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3년 4월 29일 오후 4시 장소 : 남산 힐튼호텔

2011년에 한국시즌에 이어, 올해 다시 한 번 백남준을 비롯한 한국 아티스트를 초청하게 된 에든버러인터내셔널페스티벌(이하 ‘EIF’) 예술감독 조나단 밀스를 만나 한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주한영국문화원과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지난 4월 29일 영국대사가 주최하는 공연예술인만찬에 참석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주었다. 봄 햇살이 가득히 들이치는 힐튼호텔 창가에 앉아 열정적으로 예술이야기를 쏟아놓는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조나단밀스 사진

‘사실 전달’이 아닌 ‘스토리텔링’이 발전되어야

정명주 한국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가?

조나단 밀스(이하 ‘밀스’) 아니다. 한 열 번째쯤 된 것 같다. 1998년 첫 방문 이후 부산비엔날레에 두세 번 왔었고,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안은미 안무가가 동해안에서 했던 공연도 보러 왔었고, 서울만 아니라 지방에도 두 군데 정도 가봤는데 아주 좋았다. 호주 사람에게는 그게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호주 사람들은 다들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한국을 존중하며, 절친한 협력국가이자 무역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명주 지난 방문시 무용공연과 음악공연들도 보았는가?

밀스 물론이다. EIF을 맡게 된 이후에만 다섯 번째 방문이다. 작품을 하나 초청하기로 하면 한 번 방문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조사차 한 번 오고, 그 다음에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로 협상 차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두 번째 방문하고 바로 한국작품을 페스티벌에 초청하게 되었다. 2011년에 이미 한국을 초청했었고, 올해가 두 번째다.

정명주 한국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몰랐다.

밀스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만큼 알고 있고, 한국의 변화를 느낄 정도로 오랜 시간에 걸쳐 방문을 하기는 했다. 80년대의 격동기와 비교하면 지금의 한국은 정말 변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면에서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발전이란 늘 희생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한국은 과거에는 디자인이나 건축, 영화 등 문화산업분야에서 음악이 늘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예술장르 역시 음악분야 만큼이나 실력을 갖춰가고 있다.

정명주 1998년에 처음으로 왔었는데 그 때와 지금의 한국이 어떤 면에서 제일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밀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전보다 훨씬 부유해졌고, 서울의 경우는 훨씬 커졌다. 크게 발전한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발전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공해와 같은 부작용을 불러오는 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전체적으로 한국인들의 자신감이 많이 성장한 것 같다. 특히 매우 전략적인 자신감 말이다. 다시 말해, 정책적인 면에서 개인 기획자들과 정부기관, 예술단체간 협력체제가 훌륭하게 구축되어 왔다. 이런 점은 세계 정책수립자들이 반드시 주목해야하는 부분이다. 교육을 통해 전문가가 양성되는 과정과 시스템 역시 한국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청소년 시기부터 학교에서 트레이닝을 실시해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전문 배우로, 무용수로 키워나간다. 미술 분야에서도 학생 때부터 미술을 시작해 프로로 활동하게 되고, 최근 들어서는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도 아주 많아졌다.

25년 전에는 조수미 같은 아티스트들을 통해 음악분야만이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제는 영화, 시각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많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배출하고 있다. 2011년에 EIF가 초청한 오태석 연출가가 대표적인 경우다. 국립극단과 같은 기성연극계에서 활동함과 동시에 자신의 극단을 통해 계속해서 젊은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배우층을 양성하고 있다. 이 배우들이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연기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글렌다 잭슨(Glenda Jackson)이나 주디 덴치(Judi Dench)와 같은 배우들이 그런 예다.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서 정통연극으로 시작해서 웨스트엔드의 상업연극계로, TV 시트콤과 영화까지 진출을 했고, 동시에 실험연극에도 출연하면서 헐리우드 영화에까지 출연했다. 한국배우들도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 장르를 찾아가면서 한국 고유의 언어로 연기의 폭을 늘려갈 기회를 맞고 있다.


정명주 오태석 연출가는 영화감독들이 공연을 보러 와서 좋은 배우를 다 빼앗아간다고 속상해 하던데?

밀스 그건 칭찬이다. 장담하건데 영화감독들은 좋은 배우가 아니면 절대 훔쳐가지 않는다. 물론 훔치는 게 아니라 빌려가는 것이다. 배우들이 무대로 돌아와 오히려 연극에 기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대무용을 보면 취약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안무가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다. 전통무용의 경우는 소수지만 고정관객들이 있고, 내 취향은 아니지만 K-pop의 경우는 매우 대중적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위치한 현대무용은 솔직히 독창적인 목소리를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정명주 창작분야는 시간이 걸리니까.

밀스 맞다. 그게 내가 지적하려던 바다.

정명주 그리고 무용수들은 아주 뛰어난 사람이 많다. 해외에도 많이 진출해 있고.

밀스 그렇다. 그런 무용수들 중에서 좋은 안무가가 배출될 것이다. 내 말은 지금도 좋은 안무가는 많이 있지만, 위대한 안무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즉각적인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창작은 폭넓은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교육시스템을 통해 몇 세대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엔지니어링이나 테크놀러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에는 향후 20년간의 교육정책에 있어, ‘STEM’이라 불리는 네 가지 우선순위 분야가 있다.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엔지니어링(Engineering)’, ‘수학(Math)’이다. 그런데 리빙스톤과 같은 교육전문가들은 이 네 가지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 ‘STEAM’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명주 ‘예술(Arts)’ 말인가?

밀스 그렇다. 디자인이나, 문화적 내러티브, ‘사실’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측면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 매우 흥미로운 분야들이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제가 매고 있는 이상봉 디자이너의 넥타이 같은 것이다. 런던올림픽이 개최된 이후,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서 이 디자이너가 패션쇼를 했었다. 우리 모두 매우 매력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디자인 분야에서도, 삼성이나 LG에서 아름다운 상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패션디자인도 마찬가지고. 이것이 곧 시각예술과 직결된다. 호주 브리즈번에서도 3년마다 현대아트전이 열리는데, 거기서도 매우 훌륭한 한국 작가들의 현대작품 쇼케이스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도 이제 다이내믹한 미술작품들, 큐레이터들, 갤러리 전문가들이 배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5년 전과 비하면 아시아 지역의 시각예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더 이상 유럽에만 눈길을 돌릴 필요가 없어졌다.

▲ 2013 EIF 공식 포스터

▲ 2013 EIF 공식 포스터

물질을 통해 특정시대와 사회 읽어내기

정명주 화제를 돌려 EIF 이야기를 좀 해보자. 올해 EIF의 주제는 ‘혁신’과 ‘테크놀로지’인데.

밀스 단순히 ‘혁신’과 ‘테크놀로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혁신’과 ‘테크놀로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티스트가 당시대의 재료를 사용해서 어떻게 예술작품을 만들었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작품에는 정치적인 맥락도 있고, 지역적, 언어적 특징들도 있을 수 있지만 사용하는 도구에 따라 혁신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들 베토벤을 혁신적인 음악가라고 한다. 특히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그렇다. 그런데 사실, 그의 피아노 소나타는 당시 발전하기 시작한 메탈 프레임의 피아노 덕을 크게 보았다. 이전의 목재 프레임 악기는 한 번만 공연하고 나면 튜닝을 다시 해야 할 정도로 현을 지탱하는 힘이 약했다. 그런데 크기도 더 크고, 훨씬 튼튼하고 내구성이 강한 메탈 프레임의 피아노가 나오면서 피아노 연주곡의 발전에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가 ‘혁신’과 ‘테크놀로지’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새로운 작품만 기획을 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50년, 150년, 500년 전에 혁신적이었고, 지금까지 그 혁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두루 망라하고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함머클라비어’는 당시에도 탁월한 음악이었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고, 다빈치의 그림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놀랍고, 아방가르드하기까지 하다. 마찬가지로 백남준의 작품들도 50년 전에 창작되었지만 여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는 역사의 흐름이 매우 중요한 요인인데 ‘혁신’과 ‘테크놀로지’가 주제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술가들이 창작에 사용한 테크놀로지들이 어떻게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명주 흥미로운 주제다.

밀스 난 그것을 ‘물질을 통한 사고(material thinking)’라고 부른다. 특정한 물질을 통해서 특정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는 것이다. 아까 얘기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목재 프레임 악기에서 철제 프레임 악기로 변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것은 건물의 자재일 수도 있고, 악기의 재료일 수도 있다. 1764년에 만들어진 하프시코드의 경우는 프랑수아 쿠퍼랭과 같은 작곡가에 의해 당시 사회를 그려내는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러한 악기를 이용한 콘서트가 이번 페스티벌에 많이 소개된다. 유리가 발명된 이후 가능해진 글래스 하모니카로 모차르트의 고전음악과 조지 크럼프의 현대음악을 연주함으로써 ‘물질을 통한 사고’를 해보는 것이다. 또한 바셋 호른을 연주하는 모차르트 리사이틀도 같은 맥락이다. 악기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예로 퀸즈홀에서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피에르-로랑 에마르의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다.

전체적으로 올해 프로그램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통해 역사를 넘어 지속되는 혁신성을 조명한다. 발명가 다빈치를 통해 현대의 테크놀로지조차도 아직 그를 따라가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든지, 한국 예술가로서 위대한 철학자이고 화가이고 음악가, 설치미술가이자 우리시대의 사상가인 백남준의 전시도 있다. 백남준은 50~60년 전에 이미 현대사회를 예견했다. 바로 비디오에 대한 집착말이다. 그는 영화와 사진술의 추상성에 우리가 매료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로봇 같은 형체를 통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측면들을 조명하기도 했고, 버려진 물체들을 특이한 구성으로 배열하는 독창성을 발휘하기도 했고, 특히 현대인들이 녹화된 이미지에 현혹될 것을 적확하게 예견했다.

왼쪽부터 <봄의제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디어 매핑 김형수, 안무 및 출연 YMAP(김효진)1 왼쪽부터 <봄의제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디어 매핑 김형수, 안무 및 출연 YMAP(김효진)2

▲ <봄의제전>(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우)

-미디어 매핑 김형수, 안무 및 출연 YMAP(김효진)


정명주 백남준과 이번에 초청된 비디오 아티스트 김형수와 YMAP(김효진)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밀스 백남준의 작품을 학교 다닐 때 배웠다. 머스 커닝햄, 존 케이지에 대해 배우면서 백남준을 알게 되었으니까 벌써 한 30년 됐다. 김형수와 YMAP(김효진)은 온라인으로 찾아보다가 알게 됐다. 기술적으로 탁월하면서 미학적으로 세련된 비디오 아티스트를 찾다가 발견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미학적으로 훌륭하나 테크놀로지의 사용에서 미비하거나, 테크놀로지는 휼륭한데 미학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김형수는 그 두 가지가 균형을 갖춘 보기 드문 아티스트라고 생각한다. 페스티벌의 주제를 정해놓고, 그에 맞는 아티스트를 찾는 과정에서 유명세 보다는 페스티벌 자체가 떠나는 여정에 참가할 사람들을 유명도와 상관없이 다양하게 섭외했다.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장 콕토의 영화를 이용한 필립 글래스 콘서트 공연, 리처드 버튼의 <햄릿> 공연 의 녹화테이프를 가지고 작업한 우스터그룹의 작품도 있다.

정명주 내년에 EIF 예술감독직을 그만둔다고 들었다.

밀스 그렇다. 이미 후임자가 정해졌다. 연극전문가로 아일랜드에서 활동해온 퍼거스 리너한(Fergus Linehan)이다. 올해부터 함께 일할 예정이고, 내가 수많은 나라를 방문하면서 얻은 정보와 어떤 작품과 아티스트를 눈여겨보면 좋을지를 전해줄 것이다. 물론 그걸 받아들이고 않고는 그 사람의 자유다.

정명주 페스티벌을 그만 두면 무엇을 할 계획인지?

밀스 오페라를 쓸거다. 작곡이 내 전공이니까. 아마 한국에서 공연하게 될 지도 모르지 않나. 당신이 초청해달라. (웃음)

정명주 마지막으로 예술가들에 대한 조언을 한 마디 한다면.

밀스 절대로 다른 사람 마음에 들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자기만의 것을. 절대로!

조나단 밀스(Jonathan Mills) 조나단 밀스는 2006년 10월에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을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2007년 프로그램부터 조나단 밀스의 주도하에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관객층의 참여와 다양한 문화 권역의 공연예술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호주의 멜버른 대학 부총장, 2009년도 멜버른에 오픈한 멜버른리사이틀센터&엘리자베스머독홀(Melbourne Recital Centre & Elisabeth Murdoch Hall)의 예술 자문이었으며, 멜버른 국제 축제, 멜버른 연합축제 등 호주의 가장 실력 있는 예술감독 중의 일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는 작곡가이자 동시에 음악 공학의 음향디자이너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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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2011 에든버러페스티벌 작품 경향 (2011.09.06)

정명주 필자소개
정명주는 현재 명동예술극장 전문위원이다.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콜리지 예술경영 석사과정을 마친 후 지난 10년간 런던에 거주하며 현지의 작가, 작곡가들과 작업하며 각종 국제공연 프로젝트 개발하고 연극 및 뮤지컬공연의 해외제작 및 투어를 기획하는 프로듀서로 활동해왔다. 유럽연극상을 수상한 체코의 극단, 팜인더케이브의 투어 프로듀서로서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의 세계투어를 기획했으며, 매년 여름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에서 개최되는 영국뮤지컬협회(MTM) 뮤지컬상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세계프로듀서협회인 IETM과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뢰를 받아 영국 연극전문가들과 공저로 <국제공동제작매뉴얼>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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