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으로 제도는 언제나 이차적이다.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이 그에 앞선다. 욕망과 자유로운 운동이 일차적인 것이다. 제도는 개별적이며 특별한 상황을 평범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바꾸며 의미의 열려있음과 가능성을 정착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만든다. 공공의 제도와 인프라는 매순간 창작의 뒤를 멀리서 따를 뿐이다.

몇 년전 스티븐 래빗와 스티븐 더너 공저 『괴짜 경제학』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부모의 양육 과정에 어떤 요소들이 아이들의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아이의 성적과 상관관계가 높은 요소들은 부모의 교육수준이 높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출산 시 엄마의 나이가 30세 이상이며, 아이의 출생 당시 몸무게는 저체중이라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집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집에 책이 많은 것 등이다. 반면 아이의 성적과 관련이 없는 요소는 결손가정이 아닌 가족구성이 온전하고, 최근 주거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하거나,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까지 엄마가 직장에 다니지 않으며 육아에만 전념한 것, 부모가 박물관에 자주 데리고 가는 것, 아이를 정기적으로 체벌하는 것, 아이가 TV를 보는 것, 부모가 거의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 등이다.

이 책은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실제적으로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와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으며, TV 시청이 자녀의 학습능력저하에도 별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에 자녀는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창작은 생산으로 예술적 상상력은 창의와 혁신으로

『괴짜 경제학』의 내용을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이유는 저자들이 말하는 내용이 우리 미술계에도 상당부분 적용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공한 예술가들의 상당수가 괴짜들이였고, 최근 미술시장 또는 미술경제가 중요한 이슈가 된 시기에는 경제에 관한 유익한 상식이 또한 요구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예술가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좋은가의 문제에 많은 한국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은 서점의 경제란 보다는 예술란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도대체 미술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앞서의 저 장황한 아이의 성적과 부모의 상관관계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해왔다. 지난 시기 한국사회는 첨단 과학기술과 함께 창의적인 예술문화가 사회의 성숙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책개발원(현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 콘텐츠문화진흥원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참 많은 기관들을 설립하고 예산을 빠른 속도로 증액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노력과 방법이 적절하였는가는 그 정책적 성과나 타당성과는 별개로 예술의 근본 문제와 관련해서는 고민스럽다. 무엇보다 그 동안 진행되어온 공공영역에서의 문화예술진흥의 방법론들은 매우 정교하게 발전해 왔으나 마침내는 어떤 철학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며 양적으로 증가되어온 문화예술진흥의 공공인프라들이 결국에는 일종의 문화와 예술을 굴뚝산업과 첨단 IT산업의 뒤를 잇는 신산업으로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술정책적 배려의 밖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예술 외부에서 움직이는 일종의 정치적 고려들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예술가들, 예술들, 예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복잡다양한 문화현상을 우리는 몇 가지의 정량화 가능한 시각에서 보게 된다. 또한 이런 시각의 배후에는 투자대비 산출이라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또는 기능적이며 또는 실용적인 정신이 자리한다. 창작은 생산으로 예술적 상상력은 창의와 혁신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과 해석을 매개로 예술은 일종의 예측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정말 예술적 상상력과 그 결과가 예측되고 관리되며 통제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러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어떤 세계관과 예술관과 같은 성찰적 사유와 조우하게 된다.

앞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비교해 보면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에 대한 시각과 접근 방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실상 한국사회가 예술가들에게 또는 예술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지원의 문제는 일종의 구휼이나 복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니 그 끝은 언제나 예술가의 위치가 저소득층 또는 생계가 불안정한 일종의 어떤 불가사의한 계층이거나 아니면 향후 국민소득 삼만불 달성이라는 목표를 함께 이룰 산업 역군으로 귀결된다고 말한다면 나만의 편벽한 상상일까?


개별적인, 특별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숙고

운명적으로 제도는 언제나 이차적이다.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이 그에 앞선다. 욕망과 자유로운 운동이 일차적인 것이다. 제도는 개별적이며 특별한 상황을 평범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바꾸며, 의미의 열려있음과 가능성을 정착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만든다. 공공의 제도와 인프라는 매순간 창작의 뒤를 멀리서 따를 뿐이다.

실제 예술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사후에 의미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 현장의 안과 밖에서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통합의 과정에 이르기에는 너무 다른 것들, 개별적인, 특별한, 사소한, 사건들과 사물들과 에피소드들이 깊은 바다 속 밑바닥에 억겁의 시간을 두고 무수히 쌓이는 조개껍데기나 산호처럼 그렇게 쌓여간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더욱이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손 놓고 있자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준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숙고해야한다.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욕망들, 운동들, 표현들, 상상들이 무엇이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러한 알지 못하는 대상과 세계에 대한 경의와 배려를 표할 뿐이다. 그러니 비록 예술이 성적순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좋을지의 문제가 더 효율적이며 중요해 보인다.



김노암
필자 소개

김노암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회화繪畵와 미학美學을 전공하였다. 미술현장에서 전시기획자로 활동하며 그림과 글로 시절을 보내고 있다. 현재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미술웹진 <이스트 브릿지>, KT&G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의 운영과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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