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품이 에딘버러페스티벌과 같은 세계적 공연축제에 공식적으로 초청된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을 듣고 개인적으로 상당히 놀랐었다. 아비뇽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고 국내작품의 해외공연은 대부분 자유참가 형식으로 출품한 작품들이었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호평 받았다며 언론에서 으름장을 놓고, 금의환향하듯이 국내에서 올려졌던 작품들의 속내가 결국은 국내 시장을 위한 홍보전략의 일환이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해외시장에 국내작품의 존재감이 미미한 이유가 한국공연예술의 진가를 잘 알리지 못한 마케팅 능력의 부실함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의 작품들이 정말로 미학적 측면에서 해외의 예술감독들을 자극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예술이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몇 년간 국내외 예술가간의 교류를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지켜보며 의문의 구체적 맥락이 잡혀갔다. 해외동향이나 정보에 예술가들이 취약했고 국내공연예술이 국제적 맥락과 접점을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기성세대의 작품은 그렇다 치고 젊은 예술가들마저 국제적 흐름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경험이 없는 젊은 예술가들은 해외예술가와의 교류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했고, 리서치 프로그램 같이 밀도 있는 주제가 정해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식도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공동작업에서 주도권을 자주 놓치곤 했다.

이는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몇 주간의 창작프로그램이 끝나자 루마니아의 젊은 안무가는 국내 아티스트들이 스스로를 객관화시켜볼 경험에 대한 욕구가 부족하다는 점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관점과 생각이 주관적 성향이 강하고,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더 적극적인 열정으로 그 부정적인 의식을 고치지 않는 것에 그녀는 의아함을 표명했다. 그녀는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전체주의 사회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이 살았던 고통스런 사회를 시적으로 형상화해온 지적인 안무가였다. 또 다른 예술가는 ‘전통의 현대화’ 같은 관념적 주제를 쉽게 선택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치열하지 않은 모습을 꼬집었다. 다 주관적인 의견들이었지만 여러 의견에서 추출된 공통된 것이 있었다. 한국 젊은 예술가의 사고방식과 예술적 언어가 대체로 유사하고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예술적 습속과의 싸움에 소극적이라는 점 등이다.


국제교류는 늘었지만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지정학적, 정치적 이유가 일단 컸을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이동과 교류가 전통적으로 자유로웠고,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장벽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커다란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고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실험하는 젊은 그룹의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의 경우 이런 흐름이 다원예술이라는 정책적 용어로 포착된 것이 겨우 몇 년 전이다. 젊은 그룹들의 시도와 노력이 유럽예술의 변화를 만들어 왔고 미래도 결정짓게 될 것이다.

축제 프로그램마다 예술가간의 교류를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다양한 워크샵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축제프로그램이나 국제교류 프로그램은 아직 예술가간의 접촉과 매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고, 공연 프로그램의 배타적 우수성만이 강조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을 방문한 다수의 예술가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국 측 예술가들과의 대화와 활동을 원한다는 얘기를 자주한다. 국제교류의 양적증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예술의 접점과 촉매제의 기능이 아직 허약한 것이다.

<3월의 5일(5DAYS IN MARCH)>최근 <3월의 5일>이라는 일본 젊은 연출가의 연극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라크전이 시작된 며칠 동안 콘서트에서 눈이 맞아 4박5일 동안 러브호텔에서 애정행각을 벌인 남녀의 이야기이다. 독특한 것은 아무런 무대장치도 없었고 게다가 주인공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두 남녀의 얘기를 전해들은 여러 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무미건조한 말투로 그들의 시시콜콜한 경험담을 전달하는 연극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정서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배우의 감정연기도 없고 심지어 동작은 연기라고도 할 수 없는 국민체조 같은 부스러기 동작뿐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벌인 거대한 규모의 전쟁이벤트와 지극히 비밀스럽고 사적인 연애담이 병치된다.

연애담은 임신걱정을 하는 남자의 사소한 표정까지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반면 전쟁에 관한 얘기는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정도로 비교된다. 간간이 언급되는 이라크전은 부채의식같이 그들의 의식에 작동한다. &ldquo;꼭 축구국가대표 경기 결과 궁금해 하는 것과 비슷하네.&rdquo; 이런식의 말투로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함에 관한 관심은 우리 연극에도 90년대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lsquo;일상적 가치의 아름다움&rsquo;이라는 소박한 멜랑콜리로 귀결되곤 했다. 연출가 토시키 오카다는 일상의 사소함을 전통적 연극방식과 결별시키고 삶의 형식이라는 구조적 장으로 형상화시켰다. 관객들은 이 썰렁한 연극이 정서적 동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 낯설어했지만 한편으로 묘한 흥미와 매력을 느꼈다고 얘기했다.

스타일의 전통이 강한 일본 연극에서 어떻게 이런 연극이 어필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작품은 과감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오감을 사로잡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작품은 일찌감치 해외에 소개되었고 유럽의 극장과 다음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유럽의 매거진에서는 현대의 베케트라며 그의 연극적 실험의 가치를 높게 보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일본에서 그의 작품이 인정받았냐?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는 젊은 예술가가 실험적인 시도를 하면 곧바로 유럽에 소개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유럽의 시장은 &lsquo;참신한 시각&rsquo;을 기다리고 있고 그의 연극적 형식은 아직 일본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해외에 소개되는 통로가 있는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다양성 배려해야

한국에서도 젊은 예술가가 뜨면 국내에서의 활동이 활발해질 정도의 활력은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진출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일본의 경우 어떤 작품이 뜨면 곧바로 유럽 등지에 소개되는 여건이 마련되어있고 오히려 해외진출이 빈번하여 일본 내에서 작업하는 예술가가 없다고 불평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예술가의 국제교류에 있어 이미 작품세계를 완성한 예술단체의 진출보다는 개인예술가, 젊은 예술가의 해외교류와 진출비중이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학연과 같은 집단적 정서가 강한 국내의 현실에서 젊은 예술가들의 다양성을 위한 배려는 아직 소홀하기 때문이다. 국제교류를 위한 기금이나 기관은 생겨났지만 아직 젊은 예술가들의 경험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정책적 배려나 관심은 소극적인 상황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몇몇 젊은 예술인이나 단체가 실험적인 시도로 등장했다가 성장을 멈추고 횡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들은 불같이 인기를 얻었고 여기저기 극장에서 손짓을 했다. 몇 년간을 정신없이 보낸 후에 그들은 처음에 지녔던 무모함을 잃어버렸고, 비슷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과감했던 목표의식도 서서히 바래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었다.





오세형필자소개
오세형은 연극분야에서 연출, 기획, 제작에 참여하였고, 2005년부터 경기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만남과 자극을 위한 국제레지던스 프로그램, 젊은예술가 집중육성 등에 관심이 많고 독일의 탄츠하우스같은 현장과 제도와의 흥미로운 만남을 주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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