던 시절에 예술의 대중화를 통해 그만큼 관객을 크게 확대한 것을 먼저 꼽을 수 있겠다.

이민희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9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그런 일을 신문사, 언론사가 안했으면 거의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아무도 안하던 시절에 문화예술을 통해 대중을 위무하고, 문화소비자를 늘렸던 것은 자화자찬이지만 대단한 일이었다.

한진석 특히 해외의 우수한 예술단체를 소개하면서 우리 대중들의 안목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주용태 넓은 의미로 ‘민도의 제고’라고나 할까? 이런 측면에서 신문사의 기여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신문사의 문화사업이 없었다면 고급문화를 접할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뉴미디어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신문이나 방송이 유일한 홍보창구였다. 공연이나 미술 등 해외 유명작품을 먼저 도입하고 각사가 매체파워를 활용함으로써 국민의 심미안을 높였다고 생각한다.

이민희 유럽은 공연기획자, 매니저 등이 자생적으로 생겼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동아]가 가네코 독창회 했을 때도『폐허』동인인 시인 남궁벽이 공연 홍보 및 진행 등을 맡았는데, 일본 기획자에게 배웠다고 한다. 정확한 팩트인지는 확인 못했지만, 사실이라면 그 사람이 근대적 의미의 첫 한국 공연기획자가 아닌가 싶다. 옛날에 창, 판소리할 때도 꾸미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공연기획자는 아니다. 남궁벽이 독창회를 위해서 프로그램 만들고 연주자 케어(care)하는 법 같은 것을 일본인에게 배워서 했다고 한다. 그때는 [동아]에 한번 나면 홍보는 끝나는 거니까 홍보 쪽 일은 별로 없었겠고, 연주자가 오면 마중 나가고 숙소에 가서 식사하게 하고 하는 등의 매니지먼트의 첫 시작이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당시에 우리 신문을 보면 염상섭이 연주회 사회를 봤다고 나온다. 남궁벽이 무대 뒤에서 연주자들을 케어하고.

필자 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한진석(전) 중앙일보 문화사업국장, (전)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 이민희 동아일보 문화사업팀장(부국장), 주용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 부장

사회 언론사 문화사업에 대한 반성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예를 들어 각사가 경쟁해 국제 시장가격을 높여놓은 것이나 해외 유명단체 위주로 사업을 하다 보니 티켓가격의 거품을 형성해 놓은 것, ‘사세확장에 도움이 안 되는’ 국내 예술 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 등의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진석 냉정하게 보면 경쟁을 해서 조금 높여 놓은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터무니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보다 요즘 시장의 경쟁이 더 심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편 아직도 웃지못할 일들이 있다. 지방을 가보니, 문예회관 개관기념공연을 크게 해야 하는데, 기획자들이 중심이 아니라 시장이 지시를 한다. 가령 국제적인 스타 성악가의 국제가격이 공연당 5만 달러이고 이미 스케줄이 잡혀있는데, 시장이 데려오라니까 이미 부킹된 스케줄을 빼내기 위해 그 두 배라도 주고 데려오는 거다. 그러면 그 예술가는 다른 스케줄 펑크 내고 또 온다. 그리고는 다른 데 가서 다시 5만 달러 받겠는가. 그래서 아티스트 가격이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거다. 클래식도 마찬가지지만 팝아티스트도 마찬가지다. 지자체장의 취향에 따라 기획이 진행된다.

사회 어느 지방의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다. 어느 시, 군 단위 문예회관 유료객석 점유율이 80~90%다(전국 평균 40% 정도). 어째서 그런 높은 통계가 나오는가 물어봤더니 극단적인 예를 들면, 3억이라는 공연예산이 있으면 쪼개고 쪼개서 연극, 무용, 음악 골고루 해야 정상인데, 그러면 시장, 군수가 볼 때 관객이 적어 제대로 일했다고 생각지 않을 뿐더러 그분들이 관객 앞에서 마이크 잡고 생색낼 수도 없으니까, 같은 예산으로 이미자, 조용필 같은 공연 한번씩 하고 마는 거다. 표는 모든 공무원 동원하여 파는 거고. 지금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주용태 해외 우수단체를 초청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성할 것은 없다. [조선]의 입장에서 외국단체를 초청하기 위해 과당경쟁에 뛰어든 경우는 별로 없다. 이는 한국 측의 과오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일본 측의 농간이 더 컸던 것 같다. 요즘은 대부분 직접 초청하니까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단지 외국의 단체를 초청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국내의 우수 단체나 예술인을 외국에 소개하는 데 소홀이 한 면은 있다.

사회 마지막으로 앞으로 신문사 문화사업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이민희 2000년대 들어와서 블록버스터형 전시사업에 신문사나 방송사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 80년대 일본출장 가보면 전시사업이 많더라. 해외 유명 미술작품을 갖고 오거나 유물을 갖고 오기에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알려지지 않아 신뢰관계가 없어서 불가능했는데, 일본은 예전부터 그런 전시 많이 해왔다. 우에노에 있는 주요 미술관, 박물관에서 그런 것들을 많이 했었다. 2000년도에 들어오면서 우리도 그쪽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런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게 된다. 국민이나 독자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명화나 유물을 실물로 직접 보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고 수익모델도 되므로 전시에 중점을 두고 하게 되었다. 당분간은 전시가 활성화, 확대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동아] [조선] [중앙] 3사가 종합편성방송도 하게 되었는데, 앞으로는 통합미디어시대를 맞아 원소스멀티유즈랄까 좀 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나 문화나눔이라는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수익성 있는 전시 등은 지속적으로 하고, 또 콩쿠르나 공모전 같은 인재 뽑는 사업, 청소년대상이나 문화나눔 등 사회공헌사업은 그것대로 해나갈 계획이다.

주용태 [조선]도 요즘 사회공헌프로그램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또 우리도 공연보다는 대형 전시에 치중하는 편이다. 공연은 공동주최나 투자를 통해서만 관여하는 편이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 추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홍보나 마케팅은 뉴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기존과 같이 지면에만 의존하지 않고 SNS서비스 등 다양한 홍보채널이 가동되는 만큼 옛날과 같이 신문사만의 프리미엄은 덜해질 것 같다. 단지 올해 하반기부터는 방송을 시작하는 만큼 신문과 방송의 시너지가 생가면 사업의 형태도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신문사 문화사업에서 ‘공익과 명분’이라는 명제도 중요하지만 수익창출도 중요해 것이다. 사업의 공익적 가치와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하는 것이다.



이용관 필자소개
이용관은 중앙일보/호암아트홀 문화사업부장, 부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안양문화예술회관 관장을 역임했다. 부천과 안양에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시즌제를 도입하여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사)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speed2653@naver.com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