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개발한 표준계약서 가이드북 《예술, 계약과 친해지기》(출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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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아름다움과 가치를 다루기 때문인지, 금전적인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공연계는 계약서를 체결하는 비중이 낮다. 2007년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공연계의 52%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계약을 체결한 사람들 중 30%는 구두계약이었다. 최근에는 공연계에도 계약을 체결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열악한 제작사나 대형 제작사에서도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도 내용이 빈약하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비중은 높아졌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출연료의 지급과 방식, 금액 등 기본적인 사항들만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계약서로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시 책임 소지를 명확히 하고 분쟁을 방지하기 힘들다. 필자는 2012년 한국예술경영연구소에서 개발한 ‘공연예술-표준창작계약서 시안’ 개발에 참여했으며, 2013년 이를 바탕으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보완한 표준계약서의 가이드북 제작에 참여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공연계에서 표준계약서의 현 위치를 살펴보려 한다.

표준계약서 왜 필요한가

‘갑은 을의 권리를 양도받는다.’, ‘갑이 을의 권리를 이용하도록 허락한다.’ 앞선 문장을 일상에서 구두로 사용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일상에서 두 문장의 의미는 을의 권리를 갑이 이용하겠다는 것으로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계약서상이라면 간단하지 않다. 권리를 양도한다고 하면 을이 다시 그 권리를 되찾을 수 없지만, 권리 이용을 허락하게 되면 계약 기간이 끝날 경우 권리는 다시 을에게 되돌아온다. 이처럼 계약서에서 양도와 이용 허락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비교적 간단한 예시를 들었지만, 계약서에는 의미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창작자들에게 계약서의 문구는 외계어처럼 낯설 가능성이 높다. 표준계약서는 각 계약 당사자들 간에 다루어야 할 기본적인 계약 항목이나 문구를 명시함으로써 좀 더 계약의 효율을 높이고, 계약의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한 이들에게 기본적인 틀을 제공함으로써 보호하고자 한다.

계약에 능숙하고 지식이 많더라도 몇몇 유명 창작자나 스태프, 또는 유명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제작사들의 관계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불균형한 관계로 인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든지,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출연자는 창작 팀의 요청에 따라 별도의 커버 연습에 참여하여 공연 기간 중 언제든 출연할 수 있도록 충분히 연습한다.” 표준계약서 시안을 개발하면서 실제 만났던 문항이다. 여러 역을 맡는 스윙이 아닌 앙상블 배우에게 다른 역할까지도 책임지게 하는 공정하지 못한 조항이다. 이런 사례를 막기 위해 한국예술경영연구소에서 개발한 표준계약서에는 2조 공연 개요 항목에서 공연명과 배역을 명확히 제시하도록 하였다. 2조에 제시되지 않은 배역을 협의 없이 지시하는 것은 부당하며, 다른 배역을 연습시킬 때는 그에 상응하는 계약이 다시 체결되어야 한다. 이처럼 표준계약서는 계약에서 상대적인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공연계 다양한 표준계약서 시안

표준계약서는 계약상의 상대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로 인해 공연계에서도 그동안 수많은 표준계약서 시안이 개발되어 왔다. 먼저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는 연극 공연 표준계약서와 뮤지컬 공연 표준계약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창작자와 제작자 사이의 저작권 이용 허락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계약으로 창작자 이외에는 활용이 어렵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표준출연계약서를 고용계약용과 도급계약용으로 나누어 개발하였다. 단체에 고용된 배우나 연주자들과, 작품에 따라 개별 계약되는 실연자들을 위한 표준계약서이지만 이 또한 출연자에 한정된다.

예술활동의 권익보호와 사회적 인식 제고/표준계약서는 특정 분야 또는 직군의 빈번한 계약 관계 수립을 위한 표준양식이며, 불공정한 계약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종의 준거로서의 기준을 제시하는 규범적 성격을 갖습니다. 무계약 또는 구두계약 관행, 계약 관련 전문 지식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계약서 작성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예술분야의 표준계약서를 개발하고 보급함으로써 사회구성원이자 직업인으로서 예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표준 계약 매뉴얼 보급 및 계약 관련 컨설팅을 통해 계약서 작성의 편리성을 제공하고, 계약관계의 이해도를 제고하여 계약서 작성을 활성화합니다. 또한 계약내용의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서 공정한 예술 계약의 준거를 마련해 나가고자 합니다.

▲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표준계약서 양식을 받아볼 수 있다. (출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

반면 2012년 한국예술경영연구소의 표준계약서는 공연계약의 형태를 창작계약, 출연계약, 기술지원계약으로 나누고 공연계 종사자 전반이 사용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개발하려고 했다. 창작 표준계약서에서는 주로 작가와 작곡가, 안무가 등 창작자의 저작권 이용에 관한 사항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즉 로열티 수혜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중요하게 담았다. 출연 표준계약서에는 공연 준비 기간과 공연 기간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복지와 처우에 관한 문제들을 중요 항목으로 정했다. 기술지원계약서에서는 기본적인 내용을 담았다. 기술지원계약의 경우 팀장과의 계약만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아, 팀장과 팀원 사이의 개별 계약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처럼 이미 공연예술 분야에도 여러 버전의 표준계약서가 개발되었고,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표준계약서의 효용성

이 표준계약서가 효용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실제 이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는 계약은 매우 적다. 이토록 다양한 버전의 표준계약서를 준비해 두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단체에서 개발한 표준계약서는 기준이 될 수 있지만 다양한 계약 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 가장 세분화한 한국예술경영연구소의 시안은 창작자, 실연자, 기술지원자로 나누어 표준계약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창작자 중 작가와 작곡가, 안무가의 입장이 다르고, 같은 작가라 하더라도, 극작가와 뮤지컬의 작가의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표준계약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계약의 형태에 따라 변형시키거나 각 상황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기존 시안들을 토대로 지금보다 더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표준계약서가 필요한 것이다.

표준계약서 시안 작성을 위해 창작자, 실연자, 제작자 그룹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창작자들은 저작권의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배우들은 연습 일정이나 공연 일정의 준수, 보험 가입, 지방 공연에서의 대우 등 복지와 처우의 개선을 표준계약서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 반면 제작자는 그런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한국에서 올릴 수 있는 공연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예술경영연구소 시안은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해 협의 항목을 만들어놓는 데 그치고, 구체적인 수치를 정해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는 선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예술경영연구소의 표준계약서는 제작사 입장보다는 상대적인 약자인 실연자와 창작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측면이 크다. 표준계약서는 계약상에서 예측 가능한 힘의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제작사로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표준계약서를 굳이 따를 이유가 없다. 게다가 표준계약서는 강제성도 없다. 이런 이유로 표준계약서가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표준계약서가 현실에서 좀 더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장용 표준계약서가 아닌 단체와 단체의 협약에 의해 책정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 제작사 협회와 작가 협회, 작곡가 협회, 배우 협회 등이 개별 조약을 맺고 표준계약서를 맺는다면 단체 간에 맺어진 표준계약서는 강제성이 생긴다. 그러나 현재 국내 공연계에 수많은 협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집단으로 목소리를 높이기에는 각 협회의 결속력이 부족하다. 단체가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 채찍이라면, 국가에서 시행하는 많은 지원 제도에서 표준계약서를 체결한 단체를 우대하는 것은 당근이다. 이러한 채찍과 당근은 오래전부터 논의된 일이지만 현실에서 적용하기는 녹록지 않다.

시안 작성을 위해 만난 한 배우는 계약서를 얼마나 제대로 만드느냐보다, 자신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계약을 위반했을 때 구제해주는 방안이라고 했다. 표준계약서에 지급 금액과 시기, 방식만 명기되어 있더라도, 그것만 철저히 지켜지면 본인은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공연계의 현실이다. 지금의 표준계약서는 백여 년 동안 싸워 오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해온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모델로 설정해 이상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표준계약서의 항목들이 열악한 공연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 결국 약자를 보호하고,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는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과 차이가 있더라도, 이를 통해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인식하고, 언젠가는 이를 제대로 이용할 날이 올 것이다.



참고링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분야 표준계약서보급

필자소개 필자소개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 연극원에서 연극학 전문사를 수료하고, 다양한 공연 칼럼 및 뮤지컬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 뮤지컬 작가 워크숍의 멘토로 활동 중이고, 한예종 음악극창작과에서 음악극 분석을 수업하고 있다.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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