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척박한 땅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강원도 땅은 진정 갑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우리 젊은 날에는 그랬다. 대학 시절, 바다를 간다 하면 그건 무조건 동해여야 했다. 그런 강원도 땅 한 귀퉁이에서 살게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었다. 강원도 땅에 오니 … 좋다. 살고 있는 춘천도 좋지만 공연이든 뭐로 출장을 간다 하면 인제, 평창, 속초, 강릉, 태백…. 뭐 이름만 들어도 좋지만 가서 보면 더 좋다! 이 좋은 강원도 땅에 와서 놀란 게 하나 있다. (한때 인기 학과로 참 많이 생겨난) 연극 관련 학과가 도내에는 강원대 삼척캠퍼스에 딱 한 군데 있다. 그런가 하면 국악과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자체적으로 새로운 물의 유입이 힘들단 얘기다. 모두 외지로 떠나야 한단 얘기다. 활동하는 연극인들 중 전업 연극인들은 5%도 안 될 것이다. 내가 이제 살아가야 할 강원도 땅에 이런 말 붙이기 뭐 하지만 정말 척박했다. 더 고민되는 건 그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하려는 의지도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땅에 강원도립극단이 올해 국공립극단으론 열세 번째요, 도립극단으론 경기도립에 이어 두 번째로 창단되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결론적으로 평창동계올림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세금(도비)을 들여 극단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서운(?) 도의회 의원님들의 질문에 강원도의 문화예술과 직원들은 답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강원도 공연예술의 발전...하는 아름다운 문장으론 턱도 없었을 것이다. 타 지역도 혹시 도립, 시립극단을 만들고 싶다면 그 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 민간 극단 지원해주면 될 것을, 구태여 세금을 들여 공립극단을 운영해야 하는가! 다행히도 강원도엔 평창올림픽이 있었다. 세계인들이 4년 뒤엔 몰려올 텐데 강원도에서 자력으로 문화잔칫상을 차릴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점을 모두 공감한 것이다. 그렇게 창단이 이뤄졌다. 다가오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 2013년 12월 24일(화) 재단법인 강원도립극단 창단식과 사무실 개소식 모습

문화올림픽과 강원 연극의 발전

강원도립극단은 정관에 나온 창단의 목적대로 이미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문화올림픽 실현을 위한 작품 개발과 동시에 강원도의 연극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원도에 지속가능한 유산을 남기자는 게 결국 겨울올림픽의 목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목적이 절대 평화롭지 않다. 문화올림픽, 즉 세계인들 앞에 내놓을 작품 개발에만 전념해도 예산과 시간이 부족한 터에 열악하고 척박한 강원지역의 연극 역량을 강화시키자는 것은 얼핏 보면 동시 충족이 가능해 보이지만 자세히 사업 구상을 하려다 보면 양립하기 쉽지 않다. 역량 강화를 위해선 단순히 좋은 공연 몇 편에 참여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강원의 공연인력과 자원을 2018년까지 국제 경쟁력 있는 자원으로 강화시키려면 지금부터 그 사업만 해도 부족한 기간이다. ‘강원인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국제적인 공연’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받아든 셈이다.

물론 올 초, 첫 출근한 필자에겐 그런 위대한 과제는 아주 나중 일이었다. 1월 2일 첫 출근하자마자, 내 책상 앞에 떨어진 오더(order)는 4월 말에 창단공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창작극으로. 그리고 그 소재는 ‘허난설헌’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넉 달 만에 쓰고 만들어 달란 공손한 의뢰였다. 난 도립극단 예술감독 임용 심사, 면접 자리에서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었다. 극작가로서 등단 19년 차를 맞은 소견으론 의뢰를 받아 취재와 공부를 거친 후 써야 하는 작품이라면 최소 육 개월은 필요했다. 그런데 두 달 만에 작품을 쓰라니. (심지어 허난설헌 배우들을 뽑기 위한 공개오디션을 할 땐 희곡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등장 확정된 인물들의 대사만 배포하여 오디션을 진행했었다)

모두 중략하고 (기적이다!) 정말 두 달 만에 A4 61페이지에 달하는 장막희곡을 탈고하여 24명이 출연하는 대무대의 연극 ‘허난설헌’을 4월 말에 춘천에서 창단공연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강원도 10개 도시를 순회공연했고 7월엔 경주에서 열리는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11개 도시 전석 90%에 가까운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지역의 특성상 생애 처음 연극을 보았을 분들이 객석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립극단 공연의 주 관객층 타깃을 실은 그분들로 잡았다) 목표대로 그분들이 눈물을 흘렸고 뜨겁다고 했고 강원도에서 이런 공연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했고 커튼콜 때 길고 긴 박수를 쳐주었다. (이런 말하기 매우 곤혹스럽지만) 창단 첫 공연으론 대성공이었다. (인터넷에 연극 허난설헌을 검색하면, 필자의 말이 아주 사기는 아니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눈 감고 땀 흘리는 이모티콘 첨부)

▲ 지난 1월 강원지역 연극들과의 간담회 모습(왼쪽)과 강릉 허난설헌 생가터를 방문한 배우들(오른쪽)의 모습

허난설헌

어쩌면 그녀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나도 그렇고 강원인들도, 대부분의 국민들도 “허난설헌? 누구야?” 이름만 대충 알지, 조선시대 여류시인 정도만 알지, 그녀의 삶은 몰랐다. 1월 한 달 동안 그녀에 관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느낀 울림이 컸다. 도립극단을 만든 강원도지사 최문순 (도립극단) 이사장은 강릉이 고향인 그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같은 경포대 출신인 신사임당과 비교하여 훨씬 드라마틱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예술적 천재였던 그녀는 봉건주의 사슬에 묶여 고통하다 27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러한 비극적 삶을 살다간 그녀를 책 속에서 세상 밖으로 꺼내고 싶어 했다. 강원도의 인물과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국내외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즐겼으면 했다. 순회공연 마지막 즈음에 객원 연출이었던 권호성 연출가는 그런 회고를 하였다. ‘우리가 판도라 상자를 연 느낌이다.’

▲ 강원도립극단 창단 공연 <허난설헌> 모습

허난설헌이 주는 그 인물 자체의 힘이 있었다. 400년 후손인 관객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눈물을 찍어낸다. 사실 시대와 불화하고 봉건적인 시댁 생활로 힘들어하는 천재의 이야기가 뭐 그리 새로울까. 자칫 뻔하기 좋은 드라마인데도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자신의 시를 울부짖으며 절규할 때 모든 관객들은 가슴이 짓눌렸고 머리가 짓눌렸다. 난 그걸 그녀 인생이 갖는 진정성의 힘이라고 보았다. 독일 연극 <보이체크>가 결론을 쓰지 못한 미완성 작품인데도 아직까지도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공연되는 명작으로 살아남은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 보이체크라는 비극적 인물이 지닌 단순하면서도 우리 정서 맨 아래 어딘가를 건드리는 무게와 진정성이 그 이유라고 본다. 허난설헌이 그랬다. 이 작품은 창단공연 이후 한 차례의 수정을 거쳤고 현재는 다시 한 번 변화를 거친 세 번째 공연본이 준비되어 있다. 그녀가 우리보다 중국에서 한시의 천재로 유명하듯이 우린 자신감을 가지고 2018년 세계인들 앞에서 선보이기 위해 더 다듬고 준비할 생각이다.

강원도립극단이 할 수 있는 공익적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은 존재 자체로 힘을 가진다. 예술은 손익을 기대하지 않는 투자여야 한다. 그런 명제대로라면 강원도립극단은 예술적인 공연만 고민하고 올려도 그 위상을 지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동계올림픽이 끝나면 어찌할 것인가. 서두에 밝혔듯이 창단 이유가 되었던 그 올림픽이 끝나면 그럼 도립극단은 사라져야 할까? 그럼 어떤 존재 이유를 가지고 도립극단은 역사를 이어가야 할까. 그것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또 하나의 고민이다. 국공립 극단의 예술감독은 극단을 자신의 전유물,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실현하는 곳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이것이 임명장을 받아든 내 기본 마인드였다. 공립극단이 가져갈 수 있는 공익적 역할은 무엇일까. 연극예술의 성취는 당연히 기본이요, 그 성취로 도(시)민이 어떤 행복감을 가져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강릉 허난설헌 생가 터에서 관람에서 그치지 않는 주말 상설공연을 기획한다든가, 강원도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선양 인물들의 삶을 공연을 통해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의 국민들을 상대로 널리 알린다든가, 지역 연극인들이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수원지 역할을 한다든가, 지역 청소년들의 연극 교육에 일조한다든가….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열심히 발굴하고 검증해 봐야 하는 숙제들이다. 또 많지 않은 강원연극 인력 중에서 우수 인력들을 모두 도립극단이 기용해버리면 정작 토착연극계는 더 허약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해결해야 한다.

▲ 강원도립극단 창단 공연 <허난설헌> 커튼콜 모습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강원도립극단은 창단되었다. 배우 단원 한 명 없이 예술감독, 조감독, 사무처장 세 명의 선출 상임단원만으로 그 많은 살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다행히도 우정이나 열정이 유비, 관우, 장비를 능가한다. 내년에는 DMZ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속초 출신 극작가의 창작극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다원공연으로 준비 중이다. 강원도립 국악관현악단, 도립 무용단과 더불어 콜라보(협업) 공연으로 올리는 것이다. 소리와 무용과 드라마를 결합한 다원공연이며 다분히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개발의 일환이다. 지켜봐 달라. 강원도 땅에 이제 막 꿈 많고 열정적인 도립극단이 하나 생겼다.

사진 제공_필자

프로필사진_선욱현 필자소개
선욱현은 전남 광주가 고향이며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92년 상경, 서울 대학로에서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고 95년엔 문화일보 하계문예로 희곡 등단했다. 등단 이후 19년 동안 30여 작품을 초연 발표했다. 선욱현 희곡집 1, 2, 3권을 냈다. ‘의자는 잘못 없다’, ‘절대사절’, ‘고추말리기’ 등이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한국희곡작가협회 상임이사, 서울연극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07년엔 극단 필통을 창단하여 대표를 지냈었고 올해 강원도립극단 초대 예술감독으로 임용되어 현재는 춘천에 거주 중이다.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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