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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영화평론가 모씨가 한 말이 기억난다. ‘어떤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기자는 그에 대해 팩트만 쓰면 된다. 평론가는, 대중이 우왕좌왕하며 판단불능에 도달했을 때 개입하여 정리하면 된다’. 평론가의 개입은 혼돈을 정리해주기에 신적인 측면을 부여하는 듯해, 평론을 일삼는 나 또한 이 말을 되뇌어 본다. 하지만 뒤집어 읽는다면 대중은 혼돈을 빚는 무리라 읽히기도 한다. 이 말은 유효한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오늘날 공연예술계에서 이들의 ‘우왕좌왕’은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 게 사실이다. 공연시장은 물론 작품을 파악하는 바로미터로 작동하기도 한다. 즉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하며 종잡지 못함’을 뜻하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의 주체들은 작품 평가에 있어 오른쪽(右)의 왕(王), 왼쪽(左)의 왕(王), 사방의 왕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움직임은 인터넷이나 SNS로 대변되는 의사소통의 매체가 쌍방향 매체로 진화함과 동시에 가속도가 붙었고 이를 이용·활용하는 수많은 플랫폼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들은, 대중은 자신의 취향과 욕망, 주관적인 의견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즉 평론가에 의해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할 이들은 이제 공연을 관람(소비)한 뒤, 평론가들의 게토라 취급되던 곳으로 과감히 ‘터 진입’하여, 이후 ‘터진 입’을 가동하며 수많은 평을, 그것도 자유롭게 쏟아낸다.
대중의 관람평 VS. 전문가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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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구매 사이트 인터파크에는
2014년 4월 22일 현재 뮤지컬 <위키드>에 대한
2,506개의 관람후기와 1,620개의 기대평이
게시되어 있다.
(사진출처_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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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들은 어딘가로 고이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누구나 다 알만한 티켓 구매 사이트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설령 ‘이것을 보겠다’고 목표를 정했어도, 여러 작품(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서 ‘이것’을 보려던 마음이 ‘저것’으로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한 잠재적 관객(소비자)은 구매 시 선택을 놓고 쉬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럴 때, 쿠폰이나 이벤트의 유무를 슬쩍 보게 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하고자 하는 작품에 곁들여져 있는 다른 이들의 ‘관람후기’와 ‘기대평’이 눈에 들어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꼼꼼히 읽어본 그 후기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개인 사연은 물론, 마니아가 남겨놓은 꼼꼼한 평까지. 뿐만 아니라, 사이트가 마련한 초대 이벤트와 함께 연동되는 기대평 또한 익명의 다수가 올리는 글로 가득하다. 특히 이러한 기대평은 마니아적 자세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기대라기보다는 구매사이트가 마련한 초대 이벤트에 당첨되고자 하는 대책 없는 기대평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작품을 선택하는 데에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한다.
다음. 선택의 기로에 있던 그는 결국 이 모든 정보들을 참조하여 소비자가 된다. 그 다음. 관람후기를 참조하여 소비자가 되었던 그는 이어 관람후기 (재)생산자가 되어 또 다른 이에게 ‘관람후기’를 제공한다. 말이 관람후기이지 글의 형태나 내용은 상품 구매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평’과 같은 냄새가 난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서 혜택을 보는 것은 장기간을 목표로 세운 작품들이다. 삽시간에 오르는, 그것도 티켓 판매의 중심지와 같은 사이트에 올려진 사용자(User)들의 리뷰는 잠재적 소비자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공연예술계에서 가속화되면 됐지 축소되지는 않을 듯싶다. 따라서 공연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하나의 긍정적인 트렌드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선해야 할 문제점으로 볼 것인가로 골치를 썩고 있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 시선의 주체는 수많은 공연매체와 그것을 기반으로 움직여 온 전문기자, 평론가들일 것이다. 관객과 작품 사이의 정보를 독점해온 이들은 그 독점권을 더 이상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열린 자세’를 내세우며 이들의 움직임을 이끌어가거나 혹은 자본주의의 젓줄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술인과 수용자들이 일정한 정도로 합의된 비평적 잣대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대중. 이런 긍정·부정의 현상이 있기까지의 원인은 다양하다. 구매력 있는 소비자의 증대와 미디어의 발달, 다매체 시대에 이르러 정보의 흐름이 다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관객인류학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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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창간 30주년을 맞이한
월간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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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의 승승장구는 한쪽의 부재 혹은 죽음을 낳는다. 전자가 ‘관람평’으로 대변될 수 있는 대중의 ‘말’이고, 후자가 공연 전문 매체들의 ‘전문가 리뷰’ 혹은 ‘전문가 프리뷰’로 대변되는 전문가들의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대안은 공연시장을 횡단하고 작품의 생존을 결정하는 대중보다는, 세력이 밀리는 공연 매체들의 자세 전환에서 찾아야 할듯 싶다. 그간 공연예술을 둘러싼 생태계는 생산자 중심이었다. 연극, 무용, 음악 등 ‘순수예술’ 혹은 ‘본격예술’로 불리던 장르에서 ‘전문지’라는 이름을 단 공연 매체가 주요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작품, 작가와 같은 생산 지점과 주체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공연예술 매체들은 정보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었고, 시대와 관객의 요구,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자신의 안목을 소비자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매체는 작품, 작가와 더불어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의 존재와 그 생태계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 순수예술에서 수용자의 중요성이 남다르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스타덤’이라는 용어 대신 ‘팬덤’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마니아라 분류할 수 있는 열혈 애호가들은, 특정한 예술 경향의 존립을 좌우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들어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이 공연 소비를 통해 문화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미디어의 발달과 다매체 시대로의 진입 또한 관객이 주도하는 정보의 흐름을 다변화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이 더욱더 두터워진 지금. 이제는 작품과 그것을 생산하던 ‘밀실’을 향한 시선을 관객이 위치한 ‘광장’으로 옮겨하며 그들이 일구는 생태계까지 담아내야 한다. 무대를 향한 일방적인 시선의 반경을 넓혀 관객석까지 살필 수 있는 파노라마적인 시선. 인류학에 비유하자면 ‘관객인류학’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소문의 위기도 담론의 위기만큼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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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전문가 꽃점
+20자평 (사진출처_[연극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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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대한 의존이 높아진 것은 관객뿐만 아니라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시장에 의존하면서 당연히 대중성 등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시장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강력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게 사실이다. 작품, 예술가와 시장이 밀착되고,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은 물론 공연 선택에 있어 상업적인 방법으로 그 선택을 몰고 가는 자본주의적 프리뷰 문화 또한 활발해질 것이다.
한편, 작품(상품) 선택과 관람 행위 그리고 리뷰에 있어 더 이상 활용되지 않는, 그래서 위협과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공연 전문 매체들은 ‘담론의 위기’라는 ‘위기의 담론’을 내놓으며 나름대로의 타개책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보다 주밀한 전문성의 추구를 통해 비평과 전문화된 공연 저널리즘을 만들어나가고자 하거나, 기자나 평론가가 아니면 범접할 수 있는 공연 현장의 풍경을 담기 위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자면, 창작자를 중심으로 다루던 매체가 앞서 논한 ‘관객인류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특정 작품을 놓고 특정 개인이나 매체가 아닌 다중의 입과 입으로 전파되는 ‘소문’은, 근거 없는 말이라도 해도 미래의 공연계를 위한 ‘관객인류학 보고서’의 한 페이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현실이며 부정할 길 없는 자본주의에 놓이는 공연 작품의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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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송현민은 음악평론가로 음악 듣고, 글 쓰고, 음악 하는 사람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이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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