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세운 채 앉은 백발 사나이가 거대한 컴퍼스를 들고서 우주 공간을 작도한다. 사나이는 절대자다. 흰 머리카락 휘날리는 그의 손길 아래 세계는 한줄기 빛으로 태동한다.

영국 낭만주의 예술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걸작 <태고의 나날들>은 &lsquo;작은 거인&rsquo; 같은 그림이었다. 수채화 소품이지만, 미켈란젤로 조각 군상의 뻗쳐올라갈 듯 한 긴박한 운동감을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조형적 에너지가 눈을 압도하며 무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서구 고전 명화에서 엿보이는 원근법적 도식과 사물들의 원만한 어울림을 블레이크는 부러 무시해버렸다. 그 왜곡되고 과장된 군상과 공간 속에 질풍노도의 낭만 정신과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의 정수를 채워 넣었다. 후대의 문인, 예술가, 디자이너, 심지어 대중가수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며 또 다른 블레이크를 자처하고 나섰던 건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지난해 11월 개막해 지난 14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렸던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 전에서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그의 거대한 그림자를 맛뵈기처럼 엿보았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과의 교류전으로 성사된 이 전시에는 블레이크의 몇몇 삽화 소품과 디자인 작품을 비롯해 그에게 영향 받은 주요 작가들의 소품 등 60여 점을 국내 처음 선보였다. 작품 수는 빈약했고, 주로 삽화 성격의 소품에 그쳤지만, 블레이크는 그간 국내에 시인으로만 알려졌던 터라 상상력 넘치는 그의 회화, 디자인 공예작업을 처음 실견했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블레이크에서 길어올리는 서구의 근현대 예술

<태고의 나날들> 외에도 블레이크의 도저한 낭만주의 정신과 격정 어린 상상력은 다른 삽화와의 역동적인 윤곽선과 예리한 선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승처럼 흠모했던 17세기 문인 밀턴의 송시 <그리스도의 탄생일 아침>에 붙은 삽화 속의 천사들과 그리스 이교도 신들은 몸을 극도로 뒤틀거나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화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시 <티리엘>의 삽화에 나오는 저주받은 등장인물들의 섬뜩하고 긴장감 넘치는 표정 묘사는 압권이다. 당시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계 문명의 파도를 목전에 두고 정신적 가치의 회복과 중세 시대의 숭고한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블레이크의 낭만 정신은 &lsquo;한 정신질환적 두뇌의 폭발&rsquo;이라는 등 평단의 거센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19세기의 세기말에서 20세기의 68세대로 이어지는 상징주의 예술의 모종을 역사에 심었다.

기실 이 전시의 미덕은 블레이크 이후 20세기까지 면면이 이어진 현실 초월적인 상상력과 신비주의 예술의 계보를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의 동년배인 퓨슬리, 플랙스먼의 극적인 선묘화부터 19세기 중반 태동한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에 동참했던 콜린즈, 내쉬, 크렉스턴, 비어즐리 등의 디자이너들, 그리고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기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던 밀레이, 번 존스 등의 라파엘 전파 작가들의 작품들이 내걸려 블레이크의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 20세기 들어서도 폴 내쉬의 초현실적 목판화나 절규하는 듯 한 누드 천사의 이교도적 상상력을 내비치는 스페어의 잉크화, 2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는 인도 출신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자궁 모티브 동판화까지 거장의 상상력은 똬리를 치고 있었다. 그룹 이름을 &lsquo;인식의 문&rsquo;이라는 블레이크의 시구에서 따온 60~70년대 록그룹 도어스나 블레이크의 시와 회화에서 영감을 얻은 밥 딜런 같은 서구 대중가수들의 음악을 엠피쓰리로 들려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터다. 전시장에서 절절히 느낀 건 블레이크의 유산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길어 올리는 서구 근현대 예술의 유장한 저력이었다고나 할까.

발길을 돌리면서, 우리 예술계, 특히 미술판 작가들의 정신적 계보를 떠올려 보았다. 서구적 근대사조가 이식되면서 단절과 재적응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이 땅의 미술판에서 블레이크처럼 면면히 이어질 예술사적 유산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학예일치를 주장했던 추사 김정희의 예혼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간간이 터지는 위작 논란 말고는 지금 추사의 궤적은 너무도 미미하다.

최근 미술 언론들은 불황기를 맞아 일제히 미술시장에서 그간 값이 저평가된 고미술품들이 각광받는다는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고 있다. 이들 기사가 한결같이 주목하는 건 전통예술의 환금 가치다. 시장과 상품의 구호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지금 한국 미술판에서 옛것에서 새것 찾는 온고지신의 상상력을 맛보기란 막장의 백일몽에 불과한 것일까.

한낱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한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블레이크의 시 &lsquo;순수의 전조&rsquo;에서)



노형석필자 소개

노형석 편집위원은 홍익대 대학원(미술사)를 수료했고,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시사주간지 한겨레21 문화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겨레신문 문화부 대중문화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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