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봄볕이 점점 따갑다. 작년 한 여름 서울에서 이삿짐 차에 몸을 실어 고향인 순천으로 달릴 때가 생각난다. 서울을 빠져나올 때, 홀가분하다는 느낌과 순천으로 들어설 때, 설레면서 낯선 느낌. 세어보니 서울에서 약 17년을 보낸 것 같다. 그림을 공부하고 미술계에서 기자로, 비영리 예술공간 큐레이터로, 공공미술 기획자로 일해 왔다. 서울은 여전히 기회의 도시이고 이벤트가 가득한 활기 넘치는 도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서울에서 살 만 하니?’라는 질문이 생겨났다. 어떻게 그 질문이 한창 일할 나이-30대 중후반 나에게 던져졌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일에 지치기도 했고 서울에서 예술 돌아가는 ‘판’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이 누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일찍이, 그러니깐 2001년 한국을 떠나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베를린에 머물던 시절, “지역이 대안”이라는 확신이 섰는데, 아마도 독일의 지방분권 시스템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 한국사회, 한국 문화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그것이 망각되기는커녕 더욱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서울은 그야말로 포화상태이다. 그것이 거품이든 먼지이든, 결핍보다는 과잉에 의해 서울중심문화주의는 단언컨대 시대착오적이다. 브라보!

그런 나에게 문제는 ‘그때가 언제인가? 그리고 어떻게?’였던 것 같다. 2007년 문화부 공공미술프로젝트였던 ‘아트인시티’ 사업의 사무국 팀장 일을 맡으면서는 지역 예술현장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아졌다. 나는 지역마다의 다양한 고민과 현안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나의 미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 지역들의 고민들 사이에 어떤 문맥(context)이 있다고 보았다. 유추컨대 2002년 월드컵이 가져다 준 전국적 문화 관련사업 붐과 열정, 노무현 참여정부의 민주주의에 입각한 지역분권정책, 새로운 예술정책, 문화다양성의 담론은 한국 예술 지형도를 대폭 재편성 시켰다. 특히 ‘문화다양성’은 지역을 문화패권주의가 아닌 문화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략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지역을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 대한 피해망상이거나 떡고물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만드는 일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과 2009년 사이 나는 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비교적 규모가 있는 두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간중간 기회가 되면 순천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고향친구와 후배 몇이 ‘지역기반 예술가그룹_사이다 프로젝트’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순천시책 사업에 참여해 자문을 하기도 했다. 광주는 순천을 내려가는 일종의 중간 플랫폼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광주 프로젝트가 엎치락뒤치락했다. 결국 나는 중간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광주일로 순천일까지 멀어진 느낌이었다. 낙담도 컸지만 나에게 다시금 교훈을 주었다. 특히 공무원들과 일종의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해야 하는 공공예술 기획자로서 지역에서 문화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치적 실리로서 문화예술을 도구화하는 공조직, 그들의 예술에 대한 낮은 이해도, 민원에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실험’이니 ‘새로운 도전’이니 그런 것은 자기 무덤 파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행정문화, 그들의 구미를 알아서 맞춰주고 적당한 선에서 나눠먹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지역예술 기득권의 문화정치, 문화민주주의라는 수사만 요란하지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권위와 위계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고 파이가 나눠지는 현상 등등은 오랜 관행이라고 넘기기에는 하나의 병(病) 수준이다. 이것이 비단 특정 지역에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공무원들이 그게 가능할까?

공동디렉터 박혜강
그 사이 나의 삶과 예술의 고민에 관한 최대의 논쟁 적수이자, 최고의 지지자인 아내-박혜강은 2007년부터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다원예술매개공간 디렉터를 맡고 있었다. 그녀가 공간운영의 책임자가 되어 홍대 서교동 건물을 임대하고 공간을 디자인하고 내부공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토론을 벌이는 많은 과정을 나는 스태프가 되고 관객이 되고 발표자가 되어 지켜볼 수 있었다. 다양한 예술장르와 전공분야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매개공간은 나에게 흥미로운 예술공간의 새 모델을 제시하고 있었다. 다만 이 공간이 문예진흥기금으로 운영되었고 다원예술이라는 모호하고 새로운 장르를 ‘공간’을 통해 좀 더 활성화시켜보자는 정책적 시도의 단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고 결론적으로 수명이 짧았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었지만 말이다.

2009년 여름, 우리 둘은 다시 백수-프리랜서가 되어 하얀 시간들을 보냈다. 다시 빈 캔버스를 놓고 마주 앉았다. “넌 뭘 그릴 거냐?” “넌 뭘 그리고 싶어?” 우리는 몽상, 망상, 추상, 구상 등등 상상을 통해 얘기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가난 속 풍요였다. 그 때가 온 것인지, 100% 오케이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른바 나의 ‘낙향론’에 대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울은 이제 아닌 것 같아”라는 식으로 나에게 응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개공간을 운영하면서 자주 “이래가지고 되겠어?”라는 투로 한국 예술계를 비판해 오던 그녀는 그렇다고 “지역이 대안이다”라는 나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자생적이며 비평적인 활동이 지속가능한 그러한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런 공간이 가능할까? 우리가 지금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오래 운영해 갈 수 있을까?

<who is Donquixote?> 오픈전시 홍보물, '프로젝트-제로'에서 아카이브를 열람하고 있는 관객

2009년 9월 말 우리는 계획보다는 크고, 예상보다 빨리 3층 건물을 찾았고 임대계약을 했다. 그리고 약 3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2월 예술공간 돈키호테 2층에 &lsquo;카페 산초&rsquo;를 홈페이지바로가기와 함께 오픈했다. 2010년 3월에는 1층 &lsquo;프로젝트_제로&rsquo;를 오픈했다. 카페에는 하나둘 단골이 생겼고 지역 작가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찾고 있다. 우리는 느리게 공간을 운영하자고 했다. 마치 거북이걸음처럼. 공간운영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책임감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뱉었던 그간의 이야기들에 대한 책임, 무엇보다 우리가 합심해서 탄생시킨 &lsquo;예술공간 돈키호테&rsquo;에 대한 책임감 말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돈키호테가 어떻게 성장할지, 어떻게 기억되고 회자될지.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 길을 지역에 묻고 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그 과정을 같이 할 수 있는지. 또한 우리는 순천에서 다른 지역을 볼 것이고 서울을 볼 것이고 세계를 볼 것이다. 그러면서 초대하고 방문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2010년 봄,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곳 남도에서는 매화가 지고 벚꽃이 피고 있다.




이명훈

필자소개
필자 이명훈은 동양화를 전공하고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와 공공미술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다원예술매개공간 디렉터로 일했던 박혜강과 순천에서 &lsquo;예술공간 돈키호테&rsquo;를 공동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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