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낭독회가 출몰한다. 출판사가 신간 출간을 기념으로 행사를 기획할 때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기도 하고, 수많은 책이나 문학과 관련한 페스티벌 행사에서 낭독은 빠질 수 없는 레시피가 되기도 한다. 인문학 포럼이나 세미나에서도 낭독은 토론이나 논쟁 이후 부드럽게 코스 요리처럼 등장한다. 아예 핫(hot)한 스팟(spot)에 카페를 차려놓고 잘 안 나가는 귀사의 책을 할인이나 덤핑으로 팔아가며 정기적으로 낭독회를 기획하는 출판사도 늘어가고 있다. 판만 벌리면 언제든 우리의 주인공인 작가는 메인 게스트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작가 파워가 조금 밋밋할 때 언더그라운드 밴드나 말솜씨 좋은 게스트 몇 명을 붙여주면 시간은 금방 흐르고 관객은 찰떡처럼 붙는다. 부끄러워하던 작가들도 자신의 책 몇 페이지를 진정성 있게 들려주고 이것저것 책 속에 숨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독자들이 흠뻑 젖는 것을 보고, ‘그래 교감은 이런 거였지…’라며 골방에 갇혀 창작으로 외로웠던 자신을 정서로 동요하기에도 낭독회는 효과 만점이다. 낭독회는 삐라가 되어 처방전처럼 SNS 필터를 통해 도시 곳곳에 뿌려지고 힐링이나 치유제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시의 기획자들은 모두 의심하지 않는다. 독자 입장에선 사인받을 책을 들고 와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작가의 ‘쌩얼(?)’을 바라보고 낭독하는 입술을 따라가며 몽상에 빠지기에도 낭독회는 그만이다.

출판사 입장에선 이런 고객들의 충성심을 상대로 출입구에 ‘오늘의 책’을 쌓아두고 현장 판매를 통해 매출을 보강한다. 며칠 후 온라인 구매 판매 게이지가 올라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마케터는 인터넷 서점에 끊임없이 매물을 던지고, 인터넷 서점은 중매자로 나서서 잘나가는 작가와 책 사이에 티켓으로 다리를 놓으며 팔 걷어붙이고 홍보를 돕기도 한다. 낭독회는 책이 안 팔리는 스마트 시대에 대중이 문학이나 독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폼 나는 인문학적 아날로그 행사로 점점 확산되는 모양이다. 책도 살리고 작가도 알리고 모두가 윈-윈(win-win) 할 수 있는 낭독회 프로젝트는 이제 자기개발서나 타 분야 책 관련 기획자나 마케터들에게도 침을 흘리는 필수 아이템이다. 책이 이렇게도 안 팔리고 영상과 미디어에 주눅 든 문학이 절뚝이는 시대에 작가도 이렇게라도 해서 몇 권 팔아주니 면피는 하는 셈이어서 출판사와 작가의 새로운 공존 방식이라 불러도 좋겠다.

낭독회에 익숙하지 않아서 독자를 만나는 방식이 서툴러도 금세 익숙해진다. 사회자가 오늘의 순서를 설명하고 오프닝은 뮤지션으로 시작하며 클로징은 관객이나 독자의 질의응답, 그리고 작가 사인회로 오늘의 행사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마무리하면 되니까. 대형서점에서 가면 매대에 서서 책을 고르는 손님들을 향해 방송으로 "잠시 후 ㅇㅇㅇ작가의 낭독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안내하는 것도 익숙해져가는 패턴이다. 오늘의 초청 작가는 관객도 없는 자리에 미리 가면 뻘줌하니까 뒤로 돌아가 담배를 피우며 행사를 기다린다. ‘한 시간만 버티면 일당이 나오니까. 강연회보다 더 모양도 나고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대충 이런 식으로 자신과 합의를 보기도 한다. 글을 써서 밥을 짓는 내 경우에만 하더라도 어림잡아 일 년에 10여 차례 이상 낭독회에 초청받거나 낭독회 기획을 의뢰받곤 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런 행사들을 치르고 나면 어색하다. 어디서 오는 심사인지 몰라도 어느 때는 행사를 마치고 줄행랑을 친 적도 있다. 낭독이 이벤트 항목이 된 참담한 기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람쥐는 사라지고 청솔모만 득실거리는 문화 생태계

시(詩)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를 중얼거리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홍대의 클럽이나 카페에 몇몇이 모여 본격적인 낭독 모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홍대 살롱문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상수동 이리카페의 주인장들과 단골들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자주 모여 써온 시를 서로 읽어주었고 들어주었다. 그림쟁이, 음악쟁이, 글쟁이, 화장실 낙서쟁이, 언더밴드 클럽 주인장, 카페 주인들, 오뎅 장사하는 사람, 신문배달부, 야쿠르트 지점장, 자전거 수리공, 문신을 해주고 먹고사는 친구, 연극쟁이, 다큐멘터리 종사자, 잡부 등 서로가 관객이고 주인공이 되어 모국어를 즐겼다. 물론 그때에도 게릴라적인 형태의 낭독 모임은 여기저기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선구적인 형태의 낭독 모임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임이 빈번했다면 나는 게으르지는 않은 편이고 기웃거리는 것에 워낙 관심이 많아 한 편(?)이 되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나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내 주변에는 시를 열심히 쓰는 이들이 넘쳐났지만 광장이나 카페로 들고 나와 그걸 읽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지독히 혼자라고 여길 때 나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내 시를 읽어드리겠다고 했다가 뺨을 얻어맞은 적도 있다).

내가 꾸린 소규모 낭독 모임의 취지는 간단하고 선명했다. 우선 낭송과 낭독을 조금 구별하자는 것이었다. 시낭송회라고 불리는 행사에 가면 문학을 하는 내 입장에서도 보기 민망한 경험들을 자주 목격했다. 대형 스피커로 BGM을 틀어놓고 무대에 올라가 과잉된 감정을 몇 옥타브까지 올리는 것에 박수를 날려주는 문인들의 시낭송회는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불편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작은 공연이나 소규모 낭독 모임에 뜬금없는 감동을 받곤 했는데, 고대 소포클래스 시절부터 낭독문화에 익숙한 유럽 문화권에서 낭독은 그들에게 이벤트가 아닌 일상과 같은 여유가 있었고, 곁에서 보면 그들은 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으로서 더 오랜 ’읽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령 문인들이 주를 이루지 않아도 몇 십 년 이상 지속해온 작은 마을의 낭독 모임을 수도 없이 보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 모임을 지속하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무긋한 구석이 나를 자주 매혹으로 이끌곤 했다. 문학과 책과 예술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우리부터 모여서 소리 내어 읽자. 다만 가능하다면 테크니컬한 음향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로 라이브하게 깡깡하게 읽자.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우리의 호흡을 그대로 돌려주자. 문학은 숨 쉬는 경험이니까. 모여서 숨 쉬자. 연극적인 작업과 시 쓰는 작업을 병행해오던 내 문학청년 시절 쓰는 것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동일한 작업의 하나였다. 나는 언제나 소리가 살아야 문학이 산다는 작은 불씨를 품고 있는 조그만 덩치의 시인이었으니까.

공간으로 찾아가는 라임

십여 년 동안 낭독 모임의 멤버와 이름은 수시로 바뀌곤 했다. 관객 없는 지하 클럽을 빌려 쓰기도 했고, 공간을 빌려주는 카페 구석이 되기도 했으며, 거리의 놀이터나 옥상에서도 했다. 이름도 ‘텍스트 우드스탁(text woodstock)’이 되었다가, ‘일요시극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펭귄라임클럽’이 되었다. 그 사이 재주가 출중한 녀석들이 합류해서 낭독 모임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변해가며 즐거워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관객도 조금씩 늘어갔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나 시작할 수는 있지만 지속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본의 메커니즘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태계 놀이문화를 자신들의 판에 이식했고, 급속도로 낭독회는 상품이 되기 시작했으며, 멤버들은 이벤트 낭독을 기획해주거나 그들의 기획에 세션이 되어 흩어졌다. 안타까웠지만 물살이었고 흐름이었다. 낭독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사이에 나 역시 출판사나 기획사의 수많은 낭독 모임을 연출해주기도 했고, 그들의 이벤트에 신물이 나도록 불려다녔다. 우리의 제도권 교육에서 문학은 답안을 찾는 과정에 녹아들어가 있다. 소리 내어 읽을 시간이 없다. 어서 볼펜을 쥐고 행간에 밑줄을 그어가며 묵독으로 답안을 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모범답안을 찾는 문학에 시달린 대중들에게 문학을 향유하는 방법으로서 소리 내어 텍스트를 읽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던 내 의지 역시 점점 기형이 되어간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숲에 모여 살던 토종의 다람쥐가 흘러들어온 청솔모의 난입으로 도토리를 빼앗기고, 심지어 잡아먹히다가, 종국엔 멸종이 되어가고 고유의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기분이랄까?

감염은 사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낭독 문화의 다변화 과정을 놓고 이 시대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이나 사냥꾼과 포획자의 구도로만 집중시키고 싶은 생각도 크지 않다. 시스템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작동되는 것일 테니. 다만 순정은 잃어버렸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소규모 낭독 모임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해야 한다. 펭귄은 걷지만 인간도 아니고, 날지만 물 속을 날고, 턱시도를 입고 있지만, 뒤뚱거리고 산다. 하지만 가장 추운 곳에서 살면서도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개체 멸종을 가장 지혜롭게 견디고 있고, 눈과 입 안에 얼음이 가득한 꽁꽁 언 새끼를 발등에 올려놓고 녹일 줄 아는 모성이 가득한 동물이다. 그들의 고유한 라임을 나는 존중한다. 조금 기우뚱거리게 읽으면 어떤가? 조금 서툴게 쓰고 읽어도 우리는 서로의 낭독에 귀를 기울여준다. 한 달에 한 번 우린 펭귄들처럼 모여서 총총. 자신의 라임을 읽는다. 당신도 사는 게 어색해지면 들려달라. 조금 라임이 뒤뚱뒤뚱할수록, 낭독은 좋지 아니한가?

사진제공_김경주

김경주 필자소개
김경주는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 창작과(대본 및 작사전공) 전문사(MFA&middot;석사) 과정을 공부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고 극작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등단 후 카피라이터, 방송작가, 야설작가, 유령작가로 글쓰기를 해오며 여러 지면에 다양한 글을 써왔다.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펴냈고, 이후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의 시집과 산문집 <밀어> <패스포트> <자고 있어 곁이니까>를, 옮긴 책으로 <라디오 헤드로 철학하기> 등이 있다. 현재 다양한 독립문화를 기획, 연출하며 시극운동을 하고 있다.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