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M의 리더 김성규 한미회계법인 대표이사

어느 수요일 저녁 8시, 서울의 모 대학 강의실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때, 모임에서 두목이라 지칭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DAM은 Do! Arts Management의 약자로, 10여 년된 모임이다. 모임 때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항상 참석자 소개로 시작을 한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네 분은 문화기획자이시고, 옆에 계신 분은 건설회사에서 홍보부장을 하셨던 분이다. 그 옆은 취업준비생이고, 또 그 옆은 인쇄하시는 분, 또 그 옆은 기자, 또 그 옆은 발레단에서 기획하시는 분들, 또 그 옆은 바이올린을 전공하시고… 또… 또….”

이처럼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하는 모임의 정체는? 김성규 회계사가 이끄는 DAM,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들이 모인 예술단체경영연구회였다. 올해는 ‘예술경영인의 달인’을 주제로 격주마다 예술경영 각 분야의 달인을 초대해 짤막한 강연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있다. 2015년 세 번째 예술경영의 달인, 특히 공무원과 협업의 달인으로 초대된 인재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예술감독의 이야기가 있던 날 《Weekly@예술경영》이 자리를 함께했다.

모든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부터

인재진 사실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받은 일이 전에도 한 번 있다. 십여 년 전에 어떻게 하면 공무원과 사이좋게 일할 수 있는지 강연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공무원도 사람이고 문화기획자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싶었다. 공무원들하고 일하는 얘기를 하라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에서 공무원들과 사이좋다고 소문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주 잘 지낸다. 혹시라도 가평에 오신다면, 저렇게 공무원들한테 대접받으며 일하는 사람이 있나 하고 놀라실 거다.

공공의 영역에서 문화예술과 관련해 많은 돈이 집행되고 있다. 돈이 있는 곳은 결국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시장을 좌우하는 사람은 공무원이고, 우리는 그들과 파트너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마음 한곳에서 공무원을 무시하곤 한다. 뭘 하자고 얘기했을 때, 공무원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내 깊은 기획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좌절하고 나온다. 그런데 공무원들은? 그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행정을 모른다고 한다. (웃음) 오늘 와서 예산 얘기하면 다음 주엔 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실제로 행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산 얘기하면서 ‘순세계잉여금’ 같은 말이 나오면 기획자들은 고개는 끄덕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아는 척, 센 척하고 체면 떨어지니까 대충 넘어가는 거다. 그러면 공무원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부터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연극의 3요소를 무대, 관객, 배우라고 하지 않나. 4요소는 뭘까? 무대, 관객, 배우, 정산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과 관련된 공공기금 사용에 있어 정산은 절대적인 요소다. 그걸 잘하려면 행정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공무원을 무시한다. 또 한편으론 자신이 굉장히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문화예술과 관련된 엄청나게 질 높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체면 같은 것도 생각하게 되고. 그런데 이쪽에서 일하면서 돈 많이 버는 사람 없지 않나? 그러다 보니 일종의 보상 심리도 갖게 된다. 자라섬 직원이 11명인데, 돈 많이 못 준다. 월급 보고 일할까봐 많이 못 준다고 말한다. (웃음) 그런데 실제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그건 위안받을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단 말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내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트너, 공무원을 무시할 게 아니라 이야기하고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나중에 정산한다고 둥근달노래방 같은 데서 영수증 끊어오면 공무원은 같이 일하고 싶겠나? (웃음)

공무원, 그는 누구인가?

인재진 공무원들의 업무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을까? 감사다. 일 열심히 한 거? 잘한 거? 열정? 다 필요 없다. 항목에 맞춰서 돈 잘 쓰고 10원짜리 하나도 틀림없이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공무원처럼 멋진 파트너가 없다. 돈 준다고 할 때 딱딱 준다. 그것도 현찰로 준다. 만약 못 준다고 해도 결재자가 출장 가서 고작 하루 이틀 늦어지는 거다. 하나 안타까운 점은 부가세를 포함해서 주는 거다. (웃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공무원보다 좋은 사람들은 없다. 단, 그들이 일하는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예산을 만들기 위해 의회에서 어떤 의원을 설득해야 하는지부터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가평군청 공무원들과 나의 관계는 한마디로 서로가 무얼 해줘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이다. 도로가 좀 울퉁불퉁하다고 하면, 바로 불도저가 온다. (웃음) 1회 때 행사는 다가오는데 예산이 너무 부족했다. 후원도 받아오고 군에서 입장료 받지 말자는 걸 억지로 우겨서 만 원씩이라도 받기로 했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과장, 계장, 주사를 모아놓고 당장 돈을 꿔달라고 했다. 2,000만 원, 1,500만 원, 1,000만 원씩. 공직 생활 수십 년 중에 업자가 돈 꿔달라는 건 처음인데 왠지 꿔줘야 할 것 같다면서 사업가 친구, 마이너스 통장, 부인한테서 그날로 돈을 만들어줬다. 그런데 애정이 없을 수가 있겠나. 모 아니면 도인데. 올해로 12년째 축제를 하고 있다. 수십 명의 공무원이 지나갔다. 담당 과장이었던 사람이 다른 과로 가면, 거기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고민한다. 고마운 일이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조직이다. 특히 홍보가 그렇다. 분당 처갓집에 가서 반상회보를 보는데, 자라섬 소식이 실려 있었다. 가평군하고 성남시가 자매결연을 해서 그런 거였다. 또 언젠가는 강남구청 전광판에 광고가 나왔다. 강남구와도 자매결연을 해서. (웃음) 실제로 이런 광고를 하려면 5,000만 원 이상 든다.

사람들이 공무원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쁜 접미사를 붙인다. 그런데 공무원은 어찌 보면 가장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박봉에 시달리며... 우리보단 낫지만. (웃음)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공무원은 외계인이 아니다. 집에 가면 가정이 있고 엄마고 아빠인 사람들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편견 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 모르는 건 서로 가르쳐주면 된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걸 알 기회가 없을 뿐

DAM 담당 공무원이 많이 바뀌지 않나? 특히 지자체장이 바뀌면 기존 행사나 축제는 일단 접고 새로 만들려는 측면이 있던데, 자라섬은 그런 일 못 겪었나?

인재진 자라섬은 지자체장이 누가 되든 정치적 영향을 전혀 안 받는다. 만약 받게 된다면? 군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않을 생각이다. 현재 지원받는 예산이 32~33%이고, 나머진 티켓 판매 등으로 맞춰진다. 행사를 조금만 축소해도 지원 없이 할 수 있다.

DAM 재즈에 대한 비전이 없던 지역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나?

인재진 2003년 강의를 하다 가평군청 문화관광과 말단 공무원을 만났다.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두 달 후 그거 가평에서 해도 되겠냐더라. 얼떨결에 가평에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간 데가 자라섬이다. 멋지다고 했더니 비오면 가라앉는 곳이라더라. (웃음) 집으로 돌아오면서 진짜 하자고 하면 어떡하나 고민을 엄청나게 했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니까 긍정적으로 바뀌더라.

그 공무원은 굉장히 특별한 공무원이었다. 축제 4회 때까지 승진도 마다하고 보직을 고수한 사람이다. 경기도 유력 신문사가 자기들이 하겠다고 쫓아왔을 땐, 군수 앞에서 만약 다른 데랑 하라고 한다면 당장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전문적인 행사라 전문기획자랑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축제가 끝날 때마다 우울증이 왔다. 너무 열심히 하니까 행사 때는 조증이 왔다가 행사 끝나면 울증이 오는 거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여행을 추천했더니 두 달 만에 그리로 이민을 갔다. (웃음) 실제로 이런 특별한 공무원들이 있다. 아니면, 모두 다 특별한데 그걸 알 기회가 없을 뿐이다.

꾹 참자, 안 되면 말고!

DAM 기획자들이 처음부터 공무원 조직의 시스템을 알기는 힘들지 않나.

인재진 내 최대 목표는 ‘지속 가능한 축제’였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언터처블한 상황이 올 거라고 확신했다. 사훈이 ‘꾹 참자’다. 또 하나는 ‘안 되면 말고’다. (웃음) 내가 지향하는 것은 ‘갑 같은 을’이다. 갑이 될 상황은 아니지만, 갑 같은 을을 항상 지향한다. 그건 대체재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치사하지만 그래도 쟤가 낫다”라고 말하게 하는 거다. 문화예술 종사자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말 아닐까.

DAM 동등한 관계에서 의견을 제시해올 땐 문제가 안 되는데, 지시 형태일 때도 있지 않나.

인재진 축제 초기엔 자라섬이 넓으니까 한쪽에선 서커스를 하고 중간중간 무대 바뀔 때마다 트로트 가수를 부르면 어떻겠냐는 얘기 진짜 많이 들었다. 그럴 때 얼굴색을 붉히면서 나의 깊은 기획 세계를 이해하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닐 경우 대체로 단편적인 제안을 하기 때문에 대세에 큰 지장이 없다. 성의껏 듣되 자기 것을 지키면 된다. 자라섬의 장점은 사실 프로그램에 있다. 나름대로 타협되지 않는 재즈만의 프로그램을 가진 것이 큰 경쟁력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DAM 누구도 축제를 뒤흔들 수 없는 위치에 온 것은, 결국 자라섬과 가평의 이미지를 제고한 데 기여했기 때문 아닌가. 축제로 인해 가평군민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효과는 크지 않을 것 같은데?

인재진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역 경제 활성화’는 영원한 숙제다. 자다가도 눈이 팍 떠지는 이야기다. 서울에선 ‘시민 참여’다, 두 가지를 덮고 나면 ‘일자리 창출’이 화두다. (웃음) 지역 경제 활성화는 요식업계에 종사자나 잡화점하시는 분들이 많이 얘기하신다. 자라섬 와서 냉장고 사고 파마하겠나? 그래서 지역 분들과 막걸리도 만들고 와인도 만들고 그 와인 끓여서 뱅쇼도 만들고 노력 많이 했다. 물론 이 축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돈을 버는 건 말도 안 된다. 북면 산기슭에서 밭농사 짓는 김씨 할머니가 재즈페스티벌이랑 무슨 관계가 있겠나. 그런데 도시에 사는 손주들이 오고 싶다고 하니 초대권 좀 달라고 하신다. 축제 덕분에 명절이나 생일이 아닌 때에도 손주들을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된 거다.

몇 년 전, 신종플루로 열흘 만에 460개 행사가 한꺼번에 취소됐다. 다 관 주도이기 때문이다. 자라섬도 어떻게 할 것인지 동네 사람들 불러 모아서 공청회를 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오셔서 우리는 해야 한다고 그러셨다. 결국 그해에 사람 진짜 많이 왔다. 다른 축제들이 다 취소돼서. (웃음) 그런데 가평 와서 신종플루로 죽었다는 사람? 아무도 없다. 경제적 이득을 유발하는 효과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이런 거다. “내가 재즈는 잘 모르겄지만, 우리 동네에 손주들이 오고 싶어 하는 멋진 행사가 있다는구먼.”

축제를 만드는 것은 결국

DAM 춘천마임축제, 과천축제 등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축제를 만드는 것은 결국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인재진 기획자로서 20년을 지내면서, 좋은 기획자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니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지 않는, 관계된 모든 사람이 즐겁게 일하는 것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매년 3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무대 위에 자원봉사자들을 모아서 사진을 찍는다. 또 모든 하드웨어 스태프들을 모아서 사진을 찍는다. 철수하느라 바쁜 사람들한테는 사진 안 찍으면 결제 안 한다고 하면 우르르 모여든다. (웃음) 그때 감사의 말을 전하고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자라섬 자원봉사자들 중엔 10년 차도 있고 11년 차도 있다. 평균 경쟁률이 7~8대 1이다. 돈도 안 주는데. 자원봉사자들에게 줄 수 있는 건 네 가지다. 프라이드, 친구, 경험, 그리고 티셔츠. 이 중에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티셔츠뿐이고 나머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가져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 너무 중요하다. 그게 전부다.

난 지금 내 삶이 정말 좋다.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면 욕심이다. 예전의 내 찌글찌글했을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그때를 생각하면 이렇게 삶이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기획해서 인재진이 제일 성공했다고들 말한다. 초년엔 성공과 굉장히 담쌓고 살았지만, 중년에 결혼도 하게 됐고, 말년엔 과거에 비하면 부자가 됐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 거다. 그러다 60살 정도 되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까 한다. 요리를 좋아하니 식당 같은 걸 하고 싶다. 그땐 20만 명 불러 모으는 것에 관심 갖지 않고 나 혼자 할 것을 하고 싶다.

사진촬영_박창현(Chad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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