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탕에 노란색 무늬를 박은 화려한 봉투가 우편물 사이에서 눈에 띠기 시작한 것은 지난 해 찬바람이 불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보니 공연 보도자료. 화려한 봉투와 달리 그 봉투에 담아 날아오는 소식들은 대부분 작은 규모의 연극공연들이었다. 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토니상이니 이브닝스탠더드니 하는 나라밖 ‘권위 있는’ 연극상을 방금 수상한 따끈따끈한 신작공연들도 아닌, 대부분은 소극장에서 올라가는 동인극단들의 공연이거나 ‘젊은 연극’들이었다.

그 봉투의 송신자는 ‘바나나문프로젝트’. 회사 이름도 봉투 디자인처럼 발랄하다. ‘자 나를 꼭 기억해’라고 말하는 듯 한 첫인상에서,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감각과 야무진 꿈을 가진 야심만만한 기획자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작 배정자 대표를 만나고 보니 그런 첫인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해 말기를. ‘야무진 꿈’이 없다거나 ‘야심만만’ 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니)


스스로 소모되지 않기

배정자
바나나문프로젝트는 배 대표가 독립해서 처음으로 꾸린 회사이다. 그러니 ‘이제 막 시작한’이라는 단서가 영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 대표는, 대학로에서 기획을 한 것이 올해로 꼭 10년째인, 중견 기획자이다. “너무 어렸을 때 시작해서 함께 일해 온 동료들보다 나이가 적지만”, 되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 왔다. 문화아이콘, 투비컴퍼니 등 대학로 연극 기획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획사들에서 일했고 문화아이콘 시절 혜화동1번지 3기 동인들의 작품을 맡으면서 그것을 인연으로 극단 여행자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듀서, 홍보, 마케팅, 그 외 기타 등등의 역할로 2006년 첫 회부터 제4회를 치른 올해까지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을 만들고 있다.

지난 10년 간 극단, 기획사, 축제까지 공연기획과 관련된 다양한 장에서 일해 온 셈이다. 규모 있는 회사의 무게 있는 직함이나 (그녀는 바나나문프로젝트의 ‘대표’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실장’이라는 직함을 쓰고 있다.) 학위처럼 이력서 경력란이나 학력란의 한두 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짜배기 경력이다. “계획을 세우고 직장을 옮기거나 일을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다음 계획을 생각하기보다 일단 지금 일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 또 우연히 다른 일이 찾아왔다.” 예를 들면 극단 여행자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투비컴퍼니의 이봉규 대표를 만나 투비에서 일하게 되는 식이다.

“처음 보도자료를 쓸 때는 누가 시킨 일도 아닌 데 작품과 관련된 책도 읽고 그러면서 작업했다. 단지 일이 숙달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일을 통해 내가 배우고 성장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모습이 자판기 같았다. 워낙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다 보니 그냥 나의 숙달된 기능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것이다.”

단지 매너리즘이라거나 과다한 업무량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녀는 주로 대학로 연극공연의 기획자로 일해 왔다. 소규모 공연들이다보니 홍보마케팅 예산이라는 것은 한정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렇게 소진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녀는 새로운 장으로 스스로를 옮기고 새로운 일을 벌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온 것이다.

스스로 긴 안목으로 계획을 꾸리고 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온 활동들이 보여주듯이 선택의 순간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서는 주저함이 없다. 주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일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미래의 설계도를 탄탄하게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을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배정자 대표는 자신의 일에서 스스로가 소모되지 않도록 신중한 선택을 해왔다 할 것이다.


“내가 볼 수 있는 또 다른 틈”

2000년대를 경과하면서 예술기획경영이 전문영역으로 분화되면서 그에 따라 전문인력의 유입도 늘었다. 그러나 많은 기획경영인들, 특히 대학로 소규모 공연의 기획경영인력들은 대부분이 배우, 연출 등 창작작업으로 공연계에 입문했다가 기획분야를 선택한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 분야에 대한 신념으로 때로는 이런 저런 연극계 환경이 떠맡긴 의무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배정자 대표는 대학 극회 출신이면서도 연우무대 막내 기획으로 연극기획을 시작한 이래, 쭉 기획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선택을 보면 요즘 기획경영분야의 관심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2000년대 초반 기획경영 영역이 분화되는 초기 모습은 홍보마케팅 대행을 주 업무로 한 기획사들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모습은 지자체 등의 공공극장, 문화재단 등의 문화행정, 대규모 상업프로덕션 등이라 할 것이다.) 문화아이콘, 투비컴퍼니 등 그녀가 일했던 곳들도 그러한 흐름에 있던 곳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주 업무는 홍보마케팅이 아니다. 제작에 큰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활동 경력이나 규모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단지 관심만이 아니라 이미 극단, 극장 등 제작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곳도 있다. 이다, 투비컴퍼니 등이 그렇다. 이들이 대중적 연예물과 구별되는 상업공연의 영역을 모색하고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공연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는 기획경영 분야에서 큰 관심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배 대표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 같다. 마치 연어처럼.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질 못하는데다가 일단 사고 먼저 치고 보는 식이다”, 라고 스스로는 말하지만 꼭 10년을 채운 지금 그의 계획은 아주 분명하다. 바나나문프로젝트도 일단 사고 먼저 치고 보는 식으로 만들었고, 일에 계획성도 없다보니 지금은 혼자서 전화 받는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식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사고를 치게 된 이유는 ‘10년은 해 볼 생각’이라는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 때문이다. 다른 일을 하면서 페스티벌을 만든다는 것이 그저 판만 펼쳐놓고 책임지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단다.

불편한 마음이 비단 성실성에 대한 의무감 때문일까. 처음 시작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연극이 얼마나 다양한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것, 그것이 페스티벌을 만들고, 직장을 옮기고, 회사를 만들고,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영 능력’이야, 라며 고심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듀서는 소통의 매개자

현장기획경영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팁을 건져야 한다는 인터뷰어의 의도 때문에 마케팅에 대해 물어보면 “마케팅을 잘 못한다”라고 그녀는 답했다. 그런데 그 말의 뉘앙스는 자신 없음 이라든가, 겸손함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마케팅이 기획경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서브텍스트가 읽혀졌다. ‘10년은 쭉 해볼 생각’이라는 피지컬씨어터를 일구는 것이 지금 그녀의 목표일까.

배정자

“극단 여행자에 있을 때 국제페스티벌 등을 다니면서 다양한 공연들을 봤다. 재미있는 공연들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공연도 있었다. 내가 이제까지 대학로에서 했던 작업은 연극의 아주 작은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도 어떤 연극적 이념이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좀더 다양한 공연을 봤으면 하는 희망이랄까. 그런 내 희망이 대학로를 좀더 풍성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틈 그것이 계속 나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그게 중요하다.”

배 대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틈’이란 어떤 형식, 어떤 분야, 어떤 특정한 가치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작업과정에서의 문제라고 말한다. 기획이 하나의 분화된 영역이 되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수익모델이라기보다는 창작자와 파트너십으로 일하는 기획자라고 말한다.

“프로듀서라면 상업공연만을 떠올리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드라마터그의 역할도 가능한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드라마터그의 역할과는 다를 것인데, 작품과 관객, 그 사이에 있는 소통의 매개자가 필요하다.”

공연을 보고 극장을 막 나서는 관객들을 맨 처음 맞는 것은 기획자이다. 채 지워지지 않은 표정만으로도 관객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다. 또 홍보자료나 공연에 대한 문의 등 관객들의 반응을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기획자가 창작자들과 좀더 튼튼한 파트너십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마케팅이나 경영능력도 중요하다. 재정적인 책임도 가져야 하니까. 근데 마케팅은 참 어렵다. 비가 와도 안 오고, 날씨가 너무 좋아도 안 온고, 추워도 안 움직이고, 더워도 안 움직이고, 축구하면 완전 텅 비고 ...”

그녀의 말처럼 작은 규모의 소극장 연극에서 홍보마케팅의 획기적인 툴을 개발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널리 알리는 방법에 매달리기보다는 소통의 매개자로서 창작자와 관객과 좀더 긴밀하게 다가가서 작업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녀의 말에 믿음이 간다. “결국은 작품이 중요하다.” 그렇다. 그래서 좋은 프로듀서가 중요하다.




김소연

필자소개
김소연 편집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 위원,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평론을 쓰고 있다. ‘상업지구 대학로를 다시 생각하다’‘이 철없는 아비를 어찌할까’ 등의 비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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