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의 만남은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되었다. 남산예술센터와 공동 제작한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 푸가>와 폴란드 크라쿠프에 위치한 ‘스타리 국립극장’이 제작한 <The boy is coming>은 소설가 한강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원작이 같다는 것만으로는 서로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남산예술센터는 2020년 서울-광주-크라쿠프를 잇는 공연 교류를 계획하고 있다. 서로의 나라에 각자의 작품이 보다 의미 있게 선보이려면 두 세계를 만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푸가>(좌)와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의 <The boy is comming>(우) 포스터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푸가>(좌)와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의 <The boy is comming>(우) 포스터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푸가>(좌)와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의 <The boy is comming>(우) 포스터

<휴먼 푸가>는 작년 겨울 남산예술센터와 첫 만남을 가졌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이하 뛰다)’가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 공모에 응한 덕이었다. 11월 개막하는 한 작품을 위해 올 초부터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광범위한 리서치, 토론, 연습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올여름께 한 일간지를 통해 『소년이 온다』의 다른 공연 소식을 듣게 됐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폴란드의 연출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Marcin Wierzchowski)가 『소년이 온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5․18기념재단에 연락했고, 기념재단에서 한강 작가와 연결했다고 했다.

『소년이 온다』가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준비되는 것을 보며 극장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공연을 두 나라에서 함께 선보인다면 어떨까, 한강의 작품이 어떻게 무대화되는지 함께 지켜보면 어떨까, 폴란드는 광주를 어떻게 말할까.
동시대, 실험, 초연을 브랜드로 삼는 창작초연중심 제작극장 남산예술센터의 무대에 외국 작품이 오르는 것은 지난 10년간 손에 꼽을 만큼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년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는 사실도 폴란드에 연락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과의 소통도 빠른 결정에 큰 힘이 됐다.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은 폴란드 문화부 산하 예술지원기관으로, 비교하자면 한국의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은 아시아 문화권에도 폴란드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아시아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각 국가의 담당자들은 담당 국가의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 프로젝트의 물꼬를 빠르게 터나가기 시작했다.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 전경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 전경

제일 처음 진행한 일은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의 작품 <The boy is coming>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원작을 같이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와 같은 의도나 방향으로 가고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광주의 아픔이 여전히 번져나가고 있는 한국 사회와 아우슈비츠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 학살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폴란드 사회가 공유하는 정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년이 온다』의 폴란드 공연 <The boy is coming>은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되는 긴 공연이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1부에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장별로 구성했고 2부는 폴란드의 현실을 반영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공연은 1781년 설립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스타리 극장의 여덟 군데 공간 사이를 이동하며 진행됐다. 소설의 각 장면이 공간을 따라가며 아주 세밀하게 그려졌다. <휴먼 푸가>를 준비하면서 광주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광주를 통해 배우 각자가 경험한 것을 각자의 몸을 통해서 어떻게 발화할까에 초점을 맞추며 작업해왔던 뛰다의 방식과는 달라 당혹스럽기도 했다.

<The boy is coming> 공연장면 Ⓒ스타리 국립극장 <The boy is coming> 공연장면
Ⓒ스타리 국립극장
<The boy is coming>에 사용된 미니어쳐 세트 Ⓒ스타리 국립극장 <The boy is coming>에 사용된 미니어쳐 세트
Ⓒ스타리 국립극장

하지만 다음날 스타리 극장 관계자, <The boy is coming>의 창작진과 긴 회의를 통해 서로의 작품, 그리고 사회, 정치적 상황, 정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대화를 나누며 당혹스러움은 점차 가라앉았다. 서로의 세계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마르친 연출은 나날이 우경화되고 민족주의가 심해지고 있는 동유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폴란드인들이 가지는 국가 폭력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이 프로덕션의 시작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광주에 대해서 처음 알았고, 역시 광주라는 도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폴란드 관객들에게 이 두려움에 대한 경고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를 관객들에게 세밀한 서사적 구조로서 전달하여,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단지 하나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일종의 경고로서 폴란드에서 작동되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가 한국에 혹은 1980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심지어 폴란드에도, 어느 때든 있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 프로덕션은 비슷한 리서치 과정을 거쳤다. 뛰다가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에서도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유사한 사건의 영상, 영화들을 보면서 작업을 따라갔다. 하지만 광주를 거듭 다녀오면서 윤리적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뛰다와 달리 광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접한 폴란드에서는 오히려 그 잔인성을 어떻게 더 예민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경고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섯 시간의 긴 대화를 마치면서 광주를 보다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광주를 방문하고 실제 공간의 기운을 느끼길 권했다.

<The boy is coming> 중 상무관이 체육관으로 번역되어 생긴 체조사다리 장면 <The boy is coming> 중 상무관이 체육관으로 번역되어 생긴 체조사다리 장면

그리고 한 달 뒤, 마르친 연출과 세트 디자이너 안나 마리아가 한국을 방문했다.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상황과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 빽빽한 일정을 짰다. 그들을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부터 시작해서 광주까지 안내했다. 1박 2일에 걸쳐 (구)국군통합병원, 자유공원, 5.18민주묘지, (구)전남도청, 505보안대, 광천시민아파트 등 광주를 답사했다. 면밀하게 들여다보기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월지기이기도 한 임인자 감독님의 주선으로 시민군 생존자인 김향득 님을 만나 당시의 상황을 듣기도 했다. 5.18기념재단에 들러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상무관에 대한 오해도 풀었다. 『소년이 온다』의 영역본 『Human Acts』에서 시작된,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였다. 영역본에 ‘상무관’이 ‘gymnasium(체육관)’으로 번역되어 있었던 터라 <The boy is coming>에서 동호(『소년이 온다』의 주인공)가 공놀이를 하며 나타났다. 세트로 활용되었던 사다리들도 폴란드 학교의 체육관이라면 어디에든 있는 체조 사다리라고 했다. 첫 장면에서 열네 살 때 찍었던 학급 사진으로 막을 연 것도 그 체육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무관이라는 장소가 존재해야만 했던 한국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는 서로의 열네 살에서 한국과 폴란드의 사회, 남북 관계, 폴란드의 선거까지 다양한 이슈를 오가며 서로의 작품에 다가갔다.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 푸가> 공연장면 Ⓒ남산예술센터, 이승희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 푸가> 공연장면 Ⓒ남산예술센터, 이승희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의 <휴먼 푸가> 공연장면 Ⓒ남산예술센터, 이승희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이라는 우연을 시작으로 만나, 서로의 작품을 보고, 작품이 근간으로 하는 서로의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한국과 폴란드를 방문했던 기억들이 내년 양 프로덕션에 단단한 연결 고리가 되어 줄 것이다. 창작진이 만나면서 양쪽 사회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같은 텍스트를 놓고 작업한 서로의 작품을 보고 느꼈던 생경함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현되리라 믿는다.
두 프로덕션의 만남은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했지만 이 만남은 두 세계에 있는 관객들과 만나 완성될 것이다. 5.18광주민주화항쟁 40년이 되는 내년 5월, 서울과 광주에서 두 공연을 함께 소개하고, 내년 가을 <휴먼 푸가>를 크라쿠프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인간의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광주라는 장소, 그리고 그 연극, 그리고 그 책, 또 거기에 가담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단지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곳곳 도처에 존재하는 고통과 함께하는 문제의식으로 확장시켜 나가면서 함께하게 되기를 바란다.

  • 송서연
  • 필자소개

    송서연은 공연 기획과 행정, 무대 기술 등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와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근무 중이다. 최근에는 극장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극장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 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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