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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뮤직그룹 ‘공명’의 〈고원, 길 위에서 별을 만지다〉 공연이 지난 여름의 한가운데 평창문화예술회관에서 있었다. ‘바다’를 주제로 한 〈위드 시(With Sea)〉 공연 이후, 두 번째로 ‘고원’, 즉 산을 주제로 자연 속에서 창작여행을 하는 이들에게서는 음악과 삶의 연결매듭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장애예술인 국악그룹 ‘땀띠’의 〈땀띠 날다 2014〉 공연(8.21~24) 이끈 이가 ‘공명’ 멤버 중 한 명인 송경근이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대금이 20여년 뒤 현재의 그의 삶에서 연주인으로, 연주를 이끄는 이로, 또한 ‘음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창조적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인 대나무 작업으로까지 확장 돼 빠르지 않은 호흡을 지닌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하는 경우가 처음이라며 수줍게 입을 떼는 송경근. 그가 가진 개인적인 음악에 대한 그리고 예술인으로서 우리 사회가 ‘불편해 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들을 들어 보았다.

대나무, 내 음악과 삶의 중심

황보유미 ‘공명’ 멤버로서의 공연도 공연이지만 ‘땀띠’와의 공동작업, 그리고 공방작업들의 중심축에 묘하게 대나무가 들어 앉은 것 같다.


송경근 워낙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한다. 대금을 전공하면서 대나무를 만지다 보니 대나무의 습성을 알게 됐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보니 누가 대나무로 조명을 만든 것을 보고 나도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다. 대나무는 보면 특성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을 뚫거나 가공의 행위를 하게 되면 마른 후에 깨져버려서 그 점을 해결하는데 고심을 많이 했다. 파란색 대나무는 없고, 노란색 대나무만 있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늘에서 3년 정도 잘 건조된 대나무 중에서도 절반 정도는 깨져버리고 그 중에 잘 마른 것들을 사용한다. 그 상태도 다 마른 것은 아니어서 최대한 깨지지 않게 특수하게 말리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대나무가 마르면서 겉은 넓어지려고 하고, 속은 마르기 때문에 대나무에서 물이 빠지면서 퍽퍽 터진다. 그 힘을 분산시키려고 대나무 표면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이유와 함께.

황보유미 음악하고 대나무 작업과의 연관성이 있다면?

송경근 ‘공명’과 17년 동안 음악을 하니 좋은 점은 팀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좋은 반면 개인적으로 송경근이라는 이름을 어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대나무 공예다. 음악적으로는 팀 활동을 하면서 솔리스트 활동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나의 원칙은 팀에 피해를 안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니 혼자하는 대나무 공예가 가장 이상적이다.

대나무


황보유미 ‘공명’이 만들어질 때 서로의 음악의 지향점 혹은 철학이 어느 지점에서 일치를 했는가?

송경근 ‘공명’은 창작음악이 기반인 그룹이다. 처음에는 배우려는 생각으로 타악으로 구성된 곡으로 연주를 시작했었는데 그동안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월드뮤직그룹’이라 해서 범위를 넓혀서 활동하고 있다. 악기를 새롭게 만드는 것, 타악, 창작음악 이러한 구심 키워드들이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멤버 네 명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래서 창작 코드가 조금 더 맞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예고 출신은 전통을 따라 스승의 뒤를 밟으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국악원이나 관현악단에 들어가 활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명’은 그런 활동보다 우리가 만든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국악 창작곡은 국악기로만 창작한 곡들이 많았는데 ‘공명’은 서양악기를 무대에 함께 올렸다. 우리가 항상 듣고 왔던 음악이 서양음악이었고, 국악기만 가지고 관객을 어필하는데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희가 하는 음악이 국악이냐”는 질타를 많이 듣기도 했다.

황보유미 최근에는 로드쇼 형식의 창작활동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창작이 진행되나?

송경근 창작은 멤버 중 누군가가 모티브를 제시해 공동작곡을 하거나 한 사람이 100퍼센트 음악을 다 만들어야 한다. 전에는 그냥 각자 좋아하는 스타일대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한 5년 전부터 ‘자연’이라는 공통점이 생겼다. 멤버들 모두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공연 외에 놀러 간다고 하면 가족들 눈치가 보이지 않나. 그래서 다음 작품 만들어야 되는데 집에 “이번 작품이 ‘대나무’가 주제가 됐다”, “어쩔 수 없이 가야 된다”, “촬영을 2박3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촬영 하루 하고, 하루 낚시 하고 그런다. 그렇게 대나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잘 끝내고, 두 번째 작품 주제를 고민 하다가 ‘바다’가 된 것이다. ‘위드 시(With Sea)’라는 작품을 하면서 다양한 풍광들을 기록하다보니 너무 좋더라. 자연도 촬영하고, 여유도 생기고, 음악을 만들고. 음악팀이 자연을 주제로 하는 것은 기획하시는 분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과 ‘상업’은 매치가 잘 안되니까. 그런데 우린 운이 좋게도 ‘공명’ 대표도 그렇고 멤버들도 ‘자연’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불편한, 너무 불편한

황보유미 ‘땀띠’와는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나?

송경근 작년에 만났다. 학교 선배가 10년간 활동한 장애인 음악그룹의 창작음악 음반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얘기를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연희를 하는 현승우씨한테 오래 배워왔다. ‘땀띠’는 원래 연희를 하던 친구들이었다.

황보유미 지난 공연 때 멤버들이 처음의 멤버 그대로인가?

송경근 원래 다섯 명이 10년 동안 활동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우체국에서 일을하게 되면서 그만뒀다. ‘땀띠’ 멤버들은 할 줄 아는 게 사물놀이 밖에 없었다. 장애인음악그룹 음반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 음반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가 ‘공명’ 멤버 네 명과 ‘드림’이라는 퓨전국악팀 이렇게 다섯 명이 한 곡 씩 만들고 직접 녹음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래서 우선 연주자를 섭외해 녹음을 하고, 아이들이 그 연주를 듣고 학습을 한 후 연주할 수 있게 했다. 일단 음악을 만들어 놓고 이 음악을 토대로 연주를 할 수 있게 학습을 시켰다. 음반(<땀띠, 첫 번째 이야기>)이 다섯 곡이 수록됐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배웠던 연희 같은 걸 넣어서 10주년 기념 음반으로 제작했다. 반응이 괜찮았다. 아이들이 10년 동안 이루었던 팀워크가 있어서 잘했는데 한 명씩 무엇을 하는 것은 힘들다. 예를 들어, 상모를 돌린다든지, 이야기를 한다든지 하면 장애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셨던 분들은 불편해 하기도 하더라. 나야 아이들을 아니까 힘든 여건에서도 이렇게 한 것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내내 흐뭇했는데 공연 후 관객들 피드백을 조사했더니 “불편했다”, “연주만 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있더라. 그래서 아직까지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올해는 공연 중간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공연

▲장애예술인 국악그룹 ‘땀띠’의 〈땀띠 날다 2014〉 공연 모습


황보유미 장애아들에게 연주를 가르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송경근 장애 유명마다 특성이 있다. 다운증후군 같은 경우는 박자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징을 칠 때 첫 박에만 “징~ 징~”치면 되는데 지금도 그 박자가 안 맞는다.

황보유미 그래도 잘하던데. 그 정도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송경근 그러니까 그 친구가 노력을 많이 한거다. 처음에 쉐이커를 가르쳤는데 박자가 계속 안 맞는 거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건데 그 장애아 친구는 이 부분이 소화가 안되는 거다. 그래서 굉장히 어려웠다. 쉽게 말하면 쉐이커 하나 연주하기 힘든 친구가 쉐이커를 하고, 다음엔 윈드벨을 하다가, 다음에는 또 다른 악기로. 그러니까 연습 즉,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던 친구였다.

황보유미 공연 중 인터뷰가 좋았다. 우리한테 꿈을 물으면 나중에 뭐가 되고 싶고, 어디 살고 싶고 이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멤버들은 “엄마,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랑해요”라는 너무가 일상적인 것들이 꿈으로 얘기가 되니까 그게 더 감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송경근 한 친구는 뇌에 산소가 빨리 안 들어가서 하반신 기능이 저하되는 뇌병변을 갖고 있고, 다른 친구는 자폐아, 또 발달장애인 친구도 있다. 보기에는 멀쩡하다. 말하는 걸 봐도 장애가 있을까 싶은데 지능이 7~8살에 멈춰있다. 나도 이제 ‘땀띠’와 2년 정도 같이 작업을 하니 친구들의 습성을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연습하다가 누가 방귀를 뀌면 한 친구가 “야 너 방귀 뀌면 안돼. 이를거야.” 그러고 실제로 그 친구는 나한테 와서 이른다. 또 멤버들끼리 나한테 공연 후에 주기로 하고 몰래 꽃을 준비했는데 이 친구는 미리 “선생님, 이따 꽃 드릴거예요”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이 친구에게는 이게 장애다. 남한테 불편을 끼치지도 않고 일반인들처럼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학교 생활을 할 경우, 자꾸 이른다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만지지 말라고 해도 꼭 만지거나 이러니까 친구들한테 왕따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 제일 어려웠던 건 자꾸 도망을 가는 친구 때문이다. 그냥 연습하다가 튀어나간다. 그래서 공연 때 도망가면 큰일이니 그 친구 기분을 굉장히 잘 맞춰줘야 한다. 실제로 공연 때 안온 적도 있다.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송경근

황보유미 아이들에게 음반을 만들어주고 싶다던 지인의 요청에 의해서 시작했지만 실제 작업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들었을 것 같다. 아이들과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궁금하다.

송경근 선배누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한번 해 보고 싶긴 했었다. 재능기부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아, 안되는구나. 역시...’ 정말 쉬운 쉐이커 흔드는 거, 첫 박에 흔드는 게 ‘안 되는구나’하고 절망에 빠져있었는데 땀띠 대표분이 “항상 이렇게 천천히 아이들이 가는데 언젠가는 아이들이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나도 놀랐던 것이 어느 날 보니까 그게 되더라. 안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느리게 되는 것이었다. 남들이 한 번 연습하고 되는 것을 아이들은 열 번 연습해야 된다. 그러다가 또 안되고… 됐다가, 안됐다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음악을 하면서 학습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도망을 많이 갔다. 엄마가 끌고 와서 하니까 하는 건데 그래서 되도록 아이들과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다. 공연을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이들이 굉장히 행복해하고, 나도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있다.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을 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황보유미 현재 ‘땀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송경근 작년에 10주년 공연을 한 이후 공연이 별로 없었다. 올해 공연을 좋게 보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전문적인 장애인 단체 매니지먼트를 할 단체가 없다. 내가 기획 쪽은 관여를 안 해서 잘 모르지만 간혹 의뢰가 오긴 하지만 아직 큰 공연은 없다. 그게 안타깝다. 공연을 잘해놓고 쫙 연결이 되고 그래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장애인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리고 멤버들 각자 우체국 다니는 친구도 있고, 대학생도 있어 쉽게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땀띠’가 이제 공연을 온전히 1시간 반 정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공연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어머님들의 뜻은 ‘땀띠’가 단순히 공연만해서 돈을 버는 단체가 아니라 사회적 기업이라든가, 예술법인이 되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사진_관악창작공방을 비롯한 상설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2층


황보유미 공연의뢰는 주로 어떤 곳에서 연락이 오나?

송경근 많이 오진 않는다. 예를 들어 장애인 행사가 있는데 해달라고 하는 것들은 많이 있었다. 메이저 극장에서는 없었고. 소외 지역을 도는 지방 순회 프로그램이 있는데 ‘땀띠’ 친구들이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안된다고 하더라. 동아리 성격이 아닌 검증된 단체를 소외지역에 돌게 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갑자기 많은 공연을 하면 아이들에게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천천히 할 생각이다.



‘땀띠’ 멤버들이 신체를 움직이거나, 말을 할 때 ‘불편했다’는 관객들의 평을 들으면서 제롬 벨(Jérôme Bel)의 <장애극장>을 떠올렸다. 스위스 극단호라도 정신지체, 다운증후군 등의 장애인으로 이루어진 극단으로 우리가 ‘불편해’ 했던 몸을 움직이고, 마음껏 무대에서 그들의 이야기와 몸짓, 소리 등을 펼치면서 장애인들의 움직임을 여과 없이 다 보여준다. 즉,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괴이할 수도 있는 모습, 사회적 소수 혹은 약자들의 아픈-이것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내린 정의일 수 있지만-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양국의 예술그룹을 대하는 양 사회의 의식의 차이가 다만 우리의 장애에 대한 의식 수준이 뒤떨어져서일까. 상처는 마주해야 한다. 이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기사를 하나 읽었다. 기사의 타이틀은 “피땀 흘려 준비해도 설 무대 없는 장애인 예술단”으로 인터뷰이가 바라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장애에 대해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적 거리감은 사회의 장애 예술에 대한 수요 그리고 정책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해 발의된 장애인 문화예술 창작지원센터 설립 및 운영을 위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을 통해 2015년 4월 대학로에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문을 열 예정이다. 부족할지라도 이제 시작을 위한 첫걸음을 떼는 중이니 아무쪼록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사회가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보살필 것을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_송경근



김영일/김영일은 1993년 사진전문 출판사 ‘도서출판 일’을 창립해 40여 종의 사진집을 발간했으며, 2003년 영상전문 법인회사 ‘그루비주얼’을 창립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전통소리 공연, 녹음, 공연장 건립 등 7년간의 준비를 통해 2005년에는 음반/영상 전문회사 ‘악당이반(주)’을 창립했다. 1,400여 개 국악음원 마스터를 제작했으며, 78종의 우리음악음반을 제작해 국내외로 유통하고 있다.
사진_황보유미 필자소개
황보유미_[Weekly@예술경영]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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