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에는 새로운 공연예술축제가 출범했다. 바로 페스티벌/도쿄(Festival/Tokyo, 약칭 F/T)이다. 지난해를 끝으로 막을 내린 도쿄국제예술제(TIF)의 바통을 이은 페스티벌/도쿄는 지난 봄 1회를 치른데 이어 10월 23일부터 12월 21일까지 2회를 열고 있다.

그동안 도쿄국제예술제를 주관해 온 아트네트워크재팬(Arts Network Japan)이 페스티벌/도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름만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페스티벌/도쿄는 올해부터 재정적인 면에서 일본 도쿄도(都는 우리나라의 특별시와 유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비협조적이었던 공연계로부터도 강력한 후원을 받는 등 예전 도쿄국제예술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름을 아예 바꾸고 이전 축제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앳된 여성? 전문성, 네트워크 갖춘 준비된 디렉터

소마 치아키
야심차게 출발한 페스티벌/도쿄를 이끄는 인물은 앳된 얼굴이 인상적인 소마 치아키(Chiaki Soma, 34세). 도쿄국제예술제에서 해외팀장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공연예술축제나 예술경영 관계자에게도 꽤 친숙한 그는 현재 페스티벌/도쿄의 프로그래밍 디렉터를 맡고 있다(페스티벌/도쿄는 예술감독이 없다). 다른 분야에 비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예술계라고 해도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사회인 일본에서 젊은 여성인 그가 축제를 총지휘하는 것은 매우 이채롭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나이도 그렇고 여성인 내가 페스티벌/도쿄의 프로그래밍 디렉터를 맡은 것은 남성 사회인 일본에서 굉장히 드문 일이다. 내가 해외에서 유학한 뒤 그곳 아트센터 등에서 일을 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도 아니었고, 문화예술 분야와 관련한 재능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페스티벌 디렉터로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다만 페스티벌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고, 여러 면에서 조건이 좋지 않았던 도쿄국제페스티벌에서 오랫동안 경험한 것을 인정받아 이 자리에 있게 된 것 같다.”

무척 쑥스러워하며 겸손해했지만 그는 일본 공연예술계에서도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은 재원이다.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프랑스 리옹대학원에서 예술경영과 문화정책을 공부한 뒤 2002년부터 일본의 아트네트워크재팬에서 근무해 왔다.

“축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트네트워크재팬에 입사하게 된 것은 다소 우연이었다. 프랑스에서 일할 때 전 도쿄국제페스티벌 예술감독이자 현재 페스티벌/도쿄의 실행위원장인 이치무라 사치오 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치무라 사치오 전 도쿄국제페스티벌 예술감독의 권유로 아트네트워크재팬에 들어온 그는 국제공동제작이나 관련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특히 쿠웨이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튀니지, 이스라엘 등 ‘세계의 화약고’ 중동 국가들의 사회성 강한 연극을 초청하거나 이곳 아티스트들과 작품을 공동제작한 ‘중동 시리즈 04~07’은 런던의 바비칸 센터를 비롯해 유럽 페스티벌에도 초청받는 등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인기 있는 작품들을 사와서 늘어놓는 페스티벌에는 흥미가 없다. 그렇게 되면 페스티벌의 힘인 실험성이 없어져 버리니까. 일반 극장에서 하지 않는 것들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페스티벌의 묘미가 아닐까. 그리고 페스티벌에서 만들어진 이런 작품들이 다시 극장에서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친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관객을 등한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페스티벌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관객의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그는 페스티벌/도쿄의 프로그래밍 디렉터를 맡은 것 외에 2006년부터 ‘창조도시’로 주가가 높은 요코하마 시와 함께 새로운 공연예술 창조거점으로서 ‘급경사 스튜디오’(Kyunasaka Studio)를 설립해 젊은 아티스트들의 창작 작업을 돕고 있다. 지난해 도쿄 국제페스티벌을 새롭게 바꾸기로 결정한 도쿄도와 축제 실행위원회가 그를 페스티벌/도쿄의 프로그래밍 디렉터로 임명한 것에 대해 공연계가 그다지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전문성과 넓은 네트워크 때문일 것이다.


“프로그램이 좋아진 이유? 역시 ‘돈’이다”

그런데, 여기서 올해 페스티벌/도쿄의 갑작스런 출범 배경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도쿄도와 도쿄도역사문화재단(한국의 서울문화재단과 유사)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 지난해부터 일본의 문화예술을 세계에 발신하기 위한 ‘도쿄도문화발신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연극 분야의 경우 일본을 대표하는 공연예술페스티벌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그동안 제 역할을 못하던 도쿄국제페스티벌을 대신해 페스티벌/도쿄를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10월초 도쿄가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서 도쿄도문화발신프로젝트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즉 도쿄도문화발신프로젝트에 포함된 페스티벌/도쿄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나도 걱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다고 해서 당장 도쿄도문화발신프로젝트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내년에도 계획대로 갈 거다. 다만 도쿄도 지사 선거가 2011년에 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올해 1, 2회를 연달아 치른 페스티벌/도쿄는 내년부터는 가을에만 열 예정이다. 10월에 나란히 열리는 한국의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중국의 상하이 국제예술제와 손을 잡고 가을을 아시아의 공연예술 페스티벌 시즌으로 만듦으로써 아시아발(發) 공연예술의 창조와 보급에 나서겠다는 것이 페스티벌 도쿄의 취지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 3개국이 나란히 축제를 올리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우려도 제기된다.

“축제 시기를 가을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불만이 있다. 하지만 축제를 지원하는 도쿄도와 문화청 등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동북아시아 3개국이 축제를 비슷한 시기에 치르면 유럽에서 공연 관계자들이 오기에 더 좋은 점이 있다. 다만 우리 때문에 동경예술견본시(TPAM)도 내년부터는 시기를 옮기게 될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같이 치르는 것이 시너지 효과가 나니까.”

올림픽 유치라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출범했지만 페스티벌/도쿄는 이전 도쿄국제페스티벌에 비해 확실히 업그레이드됐다. 도쿄도와 공연계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연 장소가 니시스가모 아트팩토리(Nishi-sugamo Arts Factory) 등에서 도쿄예술극장과 세타가야퍼블릭씨어터 등으로 확대되고 프로그램 역시 수준이 확 높아졌다.

‘리얼(Real)’이라는 테마 아래 봄에는 19작품(공식 프로그램 13개, 참가작 6개), 가을에 20작품(공식 프로그램 16개, 참가작 4개)을 선보였는데, 지난해 축제를 준비할 시간이 짧았던 것에 비하면 국내외 단체와 공동제작 또는 작품을 의뢰한 신작의 비중이 1/3이나 됐다. 참가작의 경우에도 축제의 방향성에 맞춰 노다 히데키, 마에다 시로 등 일본 내에서도 주목받는 연출가나 안무가들의 작품을 참가작으로 엄선한 것이 특징이다.

1. 도쿄예술극장 앞마당의 축제오피스 F/T 스테이션 2. 니시스가모아트팩토리에서 이신하 공연과 함께 열린 포장마차촌 3. 극단 퐈이퐈이 거리 게릴라 공연 4. 도쿄예술극장 안에 마련된 축제숍 페스티벌/도쿄 가을시즌의 축제프로그램

이번 가을의 경우 일본에서 손꼽히는 야외 극단 이신하의 <로지시키>, 공연을 발표할 때마다 찬반 논란을 일으키는 이탈리아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신곡> 3부작, 트럭을 개조한 이동형 극장에서 일종의 짐이 된 관객들에게 도시의 노동과 물류의 현실을 보여주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르고 도쿄-요코하마)(Cargo Tokyo-Yokohama) 등 화제작이 많았다. 덕분에 축제 프로그램이 대부분 매진됐고, 뒤늦게 입소문을 들은 공연 팬들 사이에서는 티켓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전엔 볼 수 없었던 각종 흥미로운 이벤트를 기획해 관객의 참여를 북돋우는 등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ldquo;페스티벌 프로그램이 좋아진 이유? 역시 &lsquo;돈&rsquo;이다. 도쿄국제페스티벌에서 페스티벌/도쿄로 바뀌면서 예산이 몇 배로 늘었다. 덕분에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도 있고, 제작할 수도 있게 됐다. 물론 가난했던 도쿄국제페스티벌의 운영 경험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당시 예산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축제를 열기 위해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쥐어짜곤 했는데, 그런 훈련들이 결과적으로 큰 자산이 됐다. 그리고 그때 예산 때문에 아이디어에 그쳤던 것들을 이번에 실현하고 있다.&rdquo;

그가 밝힌 페스티벌/도쿄의 회당 예산은 4억 엔(한화 54억원). 이 가운데 도쿄도문화재단으로부터 2억 엔, 문화청으로부터 1억 엔을 받으며 나머지는 티켓 수입과 기업 협찬 등으로 충당한다. 그리고 이 예산은 작품 관련 비용에 2억 엔, 극장 대관 및 각종 경비에 2억 엔 지출된다. 특히 페스티벌에 나오는 신작의 경우 제작비를 거의 100% 댄다.

&ldquo;페스티벌이 극단 등과 함께 신작을 제작하는 경우는 돈도 많이 들고 위험 부담이 크다. 페스티벌이 경제적 책임을 지는 대신 예술단체는 작품에 집중할 수 있다. 대신 예술단체에 무조건 신작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의 방향성에 맞게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rdquo;


&lsquo;새로운 리얼&rsquo; &lsquo;리얼은 진화한다&rsquo;

페스티벌 도쿄의 방향성은 올해 1, 2회 프로그램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는 두 페스티벌을 관통하는 주제로 &lsquo;리얼(Real)&rsquo;을 정한 뒤 봄에는 &lsquo;새로운 리얼로&rsquo;, 가을에는 &lsquo;리얼은 진화한다&rsquo;라는 테마를 정했다. 미디어가 다양화되고 정보 전달이 단순화 및 고속화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lsquo;그 자리, 그 시간&rsquo;을 공유하는 것으로 밖에 성립할 수 없는 공연예술이 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즉 새로운 미디어가 계속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연예술이 얼마나 관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지가 올해 페스티벌 도쿄의 콘셉트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콘셉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ldquo;상하이국제페스티벌의 경우 국가 대표 축제로서 오페라와 발레도 선보인다. 하지만 우리 페스티벌은 새로운 연극(현대무용) 형태를 실험하고 찾아가는 축제이다. 물론 예산 때문에라도 편당 1억 엔이 넘게 드는 상업적 연극이나 오페라 등은 할 수도 없다. 즉 관객이 많이 드는 상업적 작품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기준으로 지금보다 10, 20년 뒤를 내다보는 첨단적인 아티스트를 찾고 있다.&rdquo;


&ldquo;<야끼니꾸 드래곤> 같은 수작 만들고 싶다&rdquo;

축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한 그의 대답을 듣자 잠깐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 현대 공연예술의 변방인 아시아의 공연예술축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숙제, 즉 이름은 국제이지만 사실은 국내 관객들에게 해외 작품을 보여주는 국내용 축제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역시나 명쾌한 대답이 나왔다.

소마 치아키&ldquo;페스티벌에서 해외 관객의 비중을 묻는 것이라면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지만 외국의 페스티벌이나 공연 관계자 등 꼭 필요한 사람들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올해 1, 2회에도 취리히 연극제, 쿤스텐 페스티벌, 제네바 페스티벌 등 해외 축제와 공연 관계자들이 여럿 왔다. 물론 아비뇽 페스티벌처럼 외국 관객들도 많이 찾는 축제도 있지만, 페스티벌/도쿄는 기본적으로 우리 작품을 도쿄에 오는 해외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기보다는 그쪽 축제들 또는 아티스트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다.&rdquo;

그래서 그는 앞으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도 긴밀한 협력을 희망했다. 특히 내년부터 페스티벌 도쿄의 날짜가 가을로 바뀌면서 공동 프로젝트를 하기가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올봄 축제에서도 그는 한국의 연희단거리패와 일본 구나우카 극단이 합작한 연극 <오셀로>(이윤택 연출)를 초청한 바 있다.

&ldquo;한국과의 공동작업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특히 에너지가 넘치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 다만 어떤 방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작업을 하면 좋을지는 고민 중이다. 간혹 공동제작이라는 타이틀 아래 무조건 양쪽 예술가나 단체를 붙여놓기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해 일본 신국립극장과 한국 예술의전당이 공동제작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같은 수작을 만들고 싶다.&rdquo;





장지영

필자소개
장지영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미술사 전공)을 졸업했고,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사회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오랫동안 공연예술과 문화예술정책을 담당했으며, 2009년 9월부터 1년간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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