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취업과 성공에 몰두해 있는 세상이다. 상아탑에는 전공 서적보다 토익 책이 더 사랑받고 있다. 조주리 큐레이터는 인생의 절반을 학교와 그 주변에서 머물고 있지만, 그것은 취업과 성공한 삶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의 내면과 타인의 삶, 세계를 이해하고 통찰할 힘을 얻기 위해 분투한 시간이었다. 그것이 안정된 직장을 보장하지 못했지만, 굳이 어딘가 속하지 않아도, 너무 빠르지 않아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무소의 뿔이 혼자서 가는 것처럼.

취업보다는 공부에 몰두한 시간

조주리 큐레이터는 독립 기획자이자 현대 미술과 디자인 분야의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주로 동시대 작가들이 처한 새로운 창작 조건을 조명한 전시와 시각 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형 기획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학문적 호기심을 채우느라 시간을 쏟았다. “한 번씩은 다 공부를 해 보고 싶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과목을 수강하곤 했어요.” 남들은 스펙 만들기에 바쁜데 취업과는 상관이 없는 전공을 선택하면서 오로지 전공 탐색만 했다. 상아탑이라는 학문의 전당에서 호기심의 안테나를 세우고, 가장 대학생답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지식의 바탕을 채우던 시기였다.

UP: 여러 가지 전공을 섭렵했고,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신 이유가 있나요 조주리: 심리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교차하는 학문이에요. 그러나 심리학 자체도 충분히 흥미로운 세계였지만, 전공 바깥에서 무언가 다른 것들로 채워 나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계 전공으로 개설되어 있던 미술사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졸업 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공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당시로선 구체적 정보도 별로 없었고, 반드시 미술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목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졸업 후 미술 현장에서 일을 찾기보다는 방송사 PD, 영화나 광고 등 문화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UP: 공부한 것들이 지금 큐레이터를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조주리: 예술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와 상황을 대하는 것에 있어 기존에 훈련해 왔던 미술 언어를 이해하는 관점, 적절한 연구 방법,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책임감 등이 추상적인 수준의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획 아이디어나 실무적 지침을 전수받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비슷한 것을 고민하고 공유하는 지식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나보다는 수준 높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접하고, 선망하고 모방하면서 학습 효과가 있다는 점은 좋은 관계 자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로 탐색과 전공 공부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에 나와 일자리를 잡는 시간도 늦어졌고 그런 사이 부모님이나 예전에 스스로가 그려 보았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삶의 단계를 보통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보면 5년에서 많게는 10년 정도는 뒤쳐져 있는 것 같았어요.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제 흐름에 맞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일을 통해 나를 객관화

2006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일했던 곳은 파주의 예술마을 헤이리 사무국 기획팀이었다. 당시로선 다양한 구성원과 공간 실천 속에서 실험적인 성향의 다원 예술이 한창 논의되던 곳이었다. “첫 출근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게다가 축제 개막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팀장님이 퇴사를 하게 되어 급작스레 여러 큰 사업들을 총괄해서 진행하게 됐어요. 국제 페스티벌부터, 대규모 기획전, 오케스트라와 문화 아카데미 설립과 운영까지 정말로 다양한 일들에 쉴 새 없이 투입되었어요.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기획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스스로 학습하고 배양해 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뒤 유학을 결정했다. 능숙함과 매너리즘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론보다는 실천 학문에 가까운 문화정책과 예술경영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UP: 현업에서 일을 하다가 유학을 떠났는데, 다시 공부를 하는 건 어땠나요 조주리: 런던 시티 대학에서 문화정책과 경영 과정을 택했고, 전공 과정에서 당시 전 세계적인 화두였던 창조 산업과 도시 만들기 정책, 예술 기관의 경영과 프로그램 기획, 문화 이론 등 다양한 과목을 들었어요. 대체로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실무적인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실무 면에서 이미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경험적 근거를 통해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반추해 보고, 보다 현실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학문적 성취를 떠나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객관화해 보고, 낯선 환경 속에서 삶을 컨트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본 것이 저로서는 아주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UP: 유학을 다녀오신 후,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조주리: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 새로운 전공과 정보들,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예술과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부분적으로 변화가 생겼죠. 한국에 돌아와 국제적 규모의 비엔날레 팀에서 일을 했지만, 미술계 많은 곳이 그렇듯 일 년 계약직이었어요. 서른 넘어 유학을 갔다 온 데다 이전 회사의 마지막 직책이 팀장이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스펙 과잉인 거죠. 미술계는 인턴 한 명 뽑는데 해외 유학파가 수두룩하게 지원할 만큼 특히나 학력 인플레가 심해요. 만족할 만한 수준의 직장을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입니다. 결국 울타리를 찾기보다는 내가 나를 스스로 고용해야 하는 것이 절박한 상황으로 다가왔어요.

2016 <리서치, 리:리서치> 컴파니 <비밀공부> 2016 <리서치, 리:리서치> 컴파니 <비밀공부>

조주리 큐레이터는 미술관 업무가 종료될 즈음, 때마침 비슷한 고민을 하던 전 직장 후배와 작은 회사를 차린다. 일 년 계약직에서 이제는 회사를 설립하고 이끌게 되었다. 다행히 신뢰하고 맡겨 주는 분들이 많아서 창업치고는 일감이 많았지만, 또 다른 딜레마가 찾아온다. “회사의 운영을 위해, 일을 위해 일을 쫓아다니다 보니,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어요.”

굳이 소속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결국 한 사람으로서의 완전한 ‘독립’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차근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지난 몇 년간 찾고 있고, 여전히 그 과정에 있다. 여러 일들을 해 나가는 지난 이삼 년 동안 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게 되었다. 학교 안에서는 연구생의 신분으로, 학교 바깥에서는 전시기획자로 프로듀서로, 연구원으로 여러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지도 교수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서 다른 일을 어떻게 하냐고 우려하시지만,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깨달음이 일하는 데 있어 풍성한 기반으로, 반대로 타성에 물들지 않고 연구 또한 창의적으로 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큐레이터로서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담은 기획전도 종종 선보이고 있다. 2012년 미디어시티서울 비엔날레에서의 전시 경험을 바탕으로, 협력 창작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기획전 <2의 공화국>을 2013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선보였다. 이후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하며 미술 바깥의 다양한 콘텐츠를 예술적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일, 반대로 미술에서의 비미술적 요소를 끄집어내고 기존의 전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민해 오고 있다. 2016년 예술가들의 조사연구 방식과 의미를 조명한 <리서치, 리:리서치>전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9월 한 달간 개최되었고, 이어 올해 12월에는 아르코미술관에서 작년부터 쌓아 온 한국-대만 현대미술의 교차연구 성과를 반영한 기획전 <원겹접사>(가칭)가 열릴 예정이다.

2016 <리서치, 리:리서치> ETC <일시합의기업> 2016 <리서치, 리:리서치> ETC <일시합의기업>

UP: 독립큐레이터로서 예술가들과 어떻게 유대와 연대를 가지며 함께 작업하고 있나요 조주리: 인간적인 친밀함은 가장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일상적인 현상과 미술계, 우리 사회에 대한 비평적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 첫 번째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친해서 전시를 함께하는 경우보다는, 사회적 이슈를 해석하는 시선, 작업에 대한 관심사가 연결되면서 협력 작업을 할 확률이 커집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상호 학습이 가능한 관계일 때 생산적입니다. 작품을 채택하는 입장이 아닌, 그것의 기원과 프로덕션, 작품이 비평적으로 소비되고 재생산되는 전 과정에 관심을 둘 때, 서로 연대감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UP: <리서치, 리:리서치>는 어떤 전시이고, 어떤 관점을 담고 싶으셨나요 조주리: 이 전시는 제가 처한 연구자로서의 삶의 문제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문제를 생산하고 연구해 나가는 조사연구가형 작가들의 삶을 반영한 전시입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리서치 기반의 미술과 아카이브형 전시 디스플레이에 대한 고민과 반성을 담은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서치, 리:리서치>전에 전시에 초대된 여덟 팀은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 창안을 통해 쉽사리 종결되지 않을 연구 과제들을 풀어 나가고 있는데, 그것을 지켜보고 분석하는 또 하나의 시선이 제 몫이 아닌가 합니다. 전시의 클로징이 새로운 오프닝이 될 수 있도록 작가끼리의 교차연구, 저와 또 다른 협력 연구자들과 작가 사이에서 서로의 관점과 통찰력이 오갈 수 있는 어떤 중간 지점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조주리 큐레이터는 “예술가는 관점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원한다면 어떻게든 표현해 낼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예술가의 관점, 나만의 고유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연구, 분석하고 스스로와 세계에 대한 관점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조주리 큐레이터는 굳이 어딘가에 속하지 않아도, 너무 빠르지 않아도,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창작물을 만들어 내며, 오늘도 굳건히 생존하고 있다.

인생UP데이트 멘토링

정형화된 궤도나 모델에서 벗어난 여러 유형의 창작자, 기획자, 조력자, 혹은 그와는 다른 일을 스스로 창안해 보는 복수의 선택지를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나온 과정과 현재 모습을 분석하고, 앞으로 다가올 상황 속에서 자신을 그려 볼 수 있는 ‘자기 객관화’에 기반을 둔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옆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과 앞서 나간 선배들에 대한 사례 연구도 필요하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미 정해진 길로만 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조주리 큐레이터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교 심리학, 미술사학
- 이화여대 대학원 르네상스 및 현대미술사 석사
- 런던 시티대학 문화정책 및 경영(MA in Cultural Policy, Management) 석사
- 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 전공 박사과정(수료)

전시
- 2012 <2의 공화국>_아르코 미술관
- 2016 <리서치,리:리서치>_탈영역 우정국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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