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 의해 위탁 · 운영되는 창작공간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연달아 문을 연 지 3년차에 접어들었다. 이들 공공기관 창작공간이 등장, 전개되어온 과정을 정리하고, 이들이 내세웠던 새로운 예술창작지원의 형태로서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 향후 과제 등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연재순서: ③ 좌담
일시: 2011년 7월 9일(토) 장소: 홍대 인근 사회:오세형_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본지 편집위원 패널: 김규원_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실 연구위원 김희영_금천예술공장 총괄 매니저 이부록_미술작가 최관호_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간접지원 정책에 따른 창작공간의 확대

사회 창작공간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사람도 많지 않고, 전문영역인지도 모호하고, 성과 등을 정확히 짚어볼 수 있는 데이터도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 특집을 통해 2세대 창작공간에 이르게 된 경과와 정책·제도적 측면에서의 고찰을 앞서 소개했다. 오늘은 체험적인 측면에서 창작공간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우선, 본인이 해온 일과 창작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김규원 문화예술 연구자다. 7~8년 전, 폐교를 활용한 문화예술시설들이 만들어질 때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폐교에 예술가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선구적인 일이었고, 어떻게 지역과 문제없이 연계할까, 하는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 창작공간이 확대되는 데는 정책적인 이유가 있다. 실무적으로는 중앙정부의 경우, 돈을 직접 지원하는 것보다 공간임차 등으로 간접 지원하는 것이 국가예산을 확보하기 쉽다는 측면이 있다. 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상주단체, 전용공간 임차제도 등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지자체는, 문화재단이나 문예진흥기금이 공간에 대해 예산을 쓰도록 유도하는 부분도 일정 정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창작공간이 ‘근거 없는 유행’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 정부가 새로운 문화시설을 만들 때, 방 한두 개는 꼭 레지던스용으로 둔다는 식의 겉치레인 것 같다. 왜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는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다. 정책적 근거는 있는 것 같으나, 타당성 입증은 아직 안 된 단계라고 생각한다.

이부록 창작자 입장에서 창작공간은 지자체 시스템과 작가의 욕망이 일치할 때 공동의 행위를 하는 곳이다. 나는 2008년부터 2세대 창작공간에 참여해왔다. 아르코미술관의 임대프로젝트에 참여하여 3개월간 미술관의 전시공간을 작업실이나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고, 2008년 청계창작스튜디오, 2010년 경기창작센터에서 디자이너 안지미와 함께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을 탐구하고 작업에 반영하는 프로젝트를 해왔다.

창작공간의 변화를 볼 때, 1세대가 폐교 등을 활용한 자생적 성격의 창작공간이라면, 2세대는 지자체나 기관이 정책적으로 유휴시설을 활용해 도심을 재생하고, 지역사회 연계의 일환으로서 시스템화 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김희영 미디어시티-서울2000부터 부산비엔날레를 비롯 10년 가까이 비엔날레에서 일해왔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창작센터 운영프로그램을 설계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 금천예술공장의 매니저를 맡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문화사업을 해온 경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정부의 문화사업 트렌드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비엔날레에서 예술가 레지던시 사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최관호 1999년, 사립미술관으로서는 최초로 창작공간 운영을 시작한 영은미술관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민간에서는 쌈지, 지자체에서는 광주광역시의 팔각정스튜디오, 양산동스튜디오 두 개가 소극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정도였다. 창작공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단계였기 때문에, 실무 담당자로서 여러 작가가 공동의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운영규정도 만들고, 창작공간이 공간과 작가프로모션 중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 고민도 하면서 상당히 많은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사한 주제로 좌담을 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여전히 창작공간에 대한 인식이 뜨거운 감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회 각자의 경험담 속에서 창작공간, 레지던시의 전국적 확대라는 정책의 맥락이 읽힌다. 주체가 누구인지는 어느 모델을 가지고 얘기해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창작공간이 하나의 전이현상처럼 퍼져 담론을 형성하고, 전문가가 생기고 인력이 늘어나는 상황인 것 같다.


지역 연계는 모든 창작공간의 존재기반인가

사회 해외든 우리나라든 역사적으로 창작공간을 주도한 것이 시각예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최근 창작공간이 다장르, 문학, 공연 등으로 다변화 되는 경향에 있으니, 좀 더 맥락을 확장시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김규원 예술생태계에서 창작공간이 필요한 시퀀스는 장르별로 다르다. 문학의 경우, 자료수집 다 하고 막판에 한 달 정도 몰아서 쓸 때 창작공간에서의 레지던스가 필요하다. 공연의 경우, 연습장소가 없어 매일 돌아다닌다. 창작공간이나 레지던스가 필요한 시점과 단계가 창작의 과정마다 다르며 필요한 프로그램과 공간요구도 상이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런 고려 없이 공간을 만들어 놨으니 들어오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시각예술 위주였다고는 하지만, 시각에서도 필요한 단계가 있을 텐데, 충분한 고려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창작공간을 만들 때 방향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식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모두가 컬처노믹스, 창조도시를 부르짖는데, 예술가 한두 명이 모이면 세련된 도시라는, 창조도시 이론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그들이 모이게 하려면 레지던스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술가를 치장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고 창작공간을 만드니, 당연히 매니저는 행정밖에 할 수 없고, 목적도 사라진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창작공간에 들어간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근거, 정체성 혹은 목적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행정과 부딪히고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3세대는 컬처노믹스로 각인되어 확대되는 건 아닐지. 목적성이 위험한 것 같다. 아니, 목적성이 불분명하다.

초기의 창조도시 이론가인 비앤치니는 ‘지역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 반면 이후의 이론가인 찰스 랜들리나 리처드 플로리다는 ‘지역개발’을 중시한다. 지역매개가 사라진 곳에 이 이론을 적용하니 위험해 보인다. 지금의 창작공간은 때로는 과다하게 지역에서의 역할을 강조 받고 때로는 겉치레로 존재한다.

사회 지자체에서 창작공간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지역재생 같은 논리밖에 없기 때문에 지역형 사업이 강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공간특화를 위해 지역에 기여하고 연계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작가들이 생각하는 창작센터와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있다. 창작보다는 지역에서의 공공적 기여 등에 대한 창작공간의 요구가 많지 않나.

이부록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지자체가 예술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때 언급되는 것이 이른바 ‘컬처노믹스’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지역사회에 개입하려는 작가에게 그러한 이야기는 너무 거시적인 느낌이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목적과 특수성을 가지고 공간이 형성되었다면 고민지점도 달라졌겠지만, 막상 공공의 대안을 찾기도 쉽지는 않다.

지역사회와 예술가의 충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창작공간에 들어가는 예술가의 목적은 다양하다. 작가로서의 이력을 충족하려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경험과 성찰을 통한 예술표현의 출구를 새로운 지역에서 찾는 작가도 있다. 두 경우 충돌의 성격이 다르다.

처음에는 지역주민들도 호기심과 관심이 많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새롭고 낯선 창작행위에 대해 너그러운 반면, 그들만의 욕망이 있기도 한데, ‘친해지면 노인정에 그림이라도 그려주겠지’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상상을 확인할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작가는) 지역연계, 공공적 기여, 관객참여 등으로 모세혈관처럼 침투해 지역과 소통하려고 하지만, 간극을 확인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정 지역과의 소통을 통한 효과적인 콜라보레이션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하는 과정인데,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간극을 좁힐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회 말씀해주신 국가나 지자체가 창작공간에 대해 갖는 관점과 실제 공간의 기능 간의 간극 확인조차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창작공간 대부분은 지역에서 도려낸 것 같은 문화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지역에서 기능하는 공간을 요구받지 않나.

김규원 내가 요즘 느끼는 딜레마가 예술이 사회적, 경제적, 지역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구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왜 순수하게 예술 자체의 가치로 공공지원을 요구할 수 없는가. 보수적이라고 할지도, 끝없는 숙제일지도 모르지만 ‘예술활동 자체’가 가져오는 가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관호 가장 오래된 창작공간인 미국의 PS1의 경우, 1970년대 경제 공황 속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최소한의 창작활동 공간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으로 폐교를 활용해 만든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시작은 유사하다. 1990년대 중반 지방근교에 폐교를 활용해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지원하였는데 관리부재 등으로 결국 폐교가 또 다른 폐교를 낳았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지금 창작공간이나 레지던스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국가, 지자체, 사립미술관 등에서 운영하는 공간들은 시설도 최상급으로 변화되었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확대되었다. 10년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모두 크게 진화한 것이다. 다만 공간의 진화와는 달리,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평가하는 행정기관들의 이해력과 사고방식은 오히려 변질되어 성과주의 중심의 행정 잣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술지원 사업이라는 특성을 인정하고 전문가 집단의 운영 중심체제로 개선되어야 한다.

김희영 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금천예술공장의 2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는 개막일에만 400여 명이 관람했고 특히 작가프레젠테이션을 보기 위해 150명의 고등학생이 공간을 찾았다. 하지만, 이들의 다소 세련되지 못하고 소란스러운 전시관람 매너에 대해 미술계 전문가들과 작가들 사이에서는, 전문가들의 오픈스튜디오 관람을 위한 주최측의 배려, 전문가 대상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요청이 있었으며, 잠시 들렀다 지나치는 (학습되지 않은) 학생들의 전시관람 태도에 대한 지적과 개선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현대미술’이라는 다소 낯선 영역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선에서 나름대로 이해하며 반응하였고 이런 과정의 의미를, 적어도 이들을 인솔한 교사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미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느냐 마느냐,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이 이뤄내는 사회적인 기여와 관객에 대한 영향력은 자신들의 가늠보다 훨씬 크다. 본인들의 의도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창작공간 조성은 몇 백 억 드는 공연장 건립 등과 비교할 때 예산 대비 언론소구력을 지닌 사업이다 보니 지자체가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문화재단의 예술가 지원사업은 성과를 전제로 하지 않는 순수 창작지원 형태가 많다. 이와 달리 예를 들어 서울시창작공간 사업의 경우, 공공성을 전제로 출발했기 때문에 지역연계라는 과제를 예술가에게 부여하고 있다. 동시에 예술가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국제교류도 강력하게 추진한다. 예술에 대한 순수창작지원도 중요하지만 예술가가 지자체, 또는 지역사회와의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이해관계를 도모하는 것 역시, 필요한 협업방식이라고 본다.


신선한 자극 혹은 자생력의 파괴

사회 창작공간이 확대되면서 창작자의 교류방식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작가를 키워서 뉴욕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창작공간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네트워크 구축이나 커뮤니케이션 방법, 작가의 성장을 위한 소통채널이 확대된 셈이다. 공공이 이런 채널을 만들어주는 것이 작가나 창작여건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가.

최관호 창작공간은 정부와 지자체, 사립기관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수가 증가해 왔다. 긍정적인 측면은 우선 그만큼 수도권과 지방작가들이 레지던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또한 창작공간을 통한 정보교류, 인적교류 등으로 작가들 스스로가 많은 부분 성장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레지던스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은 이러한 창작공간의 레지던스가 일정기간 동안 공간을 지원하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어,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오히려 작가들의 자생력을 무기력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다시 다른 공간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대한으로 잡아도 한 작가가 참여할 수 있는 곳은 고작 서너 개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의 공백기간을 포함하여 4~6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더 이상 창작공간 활용이 어렵거나, 제한되는 경우가 생기고, 이 경우 작가들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갖게 된다. 물론 그간의 레지던스 이력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와 경력을 쌓은 작가들은 스스로 활동영역이 확대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들은 ‘레지던스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창작공간의 프로그램에만 의존해 활동하던 작가들이 사회에 나와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공간이나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역할이나 가능성이 여전히 무한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부록 유럽의 여러 도시에도 각기 다른 환경의 창작공간이 있다. 정착해 개인 작업공간을 갖지 않고 레지던시 생활을 하는 작가를 보면 유목민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반면 얼마나 안 풀리면 떠돌아다닐까, 하는 입장도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창작공간이 지역연계를 조건으로 내걸고, 작가들 역시 지역주민과의 소통과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지역과 시민을 대상화, 소재화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레지던시를 위한 레지던시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특성화된 지역이나 공간에서의 거주와 활동은 작가들의 작업환경에는 더 없이 신선한 자극일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산업화의 축을 담당했던 구도심의 한복판에 고가도로를 대신해 개천이 조성되어 정권창출의 기념비가 된 지역의 호텔건물에 위치한 청계창작스튜디오나, 일제시대에 부랑아수용소였고, 도시산업화에서 배제되었던 선감도의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한 이유였다. 작가들은 특수한 역사와 지역 컨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서치를 통해 도시에서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김희영 창작공간 매니저로서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오히려 한국작가의 국제화 열망이 굉장히 강하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풍광과 지역색, 그리고 여유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유럽 전원의 지방스튜디오 등을 한국작가들은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열망이 한국 창작공간의 국제교류 기능을 보다 강화하게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행정-기획의 이원화가 전문화는 아니다

사회 미국의 창작스튜디오 매뉴얼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해외와는 출발점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적용하기가 어렵더라. 밤에 모기가 많다는 클레임에 대응하는 것도 창작공간 운영자의 역할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창작공간이 특성을 가지려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긍심을 갖고 전문성도 확보해야 하리라 생각하는데, 창작공간 운영자에게 필요한 전문성은 무엇일까.

김규원 복잡하게 세팅된 예술생태계 안에서 창작공간에 예술가, 매개자는 물론, 아트딜러까지 등장하는 방식(특집기사 2 참조)이 좋은 방식인지, 잘 판단이 안 선다. 또한, 정책과 제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공공의 창작공간에서 학예직과 행정직이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김희영 2세대라고는 하지만, 사업주체인 지자체에서는 매니저를 지적(知的) 집단이 아닌 행정가나 시설관리자라고 보는 통념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기획 일을 수행해야 한다. 전시도 기획하고 국제심포지엄에선 발제자로 나서야 한다. 현실과 사업주체 사이에 인식의 지체 현상이 있는 것 같다.

현장에서 느꼈던 것은, 기획과 행정업무가 분리되지 않는 편이 처리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창작공간 운영은 일이 너무 많다. 경력자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막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에너지를 가지고 현장의 과제들을 ‘해치운다’. 그들은 업무량은 감당하지만, 전문성이 떨어지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금천의 경우 시설은 용역업체가, 예산은 재단 본부에서 맡고, 공간의 기획행정 인력은 7명이다. 작가 19명에 직원 7명인데, 직원 하나가 겨우 작가 세 명 지원하느냐는 이상한 경영분석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력이 앞으로 증원될 것 같지는 않다. 그나마 금천예술공장은 7명의 인력을 통해 나름 전문화된 편이고, 3~4인으로 운영되는 창작공간은 홍보, 예산, 기획, 행정의 모든 업무를 수행하는 멀티플레이로 운영되어 전문성을 기르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이것은 서울시창작공간뿐 아니라 창작공간들의 보편적인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부록 학예와 행정업무가 분리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학예팀 내에서도 교육, 창작지원, 지역연계, 국제교류 등으로 세분화되고 분담이 이뤄지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업무 간 소통의 문제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운영초기의 현상일 수도 있다.

사회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인 것 같다. 미술관과 연계하여 전시를 한다든지 하는 아웃풋이 나오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김희영 공공 창작공간 운영에 대한 의견 중에는 ‘민영화’가 해결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민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민영화된 나쁜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국제교류를 하다보면 유럽, 일본,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의 민간창작공간들은 예산의 취약성으로 교류 및 공동사업을 수행하기 힘들다. 심지어 교류를 협약한 유럽의 한 기관은 예산 감축으로 올해 우리와의 작가교환 사업을 보류하였다. 또한 민간위탁시 주어지는 ‘경영효율화’라는 과제 때문에 본래 공간의 취지인 ‘공공성’을 잃고 인건비 감축, 공적 성격을 잃은 과도한 수익사업에 몰두하는 사례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공공사업에 문제점이 발생할 때 대안은 ‘민간 위탁운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기는 하나, 특히 문화적 영역에 대한 지원과 홍보사업, 그리고 지역과의 밀착성을 도모하는 사업이 민영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당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사업 운영에 대한 세계적 흐름은 ‘제3섹터에 의한 운영’인데, 이는 단순한 위탁이 아니라 ‘파트너십’을 의미한다. 서울문화재단에 의한 서울시창작공간 운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라고 생각한다.


제도적 공간에서 정서적 공간으로

사회 문예회관, 미술관, 박물관 시설증가는 멈췄고, 이후 국가 문화시설 보급에서 잼(jam)이 걸려있는 곳이 창작공간인데, 그 패러다임이 표류한다는 느낌이 든다. 문예회관 등이 시민과 마주하는 공간이었다면, 창작공간은 좀 애매한 포지셔닝이다. 그래서 지금은 계속 시민 접점을 넓히는 방식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긍정적인 기능을 갖는 곳으로 거듭나야 할 것 같다.

김규원 각 공간마다 단순한 목표, 집중된 목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공간은 작가교류만, 다른 곳은 지역교류만, 국제교류만, 장르복합화만, 창작지원만, 그런 식으로 목표를 정확히 설정하고 성과도 거기에만 맞추면 되는데, 지금은 목표는 너무 다양한데, 성과는 너무 일반적이다 보니 애매한 것이다. 작가들 역시 저 공간에 가면 지역교류를 할 수 있으니 가겠다, 국제교류를 하기 위해 저 레지던스를 가겠다, 하는 식으로 명쾌한 목표를 잡아야 3세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실험을 했으니, 각자 중심목표를 세워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그럼, 작가도 떠돌 필요 없이 자기 성향과 맞는 곳을 찾아 활동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성과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모든 문화시설에 공통되는 얘기이다.

몇 년이 지나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문예회관 역사 3-40년 만에, 군 단위까지는 못가도, 중소도시의 문예회관은 특화되기 시작했다. 창작공간은 초창기다. 계속 이야기하고 설득하면 공공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아직은 시작인 것 같다.

김희영 동의한다. 초기에 불과한 창작공간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특성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 서울의 경우 처음에 설정한 공간의 특성과 현장에서 체험한 것이 많이 다르다. 금천의 경우 가산디지털단지 내 고학력자의 문화적 수요가 상당히 높다. 그런 요구들이 공간의 성격으로서 드러날 것 같다. 금천은 한국산업단지공단, 구로경제인연합회 등과 함께 사업 홍보와 내년 사업을 설계 중이고, 아파트형 공장 로비에서의 전시나 다빈치 아이디어 공모 선정작 하나를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상품화되도록 지원하는 등의 협업을 시작했다. 다만, 작가들이 이러한 전략의 변화 속도를 따라오거나 납득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그 지체는 정당한 것이다.

이부록 금천예술공장의 다빈치 공모, 글로컬 미학 등 인문학적으로 접근, 협업하는 프로그램 역시 특성화의 현상인 것 같다. 경기창작센터에서 진행하는 공무원연수도 인상적이었다. 공공기여의 또 다른 일선에 있는 일반행정 공무원들과 작가들의 소통을 유발하고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간극을 확인하고 최소화하려는 시도에서 특성화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장르 간의 통합, 통섭을 많이들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잘 안되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 창작공간들이 하는 시도-시각예술 중심의 창작공간에 문학가나 음악가가 입주하는 등-도 다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 긍정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사회 머물렀던 창작공간이 자기 고향 같은 독특한 기억으로 남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최관호 영은창작스튜디오의 경우, 역대 입주작가들과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입주기간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고, 한 번 입주했던 작가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작가가 필요로 할 때는 다시 일정기간 입주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작업실을 마련하는 등의 시스템을 검토하고 있다. 또 원로작가들에게 기간제한을 두지 않고 작업실을 제공한다. 그렇게 융통성 있게 운영하면서 작가들과도 친근하게 어울려 이후에도 유대관계를 갖고 창작활동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공공기관에서 할 수 없는 역할들을 민간에서 많이 하고 있다. 공공의 경우 안정된 조직과 예산으로 ‘공공’적인 시도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민간의 경우, 오너의 독단적인 결정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공공과 민간에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지속이 차별화를 만든다

좌담을 나누고 있는 김규원, 김희영, 이부록, 최관호

사회 소위 2세대 창작공간에 대해 문제점부터 기대까지 여러 이야기가 활발히 오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향후의 창작공간을 위한 제언을 한마디씩 부탁드린다.

이부록 올 5월, 청계창작스튜디오가 폐쇄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공론화되지 못한 채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호텔 내부에 위치해 접근이 어렵고, 문화공간으로 역할이 미흡하여 창작공간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어렵다는 판단이 폐쇄사유라고 하더라. 지속성이 간과되면 정책, 공간, 노력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부정적인 징후를 느낀다. 문성의 부족이나 목적의 불투명함 등 복합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은 수십억의 예산이 투자가 되었던 곳인데, 혈세가 날아가버린 셈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했는지, 누가 책임을 졌는지 모르겠다. 단기간에 성과를 보거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큰 문제다. 그렇게 쉽게 한 공간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김희영 미술계 쪽에서 중간중간 실직기간을 경험해 고용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전문성 얘기를 했는데, 창작공간 매니저들이 미술관 학예사로 갈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지자체 창작공간이 만들어져 창작공간 매니저들에게는 고용기회가, 작가들에게는 지원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크게 봐서 좋은 흐름인 것 같다. 요코하마 같은 해외 도시의 사례를 받아들여 전문성을 키우는 속도도 상당히 빠른 것 같다. 국가에서 돈을 들여 전문성을 키워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지금 같은 이야기가 사업에 대한 각성의 기회가 된다.

최관호 아직도 창작공간 운영 전문가가 별로 없는데, 오히려 작가들이 먼저 그 중요성을 각성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작가들이 매니저의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보고 창작공간을 선택하기도 한다. 전문가에 의해 기관의 위상도 커지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자신의 참여기회와 프로모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창작공간에는 창작-작가의 관점도 있지만, 공간운영의 전문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전문인력의 장이 넓어지면서 특화되고, 그것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뭐가 나올까에 매달리고 있는 와중이지만, 지각변동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김규원 이부록 작가님의 ‘없어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에 동의한다. 예술가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현장보다 정부, 지방의 정책 추진이 너무 빠르다. 이제는 해외사례에 대한 벤치마킹이나 정책 실험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행정과 정책이 치고 나가고 예술가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괴리 속에서 창작공간은 계속 생기고 있는데, 정책 때문에 사라진 다른 부분도 많다. 사라지지 말고, 장점들이 부각되고 간극이 좁아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치고 나가는 사람도 뒤를 돌아봐주면서 말이다.

이부록 라익스아카데미의 얀빌렘 쉬로퍼 전 관장본지 117호 리뷰 기사 참조을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는데, 그가 무려 28년간 관장직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기관과 정책의 전문성과 투명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러한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 정책에는 어차피 유행이 있다. 최근에 창작집단 뛰다가 강원도 화천 폐교에 들어갔다본지 133호 하우투 기사 참조. 언제적 폐교냐고 많이들 얘기했지만, 소신 있게 들어갔다. 이런 사례가 ‘지속성’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창작센터도 그런 식으로 차별화되기를 기대해본다.



[특집] ‘공공기관 창작공간의 현황과 운영’ 다른기사 보기
① 창작공간의 전개와 흐름 ② 프로그램과 운영구조

정리 _ 오세형, 고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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