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6일 새벽 1시를 넘긴 시각, 석수시장의 골목에는 여느 때와 같이 정적이 흐른다. 간판 불은 하나 둘 꺼지고 몇 개의 가로등만 윙윙거리며 골목을 비춘다. ‘쾅쾅쾅!’ 리자드 카페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시에 밤의 정적을 깨트린다.

유스케 시바타 <클라이맥스> 2009 석수아트프로젝트
&ldquo;미스터 박! 헬프 미!&rdquo; 일본작가 유스케의 다급한 목소리! 무언가 큰 사건이 발생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표정을 남기고 그가 뛴다. 뒤를 따랐다. 시장모퉁이 빈 가게를 빌려 오픈스튜디오를 준비하고 있던 유스케의 작업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면의 통유리가 박살난 채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이 한 남자를 공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L씨였다. 입주 작가 사이에서 드렁커(술꾼)로 통하는 그의 손은 피범벅이었고 몸은 술에 취해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뒤늦게 숙소에서 달려 나온 독일작가 얀, 크로아티아에서 온 이바와 엘비스, 국제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에 모여들었다. L을 일으켜 세우고 이유를 따져 물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ldquo;나는 진짜 예술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rdquo; &ldquo;니들이 예술을 알아?&rdquo;라는 중얼거림만 있었다.

사건의 정황은 이랬다. 석수아트프로젝트2009(SAP)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6월1일-8월31일)의 오픈스튜디오를 하루 앞두고 유스케는 자원봉사자들과 밤샘 설치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입주작가 L씨는 스튜디오 밖에서 만취상태로 소주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 작업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몇 차례 몸을 푸는 동작을 한 후 그대로 통유리를 향해 돌진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L씨의 몸이 작업장 안으로 퉁겨 들어왔다.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L씨의 한쪽 손가락에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뒤늦게 응급차량에 의해 응급 처치를 받고 지구대를 거쳐 경찰서로 넘겨질 때까지 L씨는 &ldquo;니들이 예술을 알아?&rdquo; 라고 중얼거렸다.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동행하여 조서를 꾸미고 여명이 동터오는 이른 아침에 경찰서 정문을 나서다 문득, 20여 년 전 어느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던져진 예술 실업자인 나와 동료작가들은 &lsquo;그림으로 먹고 살기&rsquo; 라는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석수시장 어귀에 &lsquo;빈방 아뜨리에&rsquo;(지금의 스톤앤워터 공간)라는 창작공방을 마련했었다. 거의 매일 새벽녘까지 그림을 그리다 시들해지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울고 웃으며 세상과 예술가 사이에 어떤 막이 있음을 한탄하곤 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시장경비나 방범대원들과의 한바탕 소동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lsquo;공무집행 방해죄&rsquo;에 &lsquo;국가원수 모독죄&rsquo;라는 이해할 수 없는 죄명으로 파출소에서 아침을 맞이하던 그해 여름 새벽이 불현듯 생각났다. 암울했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K형이 술만 마시면 &ldquo;니들이 예술을 알아?&rdquo; 라고 되뇌곤 했었다.

크리스토프 두셰(샵 퍼포먼스) 2009 석수아트프로젝트

&lsquo;빈방 아뜨리에&rsquo;는 이후 &lsquo;카페 들풀&rsquo;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모색하던 사람들의 아지트로서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2002년 &lsquo;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rsquo; 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교육예술센터와 공공의 수다방, 도깨비공작소, 리자드카페 등 작은 공간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2009년 2월부터 석수시장 구석구석 다양한 예술가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입주작가가 화가 L씨였다. 그는 어떤 이유로 유리창을 통과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사뿐히, 산뜻하게 유리창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술의 힘을 빌려 한 언행은 변명의 여지없이 추태이고 주사일 뿐이지만 그의 언행을 개인의 탓으로만 나무랄 수 없는 건 아닐까? 그는 말없이 작업에 몰두했었고 지역공동체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lsquo;일 잘하는 청년&rsquo;으로 칭찬이 자자했던 그는 초상화 그려주기, 벽화 그려주기, 정원 가꾸기 등을 하며 시장공동체에 일원이 되어갔다. 그러다 그는 차츰 어떤 소통의 단절을 느끼며 혼자 먹는 술을 즐겼다. 그가 술을 마셨다기보다 술이 그를 마셨다. 언제부턴가 그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했다. 어느 구멍가게 앞에서 술에 취해 술을 먹는 그를 종종 보게 되었다. 차츰 그는 시장사람들뿐 아니라 동료 예술가들과도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듯 했다. 그는 프로젝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2009년의 석수시장은 뉴타운개발이라는 거품 위에 부유(浮游)한다. 석수시장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앞이었다가 뒤이고 끝인가 하면 다시 시작이다. 석수시장의 시공간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흘러들어오고 반대편으로 흘러나가고,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온다. 지난 3개월의 여름, 석수시장이라는 시공간은 미래와 과거가 넘나들고 세상의 여러 시간대와 교차하며 천천히 부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가이아, 크로아티아에서 온 이바와 엘비스, 독일에서 온 얀, 프랑스에서 온 크리스토프, 영국에서 온 투루디, 일본에서 온 유스케와 체코와 러시아, 스페인, 대만과 터키 등에서 온 십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까지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서 별일 없이 살았다. (요즘 신종감기에 걸리지 않고 별일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석수시장엔 시간이 접혀지거나 구겨져 있어서 과거와 미래가 불쑥 일어서기도 하고 슬며시 드러눕기도 한다.

이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무르익지 않은 담론의 꼬투리가 불쑥 고개를 든다. &ldquo;예술이 뭔데?&rdquo; &ldquo;삶이 뭔데?&rdquo;

** L씨가 술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예술과 삶의 소통을 위한 그만의 길이 발견되기를 기원합니다.




박찬응

필자소개
박찬응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의 디렉터, 2009 석수아트프로젝트 예술감독으로 교육예술센터와 도깨비공작소 등의 운영을 맡고 있다. 2004 안양천프로젝트, 석수시장프로젝트, 기억프로젝트 등 공공성, 생태성,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다수의 예술프로젝트를 추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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