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지난 10월 28일 창간2주년 기념호 ‘음악공연 기획의 터를 닦다’(이상만)를 발행하면서 시작한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이, 일단 한 획을 마무리한다. ‘일단’이라는 한정을 붙여놓는 것은 이번 마무리가 ‘끝’이라기보다는 중간 쉼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연, 시각 분야 원로 예술경영인들과의 인터뷰로 진행된 이번 기획은 한편으로는 개인사적 서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예술경영사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기도 했다. ‘예술경영’이라는 말조차도 없었던 시절, 창작에서 유통 그리고 기록까지 만능인처럼 전 분야를 누비며 예술현장을 가꾸어왔던 시절의 이야기들은 ‘예술경영’이라는 분야가 어느 한때 ‘급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실감한다. 한편 당대의 예술현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동안 작가 중심, 작품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현대예술사의 빈 그림들이 채워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미처 뵙지 못한,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홀함이 없지 않은 이 기획을 용감하게(?) 진행했던 점도 있다.

이상만, 오광수, 김의경, 박래경, 강준혁, 이종인 그리고 신문사 문화사업을 되짚어 주신 한진석, 이민희, 주용태 등 이번 기획에 참여해주신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각 글의 필자들은 장시간의 인터뷰와 긴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까지 적지 않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 예술경영에 대한 열정과 후학들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한다. 지면을 빌어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마침표가 아닌 중간 쉼표를 찍으면서, 이용관, 양현미 편집위원과 함께 이번 기획을 되돌아 보았다.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기 바란다.



일시 : 2011년 2월 21일 장소: 대학로 카페 張 참석자: 이용관_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양현미_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사회: 김소연 편집장

“기록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7회에 걸친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 연재 인터뷰이 이상만, 오광수, 김의경, 박래경, 강준혁, 이종인, 한진석, 이민희, 주용태

사회 총 7회에 걸친 연재가 이제 마무리된다. 되돌아보면 무모한(?) 기획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예술경영사’를 표방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에 응해주신 한분 한분이 일가를 이룬 분들이어서 그대로가 현대예술경영사의 한 장이었다.

양현미(이하 양) 야심찬 기획이었다.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적 맥락을 염두에 둔 기획이었다. 그러다보니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원로들의 구술사로 접근했던 것은 의의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작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은 작가 위주로 진행되어, 예술경영, 기획분야 구술사는 전무하다. 발간사업이라든가 프로젝트 등 좀 더 발전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이용관(이하 이) 처음 기획단계에서는 예술경영의 대상으로서 극장, 예술단체, 기획사, 언론사 하는 식으로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이 어려웠던 과거사를 다루는 데 적합한 접근법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각 분야를 아우를만한 원로 선정이 어려운 까닭도 있었고, 보편적 아우름과는 다른, 원로들을 중심으로 ';개인사적 기록';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두고 인터뷰이를 짠 소이가 거기에 있었다. 이번에 만난 원로들은 모두가 개척자들이다. 그분들은 뭘 시작하든 다 처음이었다. 각자 자기 방식으로 현실을 뚫고 나갔던 것이다. 우선은 이러한 기록들이 축적되어야 그 기록을 바탕으로 횡적 종적인 연구가 전개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 예술경영에 대한 선행연구가 부족하다 보니 각론 접근이 어려웠던 것 같다. 진행을 하면서 욕심이 생기는가 하면 주간웹진이 감당할 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욕심은 좋은 것이다. 진작 저질렀어야 한다. 이 기획이 이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이번에 만난 분들 다음 세대들의 활동은 또 달라지는데, 그런 흐름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극장운영만을 보더라도 중대형극장들이 서툴지만 본격적인 예술경영의 개념과 방법론을 도입하는 흐름이 있었다.

개개인의 경험에서 예술경영 분화 과정 드러나

사회 한분 한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다보니 예술경영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개개인의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다. 그대로 한국현대예술에서 예술경영이 시작되는, 싹이 트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이러한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이 분야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실험하고 실천하고 또 때로는 실패도 하는 과정 속에서 예술경영이 자리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경희사이버대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예술경영이라는 분야가 특화되어 있던 것도 아니고, 당연히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토대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우연히 이 길에 누군가 불러줘서, 어느 자리에 누군가가 필요해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후배들에게 어떤 영감, 용기 같은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예술경영이 많이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척해야 할 일들이 많다. 우리에게 보편적인 경영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고 있지 않나.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공공극장을 통틀어서 유료관객 점유율이 40%가 안 된다고 한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는 거다. 또 누군가가 새로운 방식, 다른 방식으로 치고 올라와서 그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리고 물려서 틀이 완성되는 시기가 올 거다.

미술 분야의 경우, 비영리섹터인 미술관이나 미술단체 쪽에서 보면 주로 이론가 아니면 작가 중에서 예술경영인으로 분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인터뷰를 했던 오광수, 박래경 선생 두 분이 모두 이론 출신이다. 하지만 화랑은 처음부터 그 영역에서 시작한다. 그런 큰 차이가 있어서, 미술시장과 관련해서 화랑의 이야기가 빠졌던 점은 많이 아쉽다. 이전에는 평론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이론 전공자가 주로 평론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언론이 평론의 역할을 거의 대체하면서, 이론 전공자가 미술관 학예사, 비엔날레 커미셔너 등 기획경영 분야로 많이 진출한다. 오광수 선생의 경우 초기단계로 볼 수 있다. 인터뷰 때 오광수 선생도 “왜 내가 예술경영 관련 인터뷰를 하지”라는 의문을 제기하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처럼 미술 분야 기획경영 인력이 이론에서 출발한 역사가 있다 보니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의 자질을 논할 때 예술경영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약한 것 같다. 그것이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해 현재세대가 다시 판단해야 할 과제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공연예술쪽도 사실은 예술가들이 경영까지 겸했던 역사가 먼저 있었다. 이제는 분화되고 있지만. 반대로 기획자들이 예술분야에까지 관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서양과는 다른 배경이 있는데, 우리 극장만 해도 서양의 극장과는 달리 예술단체가 극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예술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것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대개 극장만 있지 단체가 없다. 그렇게 되면 기획자가 예술까지 만지게 된다. 프로그래밍-마케팅-운영까지. 이상만, 김의경, 강준혁 선생 같은 분들은 아마도 예술가와 기획자의 중간쯤에 있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다.
양현미 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미술 분야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학예사가 예술경영 인력이냐 아니냐에 대한 미술계의 애매모호한 인식이다. 이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논의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예술경영이라면 크게 기획과 경영부분이 나눠지지 않나. 학교에서 공연/시각 커리큘럼을 짜면서 가장 곤란한 점은, 공연에서는 기획자가 하는 역할과 연출자가 하는 역할이 완전히 다르지만, 학예연구 인력은 전시연출까지 다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공연에서의 연출가 역할을 학예연구자가 다 하는 셈이다. 인력 역시 미술이론이나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이 더 많고 본인이 예술경영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외국의 경우도 학예사가 거의 학자 대접을 받기 곳이 많다.

외국의 경우도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극장 중에서도 예술단체가 운영하는 곳은 기획, 프로그래밍을 모두 예술가들이 한다. 우리의 경우 대표적으로 예술단체가 운영하지 않는 예술의전당은 기획자들이 하지 않나. 기획자는 연출자나 창작자가 아닌데, 그걸 다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소위 마케터들은 그야말로 마케팅만 하고, 재원을 끌어오는 역할로 분명히 나뉘어 있다. 반면 지방에 가면 브로드웨이 등에서 잘나갔던 작품을 공연하는 프리젠터 역할만 하는 공연장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는 마이너다. 우리 공연계에서는 그런 양상이 메이저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기획자들(사실 기획자라는 호칭도 좀 모호하다)에게 마케팅만 하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 거다. 기획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고 싶어 한다. 우리 극장경영에서는 그렇게 밖에 될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대형기관일수록 결국 분화가 되어 왔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예술경영이 어느 정도까지 전문화의 가능성이 있느냐는 대형기관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인력구성만 봐도 해외조직과는 굉장히 다르다. 지금도 학예인력 정도의 전문성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퐁피두센터 등에는 학예인력이 100명이면, 교육도 100명이다. 그와 비교하면 우리나라 미술관에는 학예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교육인력은 한둘이다. 그나마 전문적으로 교육을 하는 사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됐다. 우리나라는 분화의 단계가 굉장히 낮은 상태다.



처음에는 극장, 예술단체, 기획사, 언론사 하는 식으로 분야를 염두에 두고 기획을 시작했다.그런데 그러한 세분화한 접근이 성급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우선은 '기록'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두어야 했다. 이러한 기록들이 축적되어야 그 기록을 바탕으로 횡적 종적인 연구가 전개될 수 있을 것 같다,_이용관

당대 예술현장에 대한 세세한 증언들

사회 여전히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예술경영의 가장 큰 동력인 것 같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나. 그 과정에서 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시대적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활동의 장이나 개인적 스타일 등에서 새롭게 환기되는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분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 막연하게만 들어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이상만 선생의 경우, 워낙 기억력이 좋으셔서, 해방 이전 숭실대, 이화여전에서 뭘 했다는 것까지를 세세하게 정리하고 계셨다. 굉장히 가치 있는 자료다. 가령 서울시향이 생긴 유래에 대해서도 각자 이야기가 다른데, 이분이 잘 정리해주셨다. 그런 역사적인 흐름들을 자기가 활동하지 않은 시대임에도, 사적으로 정리하고 계셨고 그걸 전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번에 서울문화재단의 발간지원사업에 이상만 선생 저술도 선정됐더라. 좀 더 정돈된 작업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 김의경 선생이 (피터팬)을 공연하면서 무대장비가 없어서 직접 고안했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또 이종인 선생 인터뷰에서는 문예진흥원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전하던 당시의 이야기 중 서울대 본관 건물이 헐려나던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들으면서 당대의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박래경 선생 경우는 미술관 큐레이터로 시작해서 오랜 기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계셨다. 이분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던 것이, 학예사 입장에서 보면 관장은 왔다 가는 사람인데, 여러 관장들이 오가면서 미술관 운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직의 위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비해 훨씬 낮은 상태로 시작했는데, 그 위상이 점차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내부적으로는 학예직보다 사무국장이 더 직급이 높다든가 전시과가 행정직에 있다든가 하는 문제들로 예술경영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게 바뀐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분들이 그 안에서 버텨왔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예술경영인이라고 하면 CEO급을 생각하는데 이런 역할, 활동, 관점,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고 형성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야신찬 기획이었다.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적 맥락을 염두에 둔 기획었다. 그러다보니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원로들의 구술사로 접근했던 것은 의의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작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은 작가 위주로 진행되어, 예술경영, 기획분야 구술사는 전무하다. 발간사업이라든가 프로젝트 등 좀 더 발전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_양현미

개인의 경험이지만 중요한 역사적 현장

개척자들이다보니 굉장히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만 선생만 해도 전통음악에 남다른 신념이 있다. 동아방송 PD로 있을 때 수집한 고음악 음반도 상당했고, 여러 음악제 프로그램에서도 전통음악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양문화재단에서는 아람누리, 어울림누리처럼 평소의 지론대로 한글로 극장 이름을 짓기도 했다. 그런 중심은 배울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공공기관일수록 개인의 신념이 때로는 보편적 경영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오광수 선생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는데, 미술경영이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 세대의 경우에는 작가나 평론가가 할 수 있는 하나의 보직 정도로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다. 아마 이번 인터뷰가 오광수 선생에게 본인이 미술경영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를 준 것 같다. 본인의 경험에 녹아있었다는 것을 재인식 하게 되는. 이번 인터뷰를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환기미술관장을 한 경험으로 인해 전시기획과 미술관 경영을 분리해서 인식하게 되고, 특히 전시기획의 핵심적 인력으로 학예사를 어떻게 중심에 놓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경험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대 다른 관장들과 달리 사립미술관에서의 경험, 그 실험과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다. 소그룹운동이나 비엔날레 등은 전시기획의 역할이었던 반면, 환기미술관을 하면서 양쪽을 함께 보게 되고, 그것이 이론가에서 경영인으로 넘어가는 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와서 활동할 때도, 조직에서 학예사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노력의 밑바탕에 환기미술관 관장의 경험이 놓여있는 것이다.

사회 오광수 선생과 비슷한 경우가 공연에서는 김의경 선생일 것 같다. 연출가, 극작가, 연극운동가, 극단운영자, 흥행사로 공연예술의 온갖 분야의 온갖 역할을 두루 해오셨던 분이다. 처음 시작은 실험극단이라는 동인제 극단이었지만, 현대극장을 창단하고 운영하면서 흥행과 마케팅 개념이 도입된 제작과 경영을 해왔다. 그런데 관여했던 모든 분야에 대한 애정이 있다.

이종인 선생은 한국문화정책개발원(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당시 실장님으로 모셨던 분인데, 이렇게 긴 얘기를 들어보진 못했다. 연구원에만 관여하신 줄 알았는데 문예진흥원부터 시작해서 관여하지 않으신 부분이 없다. 공연이나 전시기획자들이 기획자로 이름이 남는 것과 달리 문화행정, 문화정책은 그야말로 이름이 남지 않는 분야다. 그러다보니 묻히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70~90년대 문화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문화정책은 그 정책에 누가 관여해서 했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누가 발의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담당 과장, 국장이 누군지도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에 대한 기록이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 말씀도 아주 정확해서 자료적 가치도 높은 것 같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토대도 없고 환경도 열악한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치밀하고 세련된 시도들이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발전하고 있지만, 의외로 어떤 부분에서는 예전보다 주먹구구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_김소연

치밀하고 세련된 시도들 놀라워

사회 강준혁 선생 인터뷰 때였는데, 공간 소극장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공연안내문을 만들 때 항상 국문, 영문을 같이 썼다면서 “어떤 건 그때가 더 잘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 다른 분들의 경우도 이야기를 듣다보면 ‘토대도 없고 환경도 열악한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치밀하고 세련된 시도들이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발전하고 있지만, 의외로 어떤 부분에서는 예전보다 주먹구구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저)를 보면, 박승필이 광무대와 단성사를 운영하면서 인력관리라든가, 후원회 조직 등에 아주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먼 과거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했을까 하지만 막상 기록을 뒤져보면 놀랄 때가 많다. 자꾸 기록으로 전해지고 쌓여야 한다. 근래 ‘연극열전’이나 ‘무대가 좋다’에 대해 언론에서 마치 새로운 기획이나 현상인 것처럼 말하지만, 스타마케팅이라든가 시리즈 기획 자체도 그렇고, 그러한 접근으로 흥행에 성공한 예들은 이미 부지기수다. 동양극장이나 옛 명동국립극장, 호암아트홀에도 그런 흐름이 있었다.

사회 요즘 정책에 현장이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한편 60년대부터 거슬러 올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책의 역할은 항상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이 때로는 위정자들의 정권 홍보 수단으로 예술이 종종 동원되는데, 또 그것이 토대가 되어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국제규모의 대형축제라든가 극장 등에서는 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문화예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허약했다. 그러다보니 관의 역할이 더 컸던 것이다. 그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관과 민의 가운데쯤에서 신문사들의 역할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때로는 정부가 해야 할 역할, 때로는 민간시장이 받쳐줘야 할 부분까지 도맡았으니까. 지금이야 물론 관과 민의 역할이 커져서 신문사의 몫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신문의 논조가 어떻든 과거의 인정할 만한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본다.


김소연 (전)[weekly@예술경영] 편집장

양현미 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경희사이버대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후속 연구의 단초,
예술경영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 이어져야

사회 우선 쉼표를 찍는다고 하지만, 이번에 모시지 못한 분들도 있고 아쉬움이 크다. 또 개인사와 역사서술을 교차하겠다는 의도도 이번 기획에서는 버거웠던 것 같다. 아마 이 기획에서 진행했던 것보다 앞으로 남은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예술경영사에 대한 관심이 향후 다른 기획이나 연구자들로 이어진다면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로 이 자리를 마무리할까 한다.

이번 기획은 현대예술사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예술경영의 역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사적 서술을 위해서는 좀 더 단계를 밟아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대별 특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분들이 모여서 좌담형식으로, 10년 등의 기점마다 끊어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방식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당대의 기록을 풍부하게 쌓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기초자료들이 쌓여서 직조될 때 시대를 조명하는 다양한 시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관장 중에도 벌써 돌아가신 분들이 몇 분 계시다. 그런 분들의 구술을 해놨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안타깝다.

이번에 모셨던 원로들은 시대적 흐름보다는 다분히 개인으로서 중심에 있었던 분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개인사적 성격이나 활동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개인구술사가 맞는 접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오면 활동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짚어보는 기획도 가능하다. 어찌 보면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거칠게 다룬 측면이 있는데, 후속 연구들이 시작될 수 있는 단초는 마련되었다고 본다. 이분들의 활동은, 개인사의 의미를 넘어 현대예술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고 역사이다. 좀 더 보편성을 살려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정리 _ 김소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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