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후(徵候): [명사]겉으로 나타나는 낌새

실제 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책에서 만나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를 통해 다시 실제 생활을 되돌아보는 과정은 독서의 긍정적 기능들 중 하나이며, 그런 ‘효용’을 따지기 전에 우선은, 큰 즐거움이다. 최근 읽기를 마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책이여, 안녕!』에서 만난 ‘징후’라는 단어가 그랬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말년의 노작가가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한 고백이었다.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는 작은 폭력의 봉기’ 계획에 적극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도 아니게 참여하게 된 소설 속 주인공은, 그 계획이 ‘해프닝(혹은 실패)’으로 끝난 후, 고향집으로 돌아와 ‘징후’를 기록하는 일로 삶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 ‘징후’란 다름이 아니라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있는, ‘인간이 회복될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그 분기점을 넘어선 건너편에서 나오는 언어’들이었다. 언젠가 자신보다 훨씬 젊은 세대의 누군가가 그 징후들을 읽고 ‘그 모든 파멸의 기록을 뒤집을 수 있는 발상’을 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인간이 회복될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그 분기점을 넘어선 건너편에서 나오는 언어’의 징후.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을 옹호하는 말들만큼 적절한 예는 없을 것이다. 또 한 명의 노작가 존 버거는 이 사태와 관련해 이런저런 설명 없이 가장 확실한 팩트 하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스라엘 희생자 한 명이 백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를 정당화해준다... 이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백 번 양보해서,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복수심’에 불탈 수 있다고, 그런 생각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들을 말리기는커녕, 암묵적으로 그 독기어린 이기심을 60년 동안 못 본 척 해온 국제사회는 비겁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회복될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릴’ 때, 남는 것은 이기심밖에 없다. 그 때 삶은 곧 전쟁터와 동의어가 되고, 전쟁터에선 살아남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듣고 배워왔다. 누구도 (대놓고) 부정하지 않는 어떤 말들이 현실에서 버젓이 부정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만큼 기운 빠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노작가들은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속 노인이 ‘그 기록을 뒤집을 수 있는 발상’을 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파멸의 징후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면, 존 버거는 바로 지금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라고 다그친다.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두 노작가의 ‘실천’ 앞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너무 먼 이야기라고? 당장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먼 나라 이야기에 한가한 작가 타령이냐고? ‘분기점을 넘어선 건너편에서 나오는 언어’의 징후는 최근 들어 우리 주변에서도 유난히 자주 눈에 띄고 있다. 그것은 미네르바를 구속한 검찰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방송법과 관련한 언론노조의 파업을 두고 특정 방송사의 밥그릇 지키기 싸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에서 (그 말이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아서, 그래서 징후다) 그 징후들은 넘쳐나고 있다.


김현우
필자소개

김현우는 2002년도에 EBS에 입사하여 <시네마천국>, <애니토피아>, <인터뷰다큐 - 성장통> 등 연출을 맡아왔다. 현재는<지식채널e>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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