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분명, 매번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백지 위에 그려진 문자를 읽고, 2차원의 막연한 상상력만으로 여행을 계획한다. 같이 동행할 동지들을 모은다. 이제 그 여행의 최초 주동자가 누구이든, 그것이 우아한 와인파티와 꿈에 그리던 시원한 선상풀장에 몸 담구기를 보장하는 환상적인 크루즈여행일지, 까진 새끼발가락에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냄새나는 진흙탕을 걸어야만 하는 여행일지 모르지만, 기획자,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수많은 파트의 디자이너들과 크루들로 이루어진 이 집단은 여행을 떠나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시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의 상태,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극여행을 더 멀리 해외로 떠난다- 제곱의 여행을 하는 셈이다.

해외여행의 재미는 지구 다른 편의 이국적인 풍광과 음식을 맛보는 것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의 의미는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는 데 있다. 여행지의 현지인들과의 만남에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아니면 생활 속 사소한 고민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야 말로 진정한 여행의 의미와 기쁨을 느끼게 한다.

해외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우문일지 모르나, 나는 매번 해외공연을 떠날 때마다 우리가 그려내는 공연을 언어와 관념이 다른 러시아, 폴란드, 뉴욕, 칠레, 인도의 관객들이 과연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모험심을 가지게 된다. 문화교류라는 이름으로 그저 한국의 전통예술을 소개하거나 서구의 연극을 한국은 현재 이렇게 소화하고 있다는 동시대성의 증명만이 아닌, 진실로 그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이 만나고 공유하는 연극여행의 참 목적이 성취될 수 있을까?

이번 여행은 인도 첸나이에서 개최된 &lsquo;2009 힌두 메트로플러스 씨어터 페스티벌(The Hindu Metroplus Theatre Festival)&rsquo;의 극단 서울공장의 <두 메데아> 공연을 위해 이루어졌다. 인도전역과 해외에서 초청된 그리스비극, 인도극단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셰익스피어 번안극과 미국 오프브로드웨이 코믹 풍자극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초청된 페스티벌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인 우리 한국의 작품을 하이라이트인 폐막작으로 선정하며 그만큼의 기대를 보여주었다.

힌두 메트로플러스 씨어터 페스티벌 행사장

첸나이 공항에 도착하니 갑자기 없던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다. 공항 출구의 광경은 인천공항에선 볼 수 없는 상상 속 옛날 풍경이다. 그립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들의 외침, 감격적인 가족의 상봉과 자동차들의 소음, 후끈한 열기 그리고 사람냄새에 비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우리를 초청한 인코센터(The INdo-KOrean Cultural and Information Center)의 멋진 청년 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이후로도 우리가 인도에서 만난 가장 잘생긴 청년이었다.) 카트 십여 대에 짐을 싣고 백여 미터 떨어진 차량으로 모두 이동한다. 공항 앞인데도 불구하고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엔 돌덩이와 물구덩이가 가득하다. 사람과 차들이 뒤엉켜 길을 만들면서 진행해야 한다.

빗물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순간, 염려대로 카트 하나가 뒤집어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질러진다. 아, 얼마나 많은 짜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번 여행의 화두를 결정한다. &lsquo;편리함과 쾌적함에 길들여진 나를 둔화시켜라.&rsquo; 차창 밖으로 펼쳐진 시내 풍경은 비가 와서 더 그런지 무척이나 암울하다. 두려움이 더 커진다. 그러나 염려와는 달리 도착한 호텔은 그들의 표현대로 &ldquo;첸나이에서 가장 물 좋은&rdquo; 곳이다. 호텔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기 위해 줄줄이 &lsquo;현대&rsquo; 마크를 단 승용차에서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내린다. 듣던 대로 인도는 빈부와 신분의 다름에서 오는 여러 가지의 삶이 뒤엉켜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후로도 초청 측의 극진한(?) 케어를 받았다.

우리는 도착한 날 밤샘작업으로 셋업을 하고 다음날 공연을 치러내야 했다. 마침내 막이 오르고, &lsquo;서 무타 벤카타수파 라오 콘서트 홀&rsquo;(Sir Mutha Venkatasubba Rao Concert Hall) 의 1100여석을 꽉 채운 인도인들 앞에서 우리화된 그리스 비극 메데아의 사랑과, 슬픔을 노래한다. 참으로 신비한 일은, 공연이란 것은 매회 그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칠레에서의 공연이 그 나라 사람들의 성정(性情)처럼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다면, 인도에서의 공연은 너무나 애잔하다. 음향 부스에 있던 나는 공연을 보면서 시종일관 눈물이 흘렀다. 몇 백번 본 자기 공연을 보면서 운다는 것이 현지 스태프들에게 민망해 눈을 비비는 양 하면서 눈물을 감추던 나는, 주변의 관객들을 둘러보았다. 반응들이 조용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들도, 특히 사리로 얼굴을 두른 여자관객들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하, 그렇다. 인도인들은 드러내어 표현하기보다는 안으로 느끼는 내면의 정서가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공연도 그런 천여 명 관객의 영향을 받아 변화한 것이다.

너무나 짧았던 일정 탓에 공연 후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며 우리를 초청한 인코센터 디렉터 라티 자퍼(Rathi Jafer)와 식사를 나눴다. 인코센터는 인도와 한국의 문화교류를 위한 민간기관으로서, 첸나이 자동차산업을 이끌고 있는 현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곳에 가니 작년에 왔던 극단 &lsquo;여행자&rsquo;의 흔적이 배어있다. 작년 그들의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었기에 올해 공연 또한 신뢰 속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작품을 위해 깊은 헌신과 노력을 기울인 인코센터에 사랑과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지금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다. 해외공연에 있어 이와 같은 문화적 이해와 신뢰를 지닌 민간기관의 역할은 너무나도 크다.

<두 메데아> 인도 공연 장면

라티 자퍼와 식사를 하며 나눈 이야기 중에 신라의 &lsquo;석탈해 설화&rsquo;에 관한 것이 있었다. &lsquo;석탈해&rsquo;가 인도에서 건너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놀랍게도 그녀는 인도에선 그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라고 했다. &lsquo;석(Sok)&rsquo;은 고대 인도의 뛰어난 목공예가로서 한국에 건너갔으며, &lsquo;달애(Dal-eh)&rsquo;는 인도어로 &lsquo;명장(Meister)&rsquo;이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도와 우리는 엄마, 아빠, 언니라는 용어가 완전히 똑같다. 멀게만 느껴졌던 인도와 우리였는데, 사실 알고 보면 수천 년 전부터 인도의 문화가 한국으로 전해졌었고, 오늘 우리는 한국의 문화를 인도에 전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힌두](The Hindu)지에 실린 우리 공연의 평을 읽었다. 일반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 <두 메데아> 공연에 감동했고 감사한다는 찬사였다. 안도하고 감사했다.

인도에서 만난 가장 인상 깊은 인도인은 맨발의 목수들이다. 벅찬 일정에 가장 완벽하고 성의 있는 무대를 위해 이틀 이상 밤샘을 한 수십 명의 목수들. 그럼에도 순박한 깔깔거림을 잃지 않던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 무대 위에서 맨발로 공연하는 우리 극단에게는 그것이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가보니, 그들은 길에서도 무대에서도 모두 맨발이었다.





유수미

필자소개
유수미는 스물두 살에 연극에 뛰어들어 현재 극단 서울공장의 상임연출이자 기획, 배우, 무대감독 등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모든 일들을 하고 있다. <도시녀의 칠거지악>을 연출했으며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도시녀>의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나이가 들면 뉴욕의 라마마처럼 공연 시작 전에 작은 종을 울리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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