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정보와 지식을 담은 콘텐츠로, 제본과 인쇄 과정을 거쳐 출판된 결과물만이 책일 수 있을까. 근래에 전자책이 등장하면서 책에 대한 고정관념도 바뀌고 있지만 여기, 책을 공간의 개념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사고(思考)의 공간뿐만 아니라 읽고 만들고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공간으로 보는 더 북 소사이어티(THE BOOK SOCIETY)의 임경용 대표와 구정연 큐레이터가 그들이다.

5월 28일 오후. 홍대거리를 한참 벗어나 상수역 근처로 찾아간 ‘더 북 소사이어티’는 간판에 상호 대신 하얀 삼각형을 그려 넣은 특이하고도 소박한 책방이었다. “간판을 디자인한 김영란 디자이너의 제안이었다. 보라색 바탕에 하얀 삼각형은 소규모 출판과 예술출판을 엮어 자유로운 커뮤니티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아방가르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워낙 이미지가 강렬하니까 한번 오신 분들은 오히려 기억을 잘 해주신다.”

무한한 확장을 꿈꾸는 작은 공간의 힘

더 북 소사이어티의 태동은 2007년 독립출판사 미디어버스(MEDIABUS)에서 출발한다. 영화기획을 하고 있던 임경용 대표와 큐레이터 구정연 씨가 뜻을 모아 시작한 미디어버스는 한 권씩 정성스럽게 예술 출판물을 선보이더니 2009년 10월에는 ‘더 북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포럼과 토크, 전시가 있는 북 페어 행사에 주관자이자 참여자가 되었다. 이후 유통 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아트선재센터 1층에 ‘더 북스’라는 서점을 열지만, 출판사와 작가, 독자가 만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 위해 현재의 상수동에 책방이자 문화공간인 더 북 소사이어티를 열었다.

더 북 소사이어티는 시중에서 볼 수 없는 독립출판물들, 그중에서도 주로 예술관련 책들을 판매하는 드문 곳이며 출판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강연 형식의 토크와 작가가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북 페어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흔히들 독립출판이라고 하지만 임경용 대표는 소규모 자주출판이라고 바로 잡아주었다. ‘독립’이라는 말에는 자본과의 분리를 뜻하는 어감이 강한 반면 ‘자주출판’이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전 과정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창작자의 행위가 더 강하게 드러나 보인다.

“2008년 즈음 유럽을 여행하면서 베를린, 파리 같은 도시에 있는 소규모 서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소규모 서점의 역할,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였고 언젠가는 커뮤니티 서점을 만들어보리라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임경용 대표는 열 평 남짓한 이 공간에 꿈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임경용 대표
임경용 대표

임경용 대표

오후 세 시, 하얀 삼각형이 속삭인다

필자가 찾아간 날은 상수역 거리축제 ‘오월 어느 날’이 열리던 기간으로,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는 ‘오후 3시’라는 타이틀로 자주출판을 하는 작가들과의 대화가 있었다.

16절 갱지를 묶어 만든 『B02』는 신예작가 미루의 단편소설집으로,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해 의미를 변주해가는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책이다. 그는 "등단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보다는 독자와 동료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며 "다른 식의 글쓰기를 하고 싶었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소통"이라고 했다.

『꿈꾸는 아이들』『연소』『지하철』 세 작품을 출간한 채유수 씨는 가제본 형태의 샘플을 보여주며 수작업으로 책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소재를 얻는 방법도 흥미로웠는데, 첫 번째 책인 『꿈꾸는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15가지 창의적인 방법들’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자는 모습을 스케치한 작업이다. 두 번째 책인 『연소』는 군대시절, 일기장에 그린 그림을 모은 것으로 군 내무반 훈련소의 풍경을 그린 그림책이며 『지하철』은 출퇴근하면서 본 사람들의 표정, 자세를 365일 계절별로 묶은 것이다. 책의 형태 또한 초기에는 스테이플러가 물릴 수 있는 크기의 판형이었다면 점차 타카로 찍거나 본드로 제본하는 등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사진 프로젝트 그룹 인스턴트(instant)는 2010년 3월, 손우성, 임민영, 황보은이 각자의 여행지에서 찍은 찰나의 사진을 모아 『여행사진』(journal to journey)이라는 48장의 무가지를 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 프로젝트로 묶어낸 사진집 『내 방 여행』(le grand vovage immobile)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집안에서 의식 여행을 하며 쓴, 프랑스의 자비에르 드 메스트로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시도한 작업이다. 영문 텍스트와 사진이라는 콘텐츠의 특성상 이들의 책은 프랑스, 영국, 인도 등의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작은 책방에서도 판매하고 있으며 스페인에서 열리는 세계독립잡지전시인 《데 진》(De Zine)에 전시될 기회를 얻기도 했다.


채유수<연소>, 사진프로젝터 그룹 인스턴트<내 방 여행>

&lsquo;오후 3시&rsquo;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자주출판을 하게 된 동기, 제작 과정, 책이 어떤 경로로 독자와 만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사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미디어버스가 더 북 소사이어티라는 공간으로 확장되어 온 과정이자 소규모 자주출판 작가들이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ldquo;자주출판물은 대형서점이나 상업적 유통 경로로 판매될 수 없는 책들이지만 그런 방식의 유통을 거부하는 책들이기도 하다. 서점에서 손쉽게 만나볼 수 있고 책으로 수익을 내고 싶다면 그에 맞는 시스템대로 하면 된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프로젝트 과정이나 결과물을 담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출판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는 유일무이한 책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rdquo; 때문에 임경용 대표는 이곳에서 맺어지는 커뮤니티는 콘텐츠보다는 마인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눈길을 끄는 책이 있어 임경용 대표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은퇴 후 소규모 출판을 시작한 아일랜드 작가 프란시스의 책들이었다. 손바닥만 한 양장본은 프로젝트 별로 특색이 있었지만 편집에 대한 그만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통일성 또한 갖추고 있었다. 유럽에서 한때 유행했던 메일 아트(mail art우편 등의 통신 수단에 의해 옮겨진 크기가 작은 오브제 등을 예술작품으로 작업하는 것) 프로젝트를 책으로 엮어냈는데, 그의 책을 넘기다 보면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던 시절의 향수와 더불어 현대감각의 키치적인 디자인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여든이 넘은 그는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열리는 독립출판 북 페어마다 참가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더 북 소사이어티 공간 내부

책과 책 사이에는

하루 20여 명 정도가 오가는 작은 서점이지만 책장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들여온 경로가 다르고 제작된 사연이 달랐다. 임경용 대표는 이 공간을 찾는 독자들에게 국내외의 좋은 자주출판 책들을 소개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독자의 저변을 확대하고 창작자들을 자극할 만한 책을 발굴해 내는 것은 소규모 출판의 지속적인 작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올해는 경제적 여건상 아시아 대표로 초청받은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가지 못했지만 올 7월 중순 일본에서 열리는 도쿄아트북페어에는 참가할 예정이다. 또한 7월 초에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릴, 2010년 출판된 젊은 디자이너들의 책을 전시하는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책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작가, 독자를 잇는 교류의 매개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공간은 책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국내에서 이와 비슷한 성격의 공간으로는 창성동에 위치한 헌책방을 표방한 커뮤니티 서점인 가가린, 온라인 판매부터 시작하여 오프라인의 서점으로 안착한 동교동에 위치한 유어마인드 등이 있다. 더 북 소사이어티는 바코드가 찍히지 않은 지구상에 몇 안되는 책들의 집이다. 상수역 근처를 지나다가 보라색 바탕에 하얀 삼각형이 그려진 간판을 보면 주저하지 말고 들어가 보기 바란다. 저마다 고유한 제 모습을 갖고 세상에 작게 태어난 책들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김민정 필자소개
김민정은 희곡, 음악극, 라디오 드라마 등을 쓰는 극작가다. 언젠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내겠다는 생각과 작은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11th-willo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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