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더위다. 장마를 기다려 본 것도, 찬물로 아무렇지 않게 샤워를 하게 된 것도 이번 여름이 처음일 만큼. 그러나 손꼽아 기다렸던 장마는 오지 않았고 마른장마 후엔 한층 더 강력해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선풍기로는 부족하고 에어컨 바람은 싫을 때, 내가 찾는 피서지는 바로 극장이다. 극장에는 장소를 불문하고 극장 특유의 음기와 한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무더위를 날릴 몇 가지 오싹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자꾸 이상한 노래가 나와요
이것은 대학시절 내가 겪은 이야기다. 공연 이틀 전, 테크니컬 리허설 도중에 음향 오퍼가 자꾸만 같은 부분에서 실수를 했다. 지금이야 큐랩으로 음향 큐는 물론이고 볼륨이나 페이드인, 아웃까지 한꺼번에 조절할 수 있지만 그때는 우직하게 시디와 데크를 쓰던 때였다. 혼자서 데크 두 개를 번갈아 가며 플레이를 누르고, 콘솔까지 동시에 조정하려면 어느 정도의 연습이 필요했기에 잦은 실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몇 차례다. “자자, 다시 갑시다.” 곧이어 배우들이 다시 연기를 이어가고 문제의 큐대사가 나오고 음향이, 또 틀렸다. “이거 아니잖아. 전화벨이 울려야지 왜 자꾸 레퀴엠을 틀어!” 곧바로 음향 오퍼가 “죄송합니다”를 외쳤다. 이제 드디어 전화벨이 울려야 하는 찰나, 또 다시 레퀴엠 나오자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왜 그래?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음향 오퍼가 조정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울먹이며 말했다.
“연출님, 죄송한데요. 계속 벨소리 트랙을 틀었는데 자꾸 이상한 노래가 나와요.”

그 순간 여배우 몇 명이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무대 정중앙의 조명 하나가 터졌다. 극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모두들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배우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는 사이 조명 팀이 깨진 전구의 파편을 치우고, 조명기의 전구를 갈았다. 그러고 보니 잘못 흘러나온 노래는 원래 음향 목록에도 없는 레퀴엠이 아닌가. 그 생각이 들자 순간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조정실로 올라갔다. 1번 트랙부터 차례차례 플레이를 해보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디에도 데크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리허설이 다시 시작됐고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문제의 큐타임이 왔다. 그리고는 역시나 으스스한 레퀴엠이 극장을 감싸고 아까와 똑같은 조명이 퍽! 터져 버렸다. 우리는 그 즉시 뭔가에 쫓겨나듯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2. A형 귀신
다음은 연출가 J가 겪은 실화를 1인칭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몇 달 전, 대학로 연습실에 연습을 하러 갔는데 멀리 연습실 복도까지 매우 유려한 피아노 선율이 들렸다. 막내 여배우가 다른 오디션 준비를 위해 연습 전에 늘 피아노 연습을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피아노 실력이 상당한데?‘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여는 순간 연습실은 텅비어있었고 동시에 피아노 소리도 그쳤다. 그 순간 뒷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느껴지며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아, 깜짝이야.”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잘못 들었길 바라며) 다른 연습실들의 문을 차례대로 열어보기 시작했다. 보통 대학로 연습실 전체가 한꺼번에 비는 일은 드문데, 그때는 연습실 전체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늘 자리를 지키던 연습실의 직원들조차도. 무서워진 나는 연습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길가에서 팀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배우와 스태프가 다 모이고 나는 오늘 겪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팀의 절반 정도가 이 연습실에서 나와 똑같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무대 디자이너는, 자기는 그냥 누가 피아노를 굉장히 잘 치는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게 귀신인줄 몰랐다며 뒤늦게 벌벌 떨었다. 실제로 피아노 연습을 했다던 여배우에게 물어보니 자신의 피아노 실력은 유치원생 수준이라는 말로 모두를 또 한 번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날 연습을 일찍 접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 이 중 절반만이 귀신의 연주를 듣고 나머지는 듣지 못한 걸까에 대해, 나름 진지한 추리들이 오고갔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한 가지 객관적 사실을 발견했다. 피아노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A형이라는 것. 그 후로 우리는 대학로 연습실 귀신을 A형 귀신이라 불렀다.

#3. 여배우 K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제작자 S에게 들은 유명 여배우 K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실명을 밝히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K는 연극영화과 입학 전부터 이미 유명한 아역 탤런트였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곧잘 했던 K는 학교에서 시샘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 K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귀신이 보인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주목 받고 있음을 잘 아는 K였기에 함부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불쑥불쑥 나타나는 귀신 때문에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늘어난 K를 두고 주변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이상한 모양새로 몸을 불리기 마련이기에 K는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일 친한 동기에게만 고민을 고백했다. 그런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K의 동기는 “쟤, 귀신 본대.” 하고 너무도 쉽게 K의 비밀을 퍼트려버렸고 K는 상처를 받았다. K를 부러워했던 아이들은 처음엔 귀신도 예쁜 사람 눈에만 보이냐며 놀리다가 나중에는 주목받고 싶은 K가 지어낸 거짓말로 치부해버렸다. 그 후로 K는 귀신 때문에 놀랄 때도 가능하면 놀라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더 조심하게 되었다. 행여 놀란 표정이 드러나서 누가 물어봐도 아냐아냐. 하고 넘어가는 습관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학교 공연의 여주인공을 맡게 되어 최종 리허설을 하던 중이었다. 심각한 장면에서 갑자기 극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귀신이 보였다. 귀신은 모습을 드러내는걸로 그치지 않고 K의 머리카락을 잡으려는 듯 양손을 마구잡이로 K에게 뻗치고 있었다. 놀라고 당황한 K가 순간 “아이 씨, 그만 좀 해!” 하고 크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로 인해 연습은 중단됐고, 무대 위에 있던 모든 배우들은 너무 어이없어 화도 못내겠다는 표정으로 K와 학생 연출을 번갈아 쳐다봤다.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하던 학생 연출은 뭔가 급하게 메모를 하고 있다가 배우들이 대사를 멈추자 고개를 들어 무대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K를 향해 있자 학생 연출도 K를 쳐다보았다. S는 학생 연출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누가 실수했다고 해서 런쓰루 도중에 끊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제 K는 죽었다,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연출가가 K의 머리 위를 슥 보더니 “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습을 이어가더란다. 그 후로 아이들은 K의 말을 믿게 되었고 K는 그때 그 학생 연출과 꽤 친해져 고민 상담을 하고는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신이 무섭다 한들 어찌 산 자에 비할 것인가. 날이 갈수록 극악무도한 사건 사고를 접하며 불쾌지수가 오르는 요즘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은 줄줄 흐르고, 창밖의 매미들이 죽을 힘을 다해 울면 나는 오늘도 극장으로 간다. 공연예술인에게 있어 귀신보다 무서운 것은 공들여 준비한 공연의 객석이 텅 비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피아노 소리와 레퀴엠을 듣고 시원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자리 차지한 채 내 머리카락쯤 얼마든지 잡아당기라고 내어주고 싶은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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