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이는 무엇을 믿는가” 이 타이틀은 독일 리틀아트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지난 2013년에 5개의 운영주체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광주시립미술관, 인천문화재단, 청주스페이스몸, 한국만화영상진흥원)가 각각의 기관 성격을 반영하여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10주간 진행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기획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했다.

들어가며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플랫폼 형태의 창작공간은 어느덧 우리 예술계에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스튜디오 겸 갤러리와 극장 역할을 해왔던 대안적인 표현공간이 지역 거점에서 하나씩 자취를 감출 때, 외려 이러한 공간들은 공공건물에 입주하면서 나름의 ‘성격’과 ‘콘셉트’를 구축해왔다. 이들은 저렴한 임대료와 대관료를 통해 예술가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했고,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도시민의 문화 향유 공간으로서 시민과 예술가가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필자가 지면을 통해 소개하려는 곳은 ‘가정의 달’에 제일 부합하는 창작공간, 바로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이하 관악놀이터)이다. 센터, 촌, 공장, 플랫폼, 스튜디오, 아케이드 등 공간을 칭하는 다양한 방식 중 가장 도드라지는 이름이 아닐까 한다. 어린이 그리고 창작과 놀이. 호칭에선 공간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고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들을 엿볼 수 있다. 창작하는 어린이, 놀이하는 예술가, 관람하는 주민(엄마)들.

관계자의 말을 빌자면, 관악놀이터는 처음엔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대여소’로 개관하려고 했었단다. 인구 밀도가 높은 관악구에 특히나 젊은 부부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셈이다. 개관을 검토하던 중 어린이를 위한 복합적인 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하자는 제안에 따라 지금의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술가의 입장에선 환영이지만, 어린이들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장난감 대신 예술이라니. 허나 문화적 기반시설이 미약한 관악구에 어린이+예술의 창작기지가 들어선 건 비단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발상이리라.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을수록, 공공영역이 배려하고 투자할 지점은 바로 ‘소외된 미래’일 테니까.

그리하여 2010년 12월, 옛 은천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하여 관악놀이터가 문을 열었다. 이제 햇수로는 다섯 살, 만으로는 세 살 반. 기존 유휴공간의 개조는 이곳이 마을의 자산이라는 점과 주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아직은 걸음을 떼는 단계지만, 관악놀이터는 어린이+예술 창작이라는 유일한 성격과 지역과의 소통공간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관악놀이터에 가다

사진_관악창작공방 모습 사진_가위질하는 어린이 사진_인증샷

▲매주 수요일과 매월 둘째주 토요일에 열리는
관악창작공방(2014.4.9~11.26)을 찾은
지역 어린이들

봉천역에서 10분 정도 골목골목을 꺾어서 걸어오면, 3층처럼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이 눈에 띈다. 관악놀이터는 거주공간과 상업공간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좌우로는 경로당과 학원, 앞뒤로는 상가건물과 주택들이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관악창작공방”이라는 상설체험프로그램이 한창이었는데,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파견된(?) 길고운 작가가 어린이들과 함께 “부엉이 손가락 인형”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어깨너머로 수업을 참관하면서, 일단 공예작품의 수준이 높아 놀랐고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진지한 태도에 한 번 더 놀랐다. 네 살에서 일곱 살 먹은 어린이들은 작은 손으로 혼신의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의 프로그램이 끝난 후, 완성된 부엉이 인형을 손에 끼고 환한 얼굴로 인증샷을 남기는 아이들의 모습에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길고운 작가는 아이를 가졌을 때, 예술가 엄마로서 품었던 생각들로부터 본 작업이 구상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경력 단절과 엄마의 육아 문제 등을 고민하다가 이를 서로 접목시켜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제품 디자인과 섬유를 다루던 작가는 어린이를 위한 체험적 공예 프로그램을 고안해냈고, 이는 결국 관악놀이터에서 온전히 수행될 수 있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어린이들은 절대로 설명서대로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파생되는 독특한 지점이 너무나 놀라우며 재미있다고 전해주었다.

이처럼 관악놀이터의 존재 의의는 다양한 창작자들이 ‘어린이’를 매개로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발휘된다. ‘예술’을 중심으로 어린이와 지역민이 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외려 ‘어린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의 맞춤형 예술이 시도되고 있었고, 자신의 창작세계를 확장하는 데 계기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린 예술가가 억압을 당하면서 그 고유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세계는 결코 작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감으로 가득 찬 예술적 보물창고다. 그리하여 관악놀이터에서 예술가와 어린이의 만남은 친구가 친구를 만나는 것이며, 동료가 동료를 대면하는 순간이 된다. 완성도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을 통한 즐거움으로,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를 통해서.

놀이터를 살펴보다

관악놀이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지하 1층, 지상 2층과 옥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면적은 120평 가량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각 공간에는 ‘볕, 싹, 품, 밭, 씨, 밑’이라는 한 글자 이름이 붙여져 있다. 어린이 친화적으로 건축된 공간이라 각 층의 높이도 낮고, 계단 오르기도 쉽다. 필자가 다녀본 창작 공간 중 가장 깔끔하고 쾌적하며 소박하다.

사진_관악명랑방석극장 밖과 안

▲매월 넷째 주 토요일 관악명랑방석극장(2014.3.22~11.22)이 열리는 1층

1층은 프로그램 전용 공간으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극장으로 설계된 곳은 아니지만 조명을 달 수 있는 장치가 천장에 마련되어 있다. 등퇴장을 할 수 있는 칸막이가 세워져 있고, 바닥에는 댄스플로어가 깔려져 있다. 어린이들은 이곳에서 방석을 깔고 공연을 관람하거나(관악명랑방석극장), 몸을 쓰는 체험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_관악창작공방을 비롯한 상설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2층

▲관악창작공방을 비롯한 상설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2층

2층은 상설 체험 및 창작공방 공간이다.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마련된 좌식 테이블과 적잖은 책을 구비한 책장이 인상적이다. 그 옆이 수업을 할 수 있게 꾸며진 공간으로 여기서는 공예작가들의 프로그램(관악창작공방)이 진행된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화장실이 특이하다. 안에 있어서 출입이 용이하고, 이 또한 어린이들의 사이즈에 맞춰져 있다.

해질녘 클래식 공연이 열렸던 옥상 야외무대

▲해질녘 클래식 공연이 열렸던 옥상 야외무대

3층은 옥상 겸 야외무대. 하늘을 가릴 수 있게 전동식 차양막이 설치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하다. 한켠에 텃밭을 가꾸고 있는 옥상 또한 예술가와 어린이를 위한 표현 공간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작년에는 해질녘에 클래식 공연을 주관하여 지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관악놀이터를 찾은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는 없지만 대신 여기서는 놀이, 독서, 대화, 휴식을 할 수 있다.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우연히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그 뒤로 종종 와서 과제도 하고 수다도 떨다가 집에 가기도 한단다. 갈 곳이 없어 헤매다가 발견한 공간이지만, 그들에겐 새로운 아지트가 된 셈이다. 스스럼없이 공간과 친해지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했고, 그러한 일상의 휴식 공간도 없이 떠도는 아이들이 가엾기도 했다.

담당자 인터뷰

다음은 공간의 운영 담당자와 일문일답. (답변자: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담당자 강지은, 매니저 한민지)

관악놀이터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한다면?

어린이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예술가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반대로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예술가는 사절이다.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면 은근히 예술가들이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올라가는 공연들도 잘 만든 아동극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연들이 유리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 창작공간은 기존의 아동청소년을 주관하는 공연계나 예술교육 등의 제도권에서 속하지 않고 활동하기를 원하는 독립예술가에게도 열려있다.

관악놀이터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창작공간에서 근무하는 운영 담당자들의 공통된 고민은 대개 비슷하다. 바로 공공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보다는 예술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이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운영진과 예술가가 공동 기획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면, 지금은 예술가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5월에 첫 선을 보이는 예술체험 프로젝트 ‘씨’가 바로 그것이다.

‘어린이’라는 화두와 접목되었을 때, 새로운 예술적 감각들이 파생될 것 같은 예술가를 담당자가 직접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기존의 익숙한 장르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 다원예술, 그리고 현대무용과 같은 예술장르도 해당된다. 예술가들이 어린이들의 참여를 전제로 예술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페르튜토

▲2013년 꿈다락토요문화학교에서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선보인
극단 다페르튜토
(사진출처_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기억에 남는 예술가, 창작팀이 있다면?

극단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를 꼽고 싶다. 작년에 이들은 문학, 연극, 미술의 통합 프로그램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선보였는데, 극단의 배우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구 놀아서 어린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과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는 예술가들을 좋아하더라.

관악놀이터의 운영주체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창작공간과는 다르게 &lsquo;with맘(mom)&rsquo; 이라는 운영진이 있다. 관악놀이터가 생겨난 이후 지역에 새로 생겨난 일종의 커뮤니티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 창작공간이 자리한 곳에서는 이미 해당지역의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전문가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곳(관악)은 그런 네트워크가 부재했다. 지금은 위드맘이 일종의 어린이 &lsquo;전문가&rsquo; 그룹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은 관악놀이터의 공동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일들을 나눠서 수행하고 있다.

운영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어쩌면 직접 상대하는 것은 부모님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어린이들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잘 돌아가도록, 하나씩 합리적인 원칙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술은 일종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전의 준비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일단 규칙이 생겨나면 이것에 잘 따라 주신다. 내 아이만을 우선적으로 챙기고자 하는 부모님과는 당연히 소통이 어렵다.

관악 놀이터의 비전과 목표가 있다면?

관악놀이터가 어린이에게 원래 갖고 태어났던 예술성을 찾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예술가에겐 원래 갖고 있었던 동심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관악 놀이터는 안전한가? 안전에 대한 매뉴얼은 있나?

안전시설은 잘 마련되어 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CCTV 카메라가 각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고, 이를 관리 데스크와 사무실에서 모니터로 살펴볼 수 있다. 안전에 대한 매뉴얼 역시 실제대비 훈련을 통해 끊임없이 보완하고, 보충하겠다.

나가며

발바닥이 그려진 관악놀이터의 계단

필자가 다녀간 관악놀이터는 제도권 예술이나 기업, 그리고 민간의 영역에서 할 수 &lsquo;없는&rsquo; 일들을 뚝심 있게 해나가고 있었다. &lsquo;어린이+예술&rsquo;이기에 공간 운영과 예산 운용 면에서 한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자유롭게 실험적인 시도에 전념할 수도 있겠다.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더욱 작고 단단하게 일들을 해나갈 수 있다는 점도 분명 장점이이라.

새로운 창작공간이 문을 열 때마다, 예술가들의 표현창구가 &lsquo;하나&rsquo; 더 늘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한편으론 자기와 상관없는 장르이기에 그저 무관심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다. 허나 그와 관계를 맺는 존재들의 가능성과 이로 인해 생겨나는 가치들을 고려해보면, 누군가에겐 새로운 &lsquo;미래&rsquo;가 열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운영진에게 내심 궁금했던 마지막 질문과 그 답을 되새기며 관악놀이터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어린이는 무엇을 믿는가. 어린이는 어른의 말을 믿는다.

사진촬영_박창현(Chad Park)

필자사진_정진세2014-05-08 필자소개
정진세는 극단 문의 극작가로 연극원에서 연극이론과 서사창작을 공부했다. 2012년부터 대안공간에서 매달 초소형 공연을 선보이는 월간 [극단 문]을 발행하고 있고, 지역축제와 문화기관에서 주민과 함께하는 연극 <올모스트>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2013년에는 인천아트플랫폼의 레지던시 작가로 입주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의 편집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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