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아카이브란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물과 이것을 보관하는 장소나 관리하는 기관을 지칭한다. 대량생산해 유통되는 구입 자료와 달리 창작 과정에서 산출되는 자료는 예술가의 상징, 암시, 은유가 반영된 비유통 자료로 유일한 원본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물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커지면서 아카이브 열병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유행처럼 번지고,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경향까지 보이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국가적 지원이 미미하고, 정책도 부재하며, 체계나 구조도 전문화되어 있지 않은 빈곤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예술가보다 더 예술적,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게 바로 예술 아카이브다. 점차 국가적 지원이 확대되고, 제도와 정책도 마련될 것으로 전망하며 몇 가지 사례와 제언을 덧붙인다.

예술은 영원하고, 공연은 순간이다.

공연예술은 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완성하는 예술이다. 전시가 끝나도 미술품이 남는 것과 달리, 공연은 막이 내리면 온전한 실체는 휘발되어 버리고, 파편화된다. 현장성, 순간성, 일회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철저한 협업의 결과물이다. 실체가 사라지는 시공간 예술이기에 기록이 당대의 미학, 양식, 실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이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공연예술 기록은 제작 과정에서 생산되는 자료, 개인이나 조직 활동 자료, 연구 자료, 평가 자료, 행정 및 정책 관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제작(무대화) 단계에서 기획서, 대본, 악보, 무보, 연출대본, 연출노트, 안무노트, 도면, 스케치, 무대 모형, 제작 및 연습 일지 등이 생산되고, 공연 단계에서는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 음악, 음향, 사진, 프로그램, 포스터 등의 자료, 공연이 끝나면 각종 평가 자료, 실물 자료(무대, 의상, 소품 등), 상패, 기념품 등이 남겨진다. 더불어 연구, 교육, 행정, 유통, 단체의 발간물, 구술 기록, 육필 원고, 서신, 애장품, 방명록 등도 포함된다. 이들 중 역사적, 예술적, 정보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선별해서 영구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공연예술 아카이브의 주된 임무이다.

박용찬이 기증한 르네상스 다방 자료(음반, 오디오 등 약 1만 3천여 종), 김태랑이 기증한 1920~1950년대 악극 대본으로 디지털화를 위한 상태 점검 모습, 국립예술자료원 소장(왼쪽부터)


▲ 박용찬이 기증한 르네상스 다방 자료(음반, 오디오 등 약 1만 3천여 종), 김태랑이 기증한 1920~1950년대 악극 대본으로 디지털화를 위한 상태 점검 모습, 국립예술자료원 소장(왼쪽부터)

연간 1만 4천여 건 공연,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대디자이너 박동우의 뮤지컬 <영웅>(2008) 스케치, 국립예술자료원

▲ 무대디자이너 박동우의 뮤지컬 <영웅>(2008) 스케치, 국립예술자료원 소장

2013년 문예연감(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발간)에 따르면 2012년의 공연 건수는 14,628건, 공연 횟수는 63,251회다. 연극 3,552건(47,781회), 무용 1,471건(3,188회), 국악 2,100건(3,984회), 양악 7,505건(8,298회)이다. 2012년에만 공연 건수가 1만 4천여 건에 이른다. 아카이브 기관의 수집 범위를 100년 내외로 볼 때 수집 대상은 어마어마한 규모가 된다. 그런데 공연예술 기록물을 수집하는 기관은 기껏해야 8개 정도고, 그중 절반은 민간 기관으로 사재를 털어 운영하고 있어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한정된 공간, 예산, 인력으로 기능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 전략은 필수다. 의도적으로 역사적, 예술적 맥락에서 중요한 자료를 선별해서 컬렉션을 구축해야 한다. 예술성, 유일성, 원본성, 희귀성, 대중성, 역사성, 시급성, 효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 아카이브는 개인의 활동, 체험, 기억을 역사화, 공공 자원화하는 일이고,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중심에 위치하며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수집 정책은 더욱더 중요하다.

무용가 임성남 기탁 자료, 국립예술자료원(왼쪽부터)/이진순 <갈매기> 연출대본(1983), 김의경 기증, 국립예술자료원

▲ 무용가 임성남 기탁 자료와 김의경이 기증한 이진순의 <갈매기> 연출대본(1983), 국립예술자료원 소장(왼쪽부터)

8개 국내 기관,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

서울연극센터 정보자료관 내부 모습(자료제공: 서울연극센터)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 전경

▲▲ 서울연극센터 정보자료관 내부 모습
(사진제공_서울연극센터)
▲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 전경

국립예술자료원은 197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예술자료관을 전신으로 한다. 연극, 무용, 음악, 시각, 전통, 문학, 다원, 예술 일반 자료까지 다루는 다원형 종합아카이브 기관이다. 대본, 영상, 구술 기록, 사진, 무대 자료 등 총 60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약 30만 점을 등록해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획 수집으로 예술인 구술채록 사업, 공연 실황을 기록하는 영상제작 사업, 무대미술 컬렉션 구축 사업 등이 있다.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DA-Arts)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② 국립국악원 국악아카이브는 전통예술 관련 자료의 가치 재생산 및 문화 자원의 가치 확대 등을 목적으로 2007년부터 전통 음악, 무용, 연희 및 창작 분야의 자원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1951년 국립국악원 개원 이래 현재까지 공연, 연구, 교육 등 자체 생산 자료와 외부 기증 자료를 포함해 약 20만여 점의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고, 약 36% 등록, 약 28% 변환을 완료했다고 한다. 故이혜구, 故김천흥 등 30여 개의 컬렉션을 구축하고 있다.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은 2009년 12월 개관하였다. 공연영상, 대본, 사진, 프로그램 등 20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고,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등 국립예술단체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공연예술자료실, 수장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정에 따라 자료의 납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④ 서울연극센터 정보자료관은 2007년 11월 개관하여, 단행본, 연속 간행물, 영상, 프로그램 등 1만 9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아카이브 성격도 일부 있으나 소통과 매개의 창구로 기능하는 감상 공간이자 정보 제공처라 하겠다. ⑤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은 김흥우 교수가 평생 모은 자료를 기증하면서 2008년 개관했다. 극장, 도서관, 전시장, 수장고, 촬영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탈, 인형, 공연영상, 무대미술자료 등 25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고, 디지털 아카이브(스마트 박물관)를 운영하고 있다.

국악음반박물관은 2001년 개관, 각종 희귀 음반, 문헌, 사진, 영상, 악기 등 약 6만 4천 종(20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⑦ 연낙재는 2006년 무용평론가 조동화 선생의 자료 기증을 통해 개관하였고, 자료 발굴, 수집과 더불어 세미나, 기념행사, 학술연구 및 발간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⑧ 한국춤문화자료원은 2007년 김천흥 선생의 자료 기증을 계기로 개관하였다.

해외 기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뉴욕 공연예술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 for the Performing Arts)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에 걸맞게 광범위한 수집 대상을 지향하나 이용자 그룹별로 연구 컬렉션과 대출 컬렉션을 분리하여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있다. 인쇄 자료가 30%에 불과해 &lsquo;책이 없는 도서관&rsquo;으로도 불린다. 연극, 무용, 음악, 마술, 라디오, 방송, 행정 등 다양한 컬렉션을 구축하고 있고, TOFT(Theatre on Film and Tape Archive)를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술가, 연구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②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공연예술컬렉션(V&A Theater & Performance Collection)은 런던 극장박물관의 자료가 고스란히 이관되면서 컬렉션 구성이 강화되었다.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영국 공연예술사 자료를 망라하고 있고, 무대디자인실, 의상전시실, 분장전시실, 창작전시실 등 9개 전시실에 다양한 유형의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③ 와세다대학 연극박물관(The Tsubouchi Memorial Theatre Museum)은 1928년 건립된 아시아 최대의 연극 박물관으로 2003년에는 산하에 &lsquo;21세기 COE 연극연구 센터&rsquo;를 두어 연구 기능을 강화했다. 특히, 연구원 제도 운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3년을 임기로 박사급 연구원 5명을 두고 있다. 3년 동안 자료 조사, 수집, 연구를 진행하고, 전시를 열어 성과를 공유한다. 3년마다 연구원을 새롭게 채용한다는 것은 3년을 주기로 주제 수집이 진행된다는 의미다.

몇 가지 제안, 몇 가지 제언

우선, 국가적 차원에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납본 제도를 의무화해야 한다. 공연예술 아카이브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므로 국공립극장, 문화재단 등에 기록연구사나 아키비스트를 의미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또한 기관의 성과를 평가하는 틀을 바꿔야 한다. 기록물 관리란 자료 수집, 분류, 정리, 이관, 평가, 폐기, 보존, 공개, 활용 등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기관의 성과를 &lsquo;수집량&rsquo;으로 평가하는 것은 기록물 관리의 전문성과 완결성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파괴된 것을 빠르게 복원하고 복구하고자 욕망이 습관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수집해서 어떻게 분류, 정리하고 있고,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총제적인 점검과 검증이 필요하다. 수치로 평가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자 자신감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자료 발굴, 기획 수집 확대, 콘텐츠 큐레이션 기능 강화, 차별화 전략이 요구된다. 또한 도서 관리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공연예술 기록물에 대한 표준화된 체계를 공동으로 개발해 인적, 물적 낭비를 줄여야 하고, 디지털 아카이브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자료의 복원과 정보의 질적 제고 노력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당연히 기관 이기주의를 버려야 하고, 예술가와 현장의 목소리를 반드시 청취해야 한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기록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카이브는 창작, 연구, 교육을 위한 것이지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술가, 연구자, 행정가 등 각 개인은 아카이브가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는지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기록은 후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함께 가야 변화를 이끌 수 있다. 현장이 없으면 공연예술 아카이브는 존재할 가치도, 이유도 사라진다.

사진_김현옥 필자소개
김현옥은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했고, 몇 년간 대안학교와 대학을 오가다 2008년 국립오페라단에 입사해 오페라의 묘미를 알아가던 즈음, 2010년 국립예술자료원으로 이직해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공연예술분야 담당 학예사로 공연예술자료의 수집, 평가, 해제 업무와 함께 &lsquo;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rsquo;을 총괄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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