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세계적인 미술시장의 호황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확대된 미술시장을 바라보며 미술계에 입문한 젊은 세대들에게, 최근의 시장 변동은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시장 확대에 따라 시작된 직업군의 분화가 주춤거리고 호황기 젊은 작가들에게 쏟아지던 관심은 지금 가장 먼저 거두어지고 있다. [weeekly@예술경영]은 시장변동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젊은 미술가들의 진단과 모색을 싣는다./편집자 주 연재순서: ⑤ 작가
미술시장의 위기인가? 급격히 불어났다 급작스레 꺼져버렸으니 여기저기 놀랄 만도 하다. 그런데 정말 놀랄 일일까? 미술시장이 몇 년 전 얼마간 유례없이 호황을 맞이했다면 외려 그 '유례없음'이 더욱 놀랄 일 아닐까?





0.
나는 ‘작가’다. 나이는 30대 초반. 데뷔한지 몇 해 되지 않았으니, ‘젊은’ 작가라 불릴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젊은미술’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미술시장’과 ‘나’ 사이는 좀 먼 듯하다. 작업이 판매되고 구매되는 경험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사실 관심도 별로 없으며,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무언가 목에 걸린다. ‘변화하는 시장과 젊은 미술’이라.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입안에서 자꾸 맴돈다. 해서 목에 걸리는, 입안을 맴도는, 말들을 더듬어가며 뱉어 볼까 한다.



1.
위기인가? 최근 자주 들리는 말. 미술시장의 위기인가? 급격히 불어났다 급작스레 꺼져버렸으니 여기저기 놀랄 만도 하다. 그런데 정말 놀랄 일일까? 미술시장이 몇 년 전 얼마간 유례없이 호황을 맞이했다면 외려 그 ‘유례없음’이 더욱 놀랄 일 아닐까? 해서 미술시장의 불황을 위기라 말하는 것은 왠지 궁색해 보인다. 원래 장사가 안 되던 가게에서 며칠 장사 잘됐다가 갑자기 손님이 끊긴 일로 호들갑 떠는 것 같아 민망하다.


2009 아시아 대학생 · 청년작가 미술축제(아시아프) 참가작품그럼에도 우리는 왜 위기란 말을 붙이려 할까?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 때문 아닐까? 그때가 좋았다(?). 그래 보인다. 무엇보다도 거래가 활발했었고, 갓 데뷔한 젊은 작가들도 다양한 기회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려 있었다. 심지어 대학생들의 작업도 거래되지 않았던가!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었다. 하지만 이는 경제적 관점에 한정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한 경계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술시장의 호황이 작가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줄 순 있지만, 그 기반이 작업의 미적 가치를 보장하거나 작업의 동기부여를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렵다”라던가, “젊은 작가들이 일찍 미술시장에 진출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전에 함몰될 수 있다”거나 등등.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허전하다.

허전한 이유는 ‘미술’이 빠졌기 때문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미술과 시장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을 때조차도 미술시장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해서 우리가 정말 그때가 좋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술이 시장에 기대어 그 좋음을 누렸다는 얘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그때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었다면, 그것은 미술의 힘 때문이 아니라 ‘시장의 힘’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미술이 한 것은 거의 없다’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2.
그렇다면 미술의 위기인가? 대답에 앞서 가려야 할 것이 있다. ‘미술시장’과 ‘미술’의 영역은 서로 겹쳐져 있지만 언제나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니까 미술 ‘시장’의 불황을 ‘미술’의 위기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뒤섞어 미술의 위기라 말한다면, 여전히 미술은 시장을 통해서만 얘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미술이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술이 시장논리에 압도당했다는 흔한 말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위기라면 위기의 시점은 지금이 아니라 지난 미술시장의 호황기가 아닐까?


2008년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아시아프)를 찾은 관람객들



하지만 나는 그때, 혹은 그때부터 미술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만한 작업이 거의 없었고, (미술이 한 것은 거의 없다) 시장에 적합한 그리고 적합하기 위해 노력한 작업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도 볼만한 작업은 별로 없으며, 시장에 적합하거나 그러기 위해 애쓰는 작업들은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물론 시장이 가라앉았으니 많이 정리되긴 하겠다. 그것이 시장논리를 쫓는 미술이 겪어야 할 운명이다.) 이런 일들이 그때만, 혹은 지금에만 있는 것일까? 과거 어느 순간 미술이 내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혹은 과거 얼마간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더 나아가 내적으로 빈곤하다고 해서 위기라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그리고 성급한 표현 아닐까? 우리가 빈곤하다면 미술의 ‘위기’를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뚫어낼 ‘미술’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순간을 뚫고 나갔던 것이 미술의 역사 아닌가.

해서 ‘위기’란 바통은 미술인에게 건네진다. 미술시장의 위기, 미술의 위기를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미술인이다. 그러니까 이 위기의 정체는 미술인의 생계 위기 아닐까? 그때가 좋았다고 쉬이 얘기할 수 있는 이유가, 지금을 위기라고 성급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3.
예전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미술인의 위기다? 이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미술인들이 먹고 살기 좋았다는 것을 가정하는 듯 하여 꺼림칙스럽다. 내 경우, 그때도 먹고 살기 힘들었고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들다. 아니, 지금이 조금 더 힘들긴 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전부터 줄곧 위기였으며, 지금은 위기의 위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민망하다. 그리고 이런 일, 나에게만 벌어지는 것일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힘든 미술인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혹은 우리가 지금 더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미술시장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가 불안하고 위태로워서라고 생각한다.


<서교난장-뉴제너레이션 아트페어(NG ArtFair)>(2008)


예전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먹고 살기 힘든 것과 이전이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힘든 것이 다른 것처럼 자본주의의 난항 때문에 겪는 곤궁함과 미술시장의 불황에 의해 겪는 곤궁함은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시장의 위기를 얘기할 때조차도 그 문맥을 살펴봐야 한다. 어떤 위기는 &lsquo;위기 말하기&rsquo;를 통해 어떤 효과를 얻는다. 그리고 그 효과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힘든 이들보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먹고 살기 힘든 이들에게 이롭게 작동한다.

미술시장을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 나와는 상관없어 보일지라도 미술시장은 중요하다. (나 역시 언젠가 어떤 식으로 관계 맺지 않을까?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장사가 안 되는 것보다 잘 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의 해결점을 미술시장의 호황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 지난 몇 년 상대적으로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미술인들이 달려들지 않았던가? 파이도 커지면 먹는 사람도, 먹으려 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만큼 소외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 미술인은 원래 못살았으니 계속 못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가급적 많은 미술인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로 쏟는 에너지를 작업에 쏟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지원도 풍부해졌으면 더 좋겠다. 개인적으론 많은 미술인들이 잘 살기보다 더 많은 미술인들이 적당히 살 수 있길 바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야만 미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피했으면 한다. (지금은 미술을 하지 않는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했던 말은 &lsquo;일단 돈 좀 벌고 나서&rsquo;였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다.) 더 나아가, 잘 살기 위해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4.참조 이미지 - 미술 작업실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는 한 자본과 미술은 떨어질 수 없다. 자본의 힘에 의해, 시장의 논리에 의해, 미술은 언제든지 상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말한다. 상품이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고. 자본의 힘에 의해 잠식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어쩌면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혼돈이나 위기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지금의 미술과 시장이 놓인 상황과 조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고, 그 혼돈과 위기를 딛고 나아갈 도약의 발판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혼돈을, 위기를, 도약을, 기회를 잠시나마 부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요청해본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반성 아닐까? 여기서 반성은 과거와 지금의 상황이나 조건을 분석하기 위한 반성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미술에 대한 래디컬(radical)한 반성을 말한다. 그것은 상황과 조건이란 핑계로 나, 혹은 우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마음과 행동을 멈추는 것이며, 그동안 그 속에서 자신을 속였던 나, 혹은 우리에게 가하는 채찍질이다. 그리고 그 채찍질 속에서도 미술하기를 되묻는 것이다. 미술이 시장의 논리를 비껴가는,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잘 갖춰진 제도도, 든든한 후원도, 활발한 시장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게 먼저다.

반성이라... 너무 쉬운가?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 보인다.






김시원

필자소개
김시원은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학과 전문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간간히 전시도 하고, 계약직으로 일을 하며, 공부와 작업을 하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