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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조성(fund)이라는 연못(pond)에서 부유하는 조각들 맞춰보기
리뷰_큐레이터를 위한 전시기획 재원 조성과 활용지난 2월 24일, <큐레이터를 위한 전시기획 재원 조성과 활용>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공개 강연 자리에 꽤 이색적인 조합의 기획자들이 함께했다. ‘기획자’라는 말을 협소하게 정의 내리지 않는다면, 이날 초청된 네 명의 연사들은 각자의 리그에서 촉발된 기획 아이디어를 실천하기 위해 유무형의 자원을 창출하고 새로운 판을 짜나간다는 점에서 젊은 기획자요, 문화생산자로 묶여진다. ‘젊다’는 수식어를 일부러 덧댄 이유는 이들 모두 동시대 예술현장에서 문화적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해나가면서 재원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돌파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강연을 위해 멀리서 날아온 휘트니미술관의 기업협력 디렉터인 유니스 리(Eunice Lee), 기업들과 협력관계 속에서 다채로운 대중적 콘텐츠를 생산해 나가고 있는 엠허스트의 최진한 대표, 최근 몇 년간 공공기관과 기업 사이를 오가며 분주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박경린 큐레이터, 마지막으로 개발자와 아티스트 출신으로 최근 현대자동차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에서 다양한 예술후원 프로젝트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김태윤 과장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어볼 수 있었다.
본 행사의 청중은 재원 조성과 운영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전략들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신진기획자 그룹, 그리고 문화예술 현장에서 활발하게 뛰고 있는 실무자들이 포함되었다. 네 시간이 넘게 진행된 길고도 밀도 높은 강연이었지만, 이탈하는 관객 없이 시종 진지한 경청과 격의 없는 질의가 이어졌다. 단순히 ‘재원조성’에 대한 현장의 노하우와 직업적 매뉴얼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자리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예술기관과 협력기업, 기획자들이 각각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와 창출방식들, 그리고 만일 예술기획에서의 특수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재원 조성이라는 현실적 영역과 어떻게 접속되고 실현되는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청취하고자 하는 열망이 상호 교차된 자리가 아니었을까.
예술 기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없었던’ 돈도 미래에 ‘있을’ 혹은 ‘있어야 할’ 돈으로 설득해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기획자들과 에이전시, 미술관과 기업 내부의 재원조성 담당자들이 들려주는 ‘예술과 돈’에 관한 각자의 이야기들은 서로의 아귀와 조각들이 이어지고 모여, 비로소 전체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휘트니미술관에서 기업협력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유니스 리의 강연 소식은 여러모로 안팎의 기대를 모았다. 가장 미국적인 미술관으로 언급되는 휘트니의 중심에서 일하며 기업들을 대상으로 후원 협력을 이끌어 내고 있는 한국계 미술 전문가에 대한 관심, 그리고 기업협력 큐레이터라는 직제에 대한 호기심이 일정하게 투영됨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미술관 건립의 역사가 견인해 온 미국미술 만들기의 신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던 기업의 기부와 협력 시스템에 대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얼마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미술관 펀드레이징에 대한 현재형, 그리고 미래형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첫 발표를 맡은 유니스 리는 휘트니미술관의 설립자인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근 한 세기에 걸쳐 전개되어 온 휘트니의 증축과 확대의 연혁, 그리고 그때마다 요구되는 대규모 기금 조성의 소사를 압축적으로 들려주었다. 미술관에 기부되는 기업의 돈은 위로부터의 조건 없는 시혜가 아닌 미술관 측의 기부자 조사와 잠재적 파트너 분석, 구체적인 목표 설정과 대중적 캠페인에 의해 견인되는 흐름이다. 펀드레이징 활동의 결과로서 모금된 기부금이란 즉각적인 ‘기브 앤 테이크’의 산물이기보다, 공공의 미래가치 아래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일종의 ‘선물거래’로서 작동할 때 최대치의 쓰임새를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미술관 내부의 전문적 모금 기법과 마케팅 전략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시장과 기업의 기부행위가 균형 잡힌 삼각 리더십을 이룬다.
내부로부터 창출되는 재원 조성을 위한 미술관의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 다각적이며 구체적이다.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경매 진행, 기업 맞춤형으로 진행되는 콜라보레이션, 최근 가장 위력적인 SNS를 통한 캠페인 등 여러 사례를 들으면서 성공적으로 구동되고 있는 그들의 시스템이 못내 부러워진다. 기법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데 적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발표에서 시사점을 찾는다면 기관이 가진 고유의 역사성과 차별적 메시지들이 구체적인 제안들 안에 자연스레 포개어질 때, 광활한 생태계 안에서 궁합이 맞는 대상을 발굴하고 선별해 나가는 펀드레이저의 촉수라는 것도 위력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발표의 마지막 부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어제의 역사와 성취에 도취되지 않고, 점점 더 다양하게 분화 중인 지금 세대의 관람객에 대한 분석, 시선을 옮기는 비단 미술관만의 이슈는 아닐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비롯해 세계적 명품 하우스의 트래블링 전시 실행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엠허스트는 대중들과의 접면이 넓은 아트 프로젝트와 전문 마케팅을 해오고 있는 기획사다. 몇 해 전 폭발적 관심을 모았던 러버덕 프로젝트의 국내 대행사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프로젝트 출발에서부터 실행까지 아마도 적지 않은 투자금과 기업 마케팅이 집중된 사례로 받아들인다면 섣부른 접근일까. 그러나 분명 전시가 생산되는 조건과 규모가 상이한 만큼, ‘재원조성’ 또한 미술관 내부에서 기획된 공공 전시나 문화예술기금을 주된 양분으로 하여 진행되는 기획전들과는 다른 틀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본래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하다 문화마케팅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일하고 있는 엠허스트 최진한 대표의 이력을 반영하듯, 이날 강연을 구성하는 화법 또한 남달랐다. 식스 시그마, SIPOC(공급자(Supplier), 투입(Input), 프로세스(Process), 산출(Output), 고객(Customer))과 같은 경영적 접근과 프로세스를 통해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펀드레이징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설명되었다. 일을 진행하는 점은 비슷하지만, 대체로 통제 가능한 규모 안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해 나가는 개인 기획자들과는 프로젝트의 대중적 임팩트와 결과로서 드러난 경제적 지표에 대한 접근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엠허스트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프로젝트 개발과 실행은 조직 내부에서부터 자유롭게 제안은 하되, 치열한 토론과 동료들 간의 검증을 통해 탄생한다고 한다. 아주 간결하고 분명한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목표 설정과 즉각적인 제안과 설득이 담긴 소통방식이야말로 일을 제안하는 실행자에게도, 투자를 제공하는 클라이언트들에게도 핵심적인 동력이 됨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직의 경험이 쌓이고 성장하면서 기획사로서 진행하는 업무의 외연 또한 국내를 넘어 지속적으로 이동, 확장되고 있어 엠허스트의 앞으로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한 곳에 정박하지 않고, 매번 달라지는 상황과 조건 속에서 기획자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는 박경린 큐레이터의 강연은 신진 기획자들을 포함한 다수의 청중에게는 아마도 가장 가깝고도, 한편으로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전달되었을 것 같다.
박경린 큐레이터는 다양한 파트너들과 일하면서 기획자가 맡게 되는 역할을 크게 통역가, 이야기꾼, 그리고 제작자 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전시를 제안하거나 제안받아 구체화 시켜가는 과정에서 재원과 행정적 협력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더군다나 개인 기획자가 크고 작은 전시를 끌고 나가면서, 상대가 요구하는 지점들을 충족시키면서도, 더 좋은 전시의 결과를 담보해 나가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쟁취해가는 과정이 녹록지 않은 일임이 분명해 보인다. 기업과 작가 사이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위기 대응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요구되는 역할 실험과 방법론의 창안이라는 것이 기획자 자신에게 정작 놀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다양한 일과 사건들 속에서 탄력적으로 대응해나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박경린 큐레이터가 들려준 기획의 궤적들은 역동적이었고, 때에 따라 이질적인 사건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지드래곤과의 협업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피스 마이너스원> 같은 경우는 서울시립미술관과 YG엔테테인먼트의 협력 구조 속에서 진행된 전시였고, 최근 이삼 년간 공공 영역에서 해 온 전시들은 대체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해외 한국문화원들과 협력하여 만든 외교적 지향점이 뚜렷한 순회전의 모습이다. 또 다른 축에서 진행된 전시들은 오롯하게 큐레이터 자신의 관심사가 투영된 개성 강한 기획전의 양태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미 확보된 재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일, 혹은 없던 재원도 새롭게 발굴하는 일 모두 오직 개별적인 사례 안에서만 통용되는, 정답이 없는 문제지와 같은 것이다. 결국 전시가 이루어지는 물적 토대도, 그 안에서 요구되는 기획자의 역할도 번번이 바뀌니 말이다. 때문에 작가와 기관, 기업 사이에서 서로의 언어를 해독하여 전달하는 일, 해독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내러티브를 창출하는 일, 나아가 프로듀서로서 제작에 개입하는 일이 필요함을 자신이 해왔던 여러 타래의 궤적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 강연은 김태윤 현대자동차 브랜드전략실 과장으로, 기업 내부에서 미술관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매개역할을 맡고 있어 앞서 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김태윤 과장의 이야기에 경청할 수 있었던 특이점은 그 자신이 이전에 다양한 후원과 협력관계 안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동시대 젊은 작가였고, 작가 이전에 국내 최대의 포털과 통신사에서 IT 개발자로 일해왔던, 가파른 역할 전환과 상호교감이 가능한 위치에서 발생한다. 그런 이유에서, 이날의 강연은 조직을 대변하여 성공사례를 홍보하는 프레젠테이션의 전형을 슬쩍 비껴간다. 오히려 지금까지 아트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미술후원의 성과와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식과 딜레마, 희망과 고민의 양날을 동시에 내보이는 자리에 가까웠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대자동차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자사의 이름을 내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10년 단위의 후원 관계를 맺고 있으며, 테이트모던(Tate Modern)과 LA카운티미술관(LACMA)과도 협력관계에 있다. 또한, 최근에는 시드니 비엔날레(Biennale of Sydney)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같은 대규모 국제미술전도 후원하고 있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가 실현될 수 있는 대기업이기에 가능한 장기협력이자 통 큰 투자방식인 셈이다. 최근에는 미디어아트 분야의 작가들을 키워내려는 어워드 프로그램을 비롯 새로운 미술후원 프로젝트들이 내부검토 중이다. 김태윤 과장의 표현을 빌자면 기존의 포석들이 종횡으로 좌표를 이루고 있는 ‘바둑판’에서 빈 곳을 찾아 좀 더 지엽적이고 특수한 접근방식의 후원과 마케팅이 모색 중에 있다. 거대 예산이 투입된 장기 후원 방식이 놓치고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 관객, 예술계 전문가, 새로운 협력 채널에 대한 탐색을 통해 현대자동차의 아트 프로젝트들의 위치 조정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강연 후 쏠렸던 질문들의 요지는 결국 기업의 예술후원이 실제로 판매 증가에 기여하는지, 기업의 브랜드가치 상승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ROI(return on investment), 즉 ‘증명’에 관한 문제로 수렴된다. 현대차의 경우, 많은 프로젝트들이 여전히 초기단계이므로 즉각적인 ‘결과값’들이 산출되기 어렵다. 또한 일반적인 접근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들이 존재하고, 투자와 회수 사이의 중간 변수들이 많아 인과론을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증명할 수 없는 그 미래 가치들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다른 일도 아닌, 미술관 협력과 작가 후원이라면 그 어떤 불투명한 세계라도 환영할 일이 아닐까.
네 명의 강연자들이 들려준 특수한 사례들의 조각들을 이어 맞추다 보면 오늘날 예술 생태계를 축도하는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진다. 서로 흩어져 보이는 조각들을 맞추는 데에는 약간의 상상력, 그리고 예술과 돈이 교차하는 몇 가지 함수를 그려볼 수 있는 경험치가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프로젝트의 큰 그림과 디테일, 변수와 상수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재원을 생산-소비하는 기획자들의 역량이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펀드(Fund)’가 조성되고 유동해온 그간의 시스템과 판이 여전히 ‘연못(Pond)’ 수준의 깊이와 너비를 넘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적으로 헤아려 보게 된다. ‘대양(ocean)’에서라면 공공의 기금이나 기부금이 우연히 ‘사냥’ 되거나 ‘얻어걸리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특정 주체에 몰리거나 아귀다툼을 할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예술적 경험과 증거에 기반을 둔 체계적 분석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사회적 격려다. 넓고 깊게 펼쳐진 세계 안에서 탁월한 아이디어들이 더 큰 물결과 합류해 시원하게 퍼져나가는 지점을 상상해 본다.
조주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다원예술축제와 미술전시 분야에서 기획자로 일해왔다. 최근 몇 년간은 주로 동시대 예술가들이 처한 새로운 창작 환경과 방법론의 변동 지점들을 조명한 전시를 선보여왔고, 기획자의 자율적 조사연구 활동과 쟁점들이 작품생산과 전시로서 ‘프로그램’화 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2의 공화국>(아르코미술관, 2013), <리서치,리:리서치>(탈영역 우정국, 2016)전과 <동백꽃 밀푀유>(아르코미술관, 2016)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