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션 트래킹 센서와 HMD 장치 ▲ 모션 트래킹 센서와 HMD 장치 William Latham, <Mutator2 Triptych>, 2013 ▲ 윌리엄 래섬(William Latham), <Mutator2 Triptych>, 2013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을 대변하는 회화는 세상을 보는 창(window)으로 작동해왔으며, 때문에 회화의 이미지는 미메시스(mimesis, 예술작품의 실제 세상에 대한 모방)에 충실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창을 통해 볼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세상은 더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통해 우리 바깥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종전에는 이미지를 통해 실재에 관해, 세계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이미지 속에서 이미지를 체험하고, 그렇게 체현된 이미지로 실재의 의미들을 만들어나간다.



Myron Krueger, <Videoplace>, 1977∼1989 Myron Krueger, <Videoplace>, design plan, 1977

▲ 마이론 크뤼거(Myron Krueger), <Videoplace>, 1977∼1989

▲ 마이론 크뤼거(Myron Krueger), <Videoplace>, design plan, 1977



이런 경향은 디지털 인터랙티브 아트에서 증폭되는데, 그 출발은 마이론 크뤼거(Myron W. Krueger)가 모색한 <Glowflow>(1969)나 <Videoplace>(1977∼1989)의 반응환경(Responsive Environment) 시스템으로부터 기인한다. 반응환경이란 컴퓨터를 기반으로 빛과 사운드장치, 비디오카메라 등을 설치하고 컴퓨터그래픽을 스크린에 투사해 그에 대한 관람자의 반응을 포착, 확장시키는 이미지 공간이다. 작품과 관람자의 상호작용이 진행되는 이 이미지 공간은 이후 물리적 공간과 비물질적인 가상의 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환경, 다시 말해서 작품과 관람자의 물리적 거리가 전제되지 않은 채 기술장치를 매개로 관람자가 이미지 속에 공존하는 공간구조로 나아가게 된다.

근래 들어 이런 VR 환경을 문화 산물들에 본격적으로 접목·상용화하려는 시도가 한창인데,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VR 아트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샬롯 데이비스(Charlotte Davies)의 <Osmose>(1995)와 <Ephémère>(1998)를 통해 1990년대에 이미 구체화된 바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관람자가 조끼 형태로 이루어진 모션 트래킹 센서(Motion-Tracking Sensor)와 HMD 장치를 착용하고 이미지 공간 내부로 진입해 가상의 자연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관람자가 실제로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쉴 때마다 이미지 속 관람자의 신체가 뜨거나 가라앉으면서 가상공간의 탐색 경로가 바뀌는 체험이 벌어진다.



Glen Keane, 〈Step into the Page〉, 2015 Glen Keane, 〈Step into the Page〉, 2015 Glen Keane, 〈Step into the Page〉, 2015 ▲ 글렌 킨(Glen Keane), <Step into the Page>, 2015

이 같은 유형의 이미지 체험은 최근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인 가상현실 애니메이션 <Henry>나, 세계적인 애니메이터 글렌 킨(Glen Keane)이 시도하고 있는 <Step into the Page>(2015~) 등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킨은 틸트 브러쉬 컨트롤러와 HMD 등을 활용한 작업 과정을 공개하면서, 가상현실 속에 잠수(dive)해서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경험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킨이 표현한 ‘잠수’는 기존의 애니메이션 수용방식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지 속으로 잠수하는 듯한 VR의 이미지 공간에서는 인터페이스 자체가 이미 작품(이미지)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이미지에 반응하는 인터랙터의 신체 또한 그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미지 체험을 이미지와 전(全)신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온몸 몰입(full-body immersion) 혹은 체현적 몰입(embodied immersion)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HMD뿐만 아니라 센서 벨트나 데이터 글로브 등의 바이오피드백 인터페이스를 도입할 경우에 이런 양상은 더욱 강화되는데, 온몸 몰입이나 체현적 몰입에서는 실재와 같은 이미지와 환영 같은 신체의 감각들이 한데 뒤섞여 이미지 세계를 이루어나간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질 vs. 비물질, 실재 vs. 가상 등의 구분은 설득력이 없다. 실재지만 가상으로 존재하고, 가상적이지만 분명 실재하는 것이 VR의 이미지 세계다.

이미지의 체현 기술은 다른 한편으로 실재의 생생함(liveliness)에 대한 탐색과도 맞물린다. 특히 유전공학이나 생명공학, 나노공학 등의 기술력을 매개로 나타나는 실재의 이미지는 사실상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산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 윈체스터 IBM 과학센터의 윌리엄 래섬(William Latham)은 유전 속성에 따라 3D 인공 유기체를 산출할 수 있는 ‘뮤테이터(mutator)’ 프로그램을 개발, 유전 알고리즘을 통해 컴퓨터 생성의 자연을 제시한다. 이때의 컴퓨터 이미지는 이미지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음을 가장하지 않는 고유한 생생함까지도 야기해서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가상의 실재를 드러낸다. 때문에 래섬의 작업은 컴퓨터아트 중에서도 특히 인공생명예술(Artificial Life Art)이나 유전예술(Genetic Art), 발생예술(Evolution Art) 등으로 분류된다. 이와 달리, 미생물 자체를 재구성해 이른바 ‘살아있는’ 회화를 선보이는 이도 있다. 생물학자인 파트리샤 노로냐(Patrícia Noronha)는 미생물 피그먼트와 바이오필름을 예술 매개로 사용해서 효모(yeast) 세포로부터 추출된 예측불허의 미생물 이미지인 ‘바이오페인팅(Bio-painting)’을 제작한다.

생생한 실재의 탐구는 물질구조를 원자나 분자 단계로 드러내는 나노아트(Nano Art)의 경우에 더욱 극명하게 이루어진다. 가령 크리스타 좀머러(Christa Sommerer)와 로랑 미노뉴(Laurent Mignonneau)는 2002년 《Science+Fiction》전시에서 나노 촉각적 인터랙티브 작품 <Nano-Scape>(2002)를 소개한 바 있다. 이 작품은 특수제작된 무선 마그네틱 링을 손가락에 착용한 관람자가 ‘프로액티브 데스크(Proactive Desk)’라 불리는 테이블 표면에서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인력(引力)을 느껴 작품과 상호작용하도록 구상되었다. 좀머러와 미노뉴의 언급에 따르면, 초극미의 나노 세계를 터치를 통해 직관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호작용의 힘을 체험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다.



Christa Sommerer & Laurent Mignonneau, 〈Nano-Scape〉, 2002 ▲ 크리스타 좀머러(Christa Sommerer) & 로랑 미노뉴(Laurent Mignonneau), <Nano-Scape>, 2002

육안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나노 규모의 물질 이미지는 그 구조의 화학적, 기계적, 전자기적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는데, 예를 들어 금(Au)은 보통 황금색을 띠지만, 10나노미터 이하의 크기가 되면 적색으로 되었다가, 미묘한 크기 변화에 따라 보라색(75nm), 하늘색(10~75nm)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발색의 차이는 표면 플라즈몬의 가시광선 흡수와 반사작용이 그 크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시광선 파장보다도 더 작은 대상들은 실제로 색채나 볼륨을 지니지 않기에, 형태나 크기, 색채 등의 구체적인 형상을 보이는 나노 이미지들은 재현적이면서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기도 하다.



Cris Orfescu, <MicroBall>, Lithium Cobalt Oxide; LixCoO2, archival ink print, 2009 Chris Robinson, <Untitled: Eigler’s Eyes>, digital painting, 2007

▲ (좌)Cris Orfescu, <MicroBall>, Lithium Cobalt Oxide; LixCoO2, archival ink print, 2009
(우)크리스 로빈슨(Chris Robinson), <Untitled: Eigler’s Eyes>, digital painting, 2007



광학 기반의 카메라 기술력과 달리, 나노 기술장치는 물질의 심층부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물질 표면을 스캔하고 그 표면으로부터의 전류 변화를 측정한 다음에 이 변화의 데이터를 이미지 코드로 전환시켜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으로 산출한다. 따라서 나노 규모의 물질은 사실상 평면의 이미지가 아닌 3차원의 입체적인 조각물로 나타나고, 이를 다시 2차원 형상으로 전환하여 디지털드로잉이나 회화 혹은 사진 등의 이미지들로 최종 제작된다. 다시 말하자면, 나노 규모의 실재를 본다는 것은 주사 터널링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이나 원자간력현미경(Atomic Force Microscope) 탐침의 터치에 원자 표면이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감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노아트에서 나타나는 실재의 표면에 대한 촉각적 재현은 실재의 외관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바의 양태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봄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터치가 곧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기술의 개념, 즉 테크네(techné)는 은폐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진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술의 본성 자체는 나쁜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각 역시 참된 것을 취한다는 의미를 지녀 늘 참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지각 자체는 명료하지만, 이 지각과 결합된 판단이 잘못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판단이란 이성의 관념과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인식은 여러 감각들 중에서도 시지각과 가장 밀접하다. 본래 시각은 거리를 요하는 감각으로, 대상과 거리를 두고 대상을 객관화시키는 지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그 자체로서의 본질보다는 거리를 두고 형성되는 객관에 머물게 된다. 시각의 이런 속성은 특히 서구 전통미술사에서 시각 중심의 이미지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작금의 예술, 특히 과학기술과 융합하는 예술은 실재에 관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바, 생각하는 바가 아닌, 온몸으로 체현되고 촉지되는 바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의 지류로부터 출발한 이 융합의 산물들이 우리 앞에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 21세기의 테크네가 과연 감춰져 있던 실체를 밝히고 있는지, 기꺼이 체험해볼 일이다.

전혜현필자소개
전혜현은 대학에서 미디어아트이론과 매체철학 등을 가르치며 미디어이론가이자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창제작센터 매체담론연구랩에서 디지털문화예술현상의 학제간 담론을 연구하고 있고, 기술미디어와 문화예술의 융복합현상과 그 이면에 대해 관심이 많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