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막을 내렸다. 이 축제가 한국연극계에 지니는 의미는 국내 최대의 국제적 규모의 공연예술제라는 수식어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예술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든 한 해 국내외 공연예술계에 대한 정리와 반성의 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올해의 예술제에 대한 총평은 ‘심심하다’ ‘이슈가 없다’가 대세인 듯한데,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최근 세계 공연예술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공연예술계의 이슈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세기동안 그것은 좋은 작품들이었다. 연출가 시대를 열었던 20세기 전반기를 지나 20세기 후반기에도 공연예술계를 이끌어 갔던 것은 여전히 강력한 연출가들의 좋은 작업이었다. 특히 세기의 전환기, 냉전 시대가 종식되고 동구권 공연예술계가 서구권 페스티벌에 본격적으로 노출되면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동구권의 연출가들이었다. 20세기 공연예술계 주요 이슈를 다시 리뷰하는 듯 했던 그들의 작업 방식, 그들 단체의 연기술, 그들의 텍스트 해석의 깊이로 인하여 공연예술계는 다소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연극의 의미, 문학의 의미, 배우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종식과 맞물려 대두된 디지털 시대, 다매체 시대,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예술 환경과 함께, 강력한 연출가의 세기 또한 종막으로 달려가는 듯하다. 연출가에 기대어 공연예술계의 이슈를 만드는 시대는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이슈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서울국제공연예술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공연예술제에 초정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적어놓은 리플릿들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아비뇽 페스티벌’ ‘에든버러 페스티벌’ ‘핀란드 탬페레 국제연극제’ 등과 같은 국제적 규모의 페스티벌의 이름이나 ‘모스크바 황금 마스크상’과 같은 자국의 쇼케이스를 동반한 시상 페스티벌의 이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세계 연극계에 작품들이 프로그래밍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페스티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보다는 예술경영 인력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페스티벌과 아트센터를 꾸려나가기 위한 작품들을 선정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고 사람을 만나 정보를 교류하고 일정을 보아 작품이 배급되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결국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공연예술제와 아트센터들에 회람되는 작품들이 정해지게 되고 그것이 최근 세계공연예술계의 흐름과 이슈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모스크바 사이코, 세르쥬의 효과 - 2009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초청작

그렇다면 이러한 전 세계 시장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것은 결국 비평적 안목이 있는 메이저급의 서유럽 공연예술기획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선택에 의해서 작품이 유통되고 이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우리와 같은 아시아 공연예술 기획자와 제작자들의 비평적 안목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화적 맥락과 공연예술 전통을 망각한 채 무비판적 무취향적 수입국의 위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국내 수입된 작품들에서 그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된다. 도시의 규모와 성격, 시기적 특징, 대상 관객의 취향 등은 무시한 채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초청하거나 심지어 재탕, 삼탕 되는 작품들을 초청하여 구색만 맞추려 하는 국내의 국제적 규모의 페스티벌들, 해당 아트센터의 성격, 목적, 전망을 설정하지도 않은 채 무비판적으로 이름 있는 수입공연을 유치하고자 경쟁하는 상황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의 문화적 전통과 그곳을 찾는 관객의 성격과 취향을 검토하지 않고서, 또 교류하는 작품들의 의미와 장단기적 목표를 고려하지 않고서 그저 국제교류라는 미망에 빠져 수입되는 작품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자세는, 결국 해외교류라는 이름 하에 외국에서 진행된 이슈 메이킹을 수동적으로 받아 국내에 배급하는 하청업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연예술계의 국제교류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배경 하에 놓인 국가 간 문화적 의미 투쟁의 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전면에 나서 자국 공연의 문화적 의미를 밝히고 국제적 흐름 안에서 이를 올바르게 자리매김 해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공연기획자들이다. 무기 없는 전투의 장에서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계의 흐름을 읽고 이를 바르고 주체적으로 평가하는 비평적 안목일 것이다. 공연예술계의 비평적 이슈를 주도하는 우리 공연기획자의 힘을 기대해 본다.





이진아

필자소개
이진아는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희곡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원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ㆍ역서로 『배우의 길』(2009), 『동시대연극비평론의 방법론과 실제』(공저, 2009), 『가면의 진실』(2008), 『동시대 연출가론』(공저, 2007)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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