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경기 불황이 예술계에도 큰 파장을 미치리라는 우려가 크다. 그러나 막연한 우려 이상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예술경영]은 경기전망을 벗어나 경기변동기 예술의 혁신 사례를 살핌으로써 거시적인 관점을 제안한다./ 편집자 주 연재순서: ⑤ 출판 “호황과 불황의 파고에서 어떤 책을 읽었나”

1998년 나는 IMF 구제금융 직후 연구소를 차렸다. 당시 출판계는 전체 매출 순위 1,2위의 서적도매상 등 수많은 도매상이 연쇄 도산하는 바람에 엄청난 충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급격한 사회변동은 새로운 마케팅의 기회라고들 말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소비자이며, 이들이 모여 시장을 이룬다. 따라서 사회변동은 가파른 시장변동을 의미하며, 사회구조의 변화는 수요와 소비패턴을 변화하게 한다. IMF 구제금융은 미국의 대공황과 비견됐다. 나는 이런 변화가 출판시장의 트렌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대공황 이후에 미국 출판시장에서 대중 소비변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때 참고한 책은 1997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찰스 패너티의「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자작나무)였다. 이 책은 트렌드와 히트상품으로 본 미국의 대중문화 100년사를 잘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소략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의 베스트셀러 순위표만을 놓고 내 나름의 추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의 환희와 제인 그레이의 서부이야기


나는 먼저 대공황 이전과 이후에 해마다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들의 명단을 찾아보았다. 1920년대 소설분야에서는 싱클레어 루이스와 제인 그레이가 가장 많이 등장했다. 일단 그들의 베스트셀러 목록의 내용을 먼저 파악해보았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들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1930년에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였다.「메인 스트리트」(1921),「배빗」(1922),「애로스미스」(1925),「엘머 캔트리」(1927),「도즈워스」(1929) 등 그의 작품들은 1920년대 내내 소설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했다.


문제는 제인 그레이였다.「숲속의 남자」(1920),「신비의 기사」(1921),「최후의 남자」(1922),「황야의 방랑자」(1923),「계곡의 함성」(1924) 등 그의 작품들은 싱클레어 루이스보다 더 인기를 끌었지만 작품 내용이 무엇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형서점에 가서 영국과 미국의 문학사를 뒤져도 그의 이름은 단 한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 번역가의 도움으로 당시 막 개설된 제인 그레이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작품들의 개요를 대강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최후의 남자」는 두 가문 사이의 피에 얽힌 결투극을 다룬 소설이다. 두 가문은 끝없이 싸움을 해왔고, 결국 불가능한 사랑을 약속했던 두 연인의 사랑이 없었다면 양쪽 가문의 가족 모두 결투로 죽고 말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계곡의 함성」은 한 퇴역군인이 애리조나 황무지에서 전쟁의 충격을 받은 한 퇴역군인이 자아를 헤매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은 비참했지만 아기자기했던 과거의 생활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결국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마저 포기하는 것이라는 진리도 깨닫게 된다.


제인 그레이는 전형적인 서부소설 작가였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흥분거리를 원하는 소년들과 문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란 성인 남자들을 자극할 만큼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능이 특별했고, 전달기술도 능란했다. 모두 54권의 소설을 썼는데 총 판매부수가 1천5백만 부나 됐지만 문학사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이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1920년대의 ‘환희’가 이런 작가를 키웠던 것이다.




불황기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언제나 불황은 여성들에게 더욱 심각한 영향을 준다. 장기간 지속된 미국의 대공황기에도 경제적으로 파산한 남편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부인과 딸들이 속출했다. 자녀를 부양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남자들이 결혼을 꺼렸기 때문에 결혼 못한 노처녀들도 넘쳐났다. 이 시기에 등장한 최고의 인기소설은 마거릿 미첼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였다. 소설이 나왔을 때 그녀는 무명신인이었다. 미첼은 맥밀란의 편집자가 애틀랜타의 지역 문인, 문학 지망생들과의 오찬장에서 우연히 만나 발굴한 사람이었다.


당시 출판역사의 기록을 모조리 갈아 치운「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불륜소설’이었다. 남북전쟁과 전후의 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오하라 스칼렛은 연약한 이상주의자 애쉴리 윌크스와 물질주의적이며 행동가인 레드 버틀러의 사이를 영악하게 넘나들면서 살아남기에 목숨을 건다. 불황기 위기에 몰린 여성들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한 소설이었기에 이런 대형 성공이 가능했을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실락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표지




헛헛한 마음에 스며드는 &lsquo;불륜&rsquo;이야기,
「실락원」「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이렇듯 제인 그레이와 마거릿 미첼을 비교하니 대공황기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lsquo;잃어버린 10년&rsquo;이라 불리는 일본의 버블 붕괴시기를 살펴보았다. 일본에서는 불륜소설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와타나베 준이치의「실락원」이 일본 출판 역사상 최초로 300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쾌거를 낳았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 당시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소설을 살펴봤다. 가장 인기를 끈 소설들은 역시나 &lsquo;불륜 코드&rsquo;를 담은 소설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소설이 당시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은희경의「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였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진희는 &lsquo;보여지는 나(보이고 싶은 나)&rsquo;와 &lsquo;바라보는 나(진짜 나)&rsquo;로 분열된다. &lsquo;보여지는 나&rsquo;는 &ldquo;애인이 많은 자유분방한 이혼녀, 남자를 쉽게 잊는 냉정한 여자, 육 년 동안이나 같이 산 남편과 이혼 수속을 마치고 와서도 보충수업까지 하는 독한 여자, 사랑하면서도 헤어짐을 무릅쓰는 강한 여자&rdquo;다. &lsquo;진짜 나&rsquo;는 &ldquo;그리우면 몸을 던져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혈질의 여자, 올드 팝을 좋아하는 감상적인 여자, 부딪쳐 보기 전에 먼저 포기해 버리는 비겁한 여자, 상처를 입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리 대범한 척하는 여자&rdquo;다.


소설 속에서 진희는 &lsquo;보이고 싶은 나&rsquo;를 강화한다. &ldquo;애인은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rdquo;으며 대학교수 신분임에도 &ldquo;순정과 집착을 혐오하며 바람처럼 가볍고 분방한 사랑&rdquo;을 선호한다. 이 소설은 당시 한 애인과 모텔에 들러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껌이 붙어있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 독자들로부터 바로 &lsquo;자기 이야기 아니냐&rsquo;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였다.


1998년에 출간돼 밀리언셀러가 된 양귀자의「모순」(살림)의 25세 주인공 안진진은 돈은 있지만 무미건조한 남자와 돈은 없지만 즐거운 남자, 즉 &lsquo;현실&rsquo;과 &lsquo;몽상&rsquo;을 상징하는 두 남자를 놓고 저울질하다 결국 현실을 선택한다. 그 길은 자살을 한 이모가 유서에서 &lsquo;무덤 속 평온&rsquo;이라 지칭하면서 결코 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길이다. 그러나 안진진이 그 길을 선택하는 모순을 저지른 것은 다른 의미의 &lsquo;불륜&rsquo;이었다. 또 당시 빠르게 10만부를 돌파한 전경린의「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문학동네)은 남편의 외도 때문에 유폐의 나날을 보내던 여주인공 미흔이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의 첫 섹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살아남으려면?「익숙한 것과의 결별」!

비소설에서는 처세술이 떴다. 달리 말하면 자기계발서다. 미국에서는 데일 카네기의「친구를 얻고,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그야말로 방방 떴다. 홀로 살아남는 독단적인 생존방법보다는 주위와 더불어 행복하게 자기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공식을 제시해 당시 대중을 휘어잡았던 &lsquo;카네기 처세술&rsquo;은 출판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하루야마 시게오의「뇌내혁명」이 떴다. 이 책은 당시 우에다 야스오라는 학자로부터 &ldquo;버블경제가 붕괴한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긍정적인 사고를 해나가면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는 환상을 제시했다&rdquo;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구본형이라는 스타를 낳았다.「익숙한 것과의 결별」(생각의나무)에서 &ldquo;변하라.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rdquo;라는 메시를 외친 변화관리전문가는 그 후 몇 년간 한국의 자기계발서 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저자가 되었다.


IMF 구제금융 직후에는 정신적 공황에다 물질적 공황까지 겹쳐져서 인간의 마음이 매우 황폐해졌다. 총체적 공황 상태에서 대중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런 대중이 불륜소설과 새로운 유형의 처세술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뇌내혁명>, <엄마를 부탁해> 표지




자기계발에서 자기치유로, 그리고「엄마를 부탁해」


그렇다면 IMF 구제금융 시기와 지금의 위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1998년에는 동아시아가 쑥대밭이 되긴 했지만 전 세계가 한꺼번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촉발된 전 세계적 위기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인 것이다. 또 1998년에는 기업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고금리정책으로 말미암아 취약한 기업들이 마구 쓰러졌지만 &lsquo;가진 자&rsquo;들은 그런대로 고금리라는 호시절을 맞아 적지 않은 &lsquo;불로소득&rsquo;까지 취할 수 있었다. 마침 그즈음 불기 시작한 벤처열풍에 편승해 일확천금을 획득한 성공한 기업가들이 줄줄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없는 자들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유 있던 사람들에게마저 위기다.


그래서 지금 개인은 남을 배려할 여유가 전혀 없다. 그것은 불황기마다 인기를 끄는 감동서들의 차이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1998년에는 잭 캔필드의「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이레) 같은 남들을 배려하는 &lsquo;우리&rsquo;의 이야기를 즐겼다면, 지금의 나는 &lsquo;응원&rsquo;을 받는 나, &lsquo;위로&rsquo;를 받고자 하는 나를 다룬 책만을 찾고 있다. 자기치유self-healing의 도도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올해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창비)에 등장하는 가족은 한없는 그리움의 상징이 아니다. 서로 상처를 주는 가족일 뿐이다. 가족 구성원끼리도 대립관계를 형성하는 고독이다. 이 소설은 이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아니 홀로 서야 하는 개인의 절대고독을 그리고 있다. 이 시대 개인의 정서에 너무나 잘 부합하는 이 소설은 빠르게 밀리언셀러의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기호

필자소개
한기호는 출판평론가이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면서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의 발행인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위기의 책, 길을 찾다」「책은 진화한다」「디지로그 시대 책의 행방」「열정시대」「한국출판의 활로, 바로 이것이다」「디지털 시대의 책 만들기」「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출판마케팅입문」「희망의 출판」「우리에게 온라인서점은 과연 무엇인가」「e-북이 아니라 e-콘텐츠다」등이 있으며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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