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연극, 뮤지컬) 현장에서 수도권과 지역을 막론하고 영국, 미국, 러시아 희곡을 무대화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전문 공연단체의 공연뿐 아니라 대다수 입시와 대학교육 전반에도 번역 대본이 중심이 되는 교과과정이 주를 이룬다. 물론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검증된 대본을 공연화하는 것만큼 좋은 실습교육은 없다. 특히 복제 불가의 일회성 공연에서 잘 쓰인 연극 대본과 뮤지컬 악보는 훌륭한 제작 설계도이다. 이런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 환경을 선 체험하는 것은 창작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지역 공연 환경에서 벤치마킹과 진출의 대상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제작 환경과 관객 시장이었다. 양적으로 우위인 작품과 인적자원의 밀집은 더 많은 시행착오의 총량만큼 질적 성장도 견인하고 있으니 배우고 진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가운데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진행한 뮤지컬 전문프로듀서 글로벌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뮤지컬만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웨스트엔드(West End)의 제작과 시장 환경을 살펴보고 본격적으로 진출을 모색한다는 것은 지역 공연 제작자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 지역 제작자로서 제작 환경에 변화를 주고 목표를 구체화하는 것은 무겁지 않은 또 하나의 즐거운 과제가 되었다.

뮤지컬 전문프로듀서 글로벌 역량 강화 프로그램 현장(photo by jason Um)

한국 뮤지컬의 영국시장 진출 가능성에 관한 제언

목표가 구체화되면 전략은 세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 뮤지컬 시장의 양대 산맥이 영어권이라면 창·제작 단계부터 영어로 설계할 수 있는 대본 과정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언어의 한계는 곧 목표시장의 한계다. 과연 번역만 된다면 문제는 해결될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언어가 동시대의 문화와 보편적 리얼리티를 담는 그릇임은 잘 알고 있지만 언어에는 문화권의 특수성도 담고 있어서 번역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대사와 가사만으로 공연시간 내에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언어권의 관객에게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보편적 리얼리티’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이다. 런던에서 만난 현지의 프로듀서들이 한국의 새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는 우리만의 차별화된 스토리에 담긴 ‘보편적 리얼리티’를 전제로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다. 그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초기 창·제작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 뮤지컬의 영국시장 진출을 위한 단계적 접근

연수를 통해 영국의 뮤지컬 신작 개발 과정과 사례를 바라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신작 대본 개발을 수익모델로 운영하는 전문 프로덕션이었다. 공연제작과 유통에서 초기 개발과정만 분리해서 전문화하는 사례는 해외진출을 위해서 국내에서 혹은 지역에서도 도전해 볼 만하다. 물론 국내에서도 공공기관뿐 아니라 기업과 학교, 프로덕션에서 눈에 띄게 대본 개발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장기적 투자를 통해 개발에 집중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스토리를 개발하고, 낭독과 수정·보완 워크숍, 그리고 낭독 쇼케이스를 반복하는 과정을 위한 세밀한 전략과 집중된 투자 병행이 더욱 필요하다 하겠다.

14일간의 연수에서 만난 현지 프로듀서들의 개개인 경험과 역량을 통해 영국의 뮤지컬 시장을 살펴보고 진출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영국의 오랜 뮤지컬 역사를 통해 축적된 뮤지컬 산업 인력의 촘촘한 연대와 견제가 오늘의 영국 뮤지컬을 세계 최고의 시장으로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다. 공연 전반을 구성하는 전문 인력과 각각의 역할에 따라 나누어진 협회 조직이 뮤지컬 산업에서 개인을 보호하고, 협회 간 견제와 상생을 통해 단단한 협업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협회 조직 간의 선명한 보호 규정은 공연 제작과 유통을 통한 건강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프로듀서 개인 간의 촘촘한 연대와 견제, 공연산업 내 공공의 역할과 지원(예: 공공지원을 통한 관객 데이터 전문 기업) 등은 영국에서 뮤지컬 공연이 차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산업 비중만큼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뮤지컬 산업을 성장시키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뮤지컬 전문프로듀서 글로벌 역량 강화 프로그램 현장(photo by jason Um)

한국 뮤지컬의 영국진출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신작 개발 과정에 영국 시스템과의 연대가 가능하다면 영국 뮤지컬 시장 진출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진출’의 의미는 완전 상품을 내어놓는 것 이외에 대본, 음악, 인력, 디자인, 시스템, 데이터 등의 진출로도 확장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영국의 뮤지컬이 국내에 소개되고 유통되는 여러 방식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끊이지 않고 국내에 공연되고 런던과 에든버러의 현대연극과 뮤지컬이 국내에서 재창작되고 공연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산업 전반에 걸쳐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 진출의 중심에 영국이 중요한 이유가 시장의 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 진출을 모색하는 프로듀서라면 영국 현지 프로듀서와의 연대를 통해 현지의 축적된 인적 자산과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진출을 위한 본격적인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항상 첫걸음이 가장 어렵다. 특히나 지역의 현실에서 상호 교류 방식이 아닌 해외 유통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본 개발부터 ‘진출’을 적용한다면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거기다 위에서 말한 해외의 창작자, 제작자들과의 협업까지 가능하다면 더없이 좋은 환경을 구축하는 셈이다. 영국의 창작진이나 제작진과의 협업을 위한 문을 두드리고 싶다면, 8월 축제 기간 에든버러에 머물기를 권한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창작자들과, 제작진들이 눈앞에 있고, 그들과의 협력과 신뢰를 위한 기반을 다지기에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다. 끝으로 영국 현지의 프로듀서와 런던 웨스트엔드를 거닐며 들은 이야기 중 현재의 웨스트엔드를 있게 한 한마디를 전한다. “웨스트엔드 거리를 또 다른 말로 피의 거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긴 시간 동안 극장 외관에 걸린 간판이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흘렀을 수많은 프로듀서의 피와 땀의 거리라는 말이지요.”

  • 필자소개

    심문섭은 부산에 위치한 ㈜예술은 공유다의 대표이며, 어댑터시어터의 프로듀서이자 연출가이다. 어댑터국제공연예술네트워크의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문화재단정책협의회와 부산시 문화예술협력위원회의 위원을 맡고 있으며 부산국제무용제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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