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근대';, ';회한 어린 근대';는 우리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일까? 20세기 초 비주체적으로, 맹목적으로 서구의 사조를 받아들이며 형성된 이 땅의 근대 그림 역사를 돌아보는 건 확실히 편안한 체험은 아니다. 빛과 색채가 활개치는 서양ㆍ일본 근대 그림에 대한 날선 모방욕구, 조형의지를 한참 따라주지 못하는 테크닉 등이 어색한 조합을 이룬 그림들 앞에서 이땅의 근대는 더욱 가슴 아리고 씁쓸한 실체로 다가오는 것이다.

1900~60년대 한국 근대 작가 80여 명의 그림 232점을 사상 최대 규모로 모았다는 서울 덕수궁 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걸작》전(3월 22일까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일본 근대서양화》전을 다녀왔다. 두 전시 모두 서구의 근대 화풍을 당연한 도식으로 받아들인 20세기 초 아시아 근대미술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수용의 양상이나 태도는 도드라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량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의 대상을 보는 시선이나 작가의식 측면에서 우리와 일본의 근대 작가들은 한참 달랐다. 덕수궁 석조전 동관과 서관을 메운 덕수궁 전시는 국내 최초의 양화가 고희동이 무덤덤하게 부채질하는 모습을 그린 1915년작 <자화상>을 필두로 교과서에 나올 법한 근대 그림과 조각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인 월북작가 이쾌대와 한국화 산수의 일가를 이룬 소정 변관식과 청전 이상범, 친숙한 국민화가 이중섭, 박수근, 문제적 조각가 권진규 등 유명 작가들의 익히 알려진 명품들이 즐비해 일반 관객들은 눈도장 찍는 재미를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거장과 명품들의 집대성이란 것 외에 별다른 맥락이 보이지 않는 이 전시에서 감상의 전체적인 뒤끝은 대체로 고희동의 무미건조한 표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애욕 등의 감정 심지어 애국심이나 반공 같은 여러 정서적, 이념적 개념들을 끊임없이 그림들 속에서 떠올리고 이어보려고 했지만, 눈에서 가슴으로 감흥이 이어지는 작품들을 찾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시대상에 대한 치열한 사색과 비판적 접근이 사실상 배제된 채 무비판적으로 서구 미술을 보약 마시듯 들이켰던 우리 근대작가들의 초창기 작품은 습작 과제물과 비슷한 것이었으니, 현대의 감성과 인식으로 보자면 공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그림들 속에 깃든 시선에는 대상을 직시하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정물이나 단순한 초상, 풍경들도 기법이나 포즈의 디테일에 치중하고, 대상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시선의 힘이 느껴지는 것들을 찾기 힘들다. 드물지만, 이런 굴레를 벗어나는 선구적 작가들의 수작들이 위로처럼 감상의 숨통을 터주었다. 해방 공간에서 가장 우뚝한 성취를 남긴 거장 이쾌대의 저 유명한 군상도와 두루마기를 쓴 자화상, 핍진한 세속을 붓질로 옮긴 고암 이응로의 핍진한 풍속화, 사물에 대한 매서운 눈길이 묻어나는 조각가 문신의 초기 그림, 그리고 이중섭의 기운 넘치는 황소그림 소품들이 바로 그런 오아시스 같은 작품들이었다.


한일 회화에서 드러나는 주체적/비주체적 근대

흥미로운 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린 일본 관학파 작가들의 20~30년대 양화들이었다. 박물관 전신인 이왕가박물관의 오너 영친왕이 일제시대 일본 전문가의 조언으로 구입한 그림들이다. 상당수가 당시 조선화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저에서 그 친연성이 흥미롭게 다가왔지만, 보면 볼수록 디테일한 구도와 작가의식 측면에서의 현격한 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인상파 작가 휘슬러가 그린 여인 좌상의 구도를 완벽하게 독해하고 재변용한 듯한 고이소료헤이의 <일본식 머리를 한 여인>이나 보나르 그림의 찬란한 광선ㆍ색채 감각이 절묘하게 변주된 듯한 베이징의 중국 여인을 그린 나카자와 히로미쓰의 작품들은 30년대 일본의 주요 작가들이 이미 19세기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사조들을 감각적으로, 정신적으로 충실히 체화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히말라야 산맥의 아침 노을을 철저한 사생을 바탕으로 유화처럼 장엄한 터치로 그린 야자키 지요지나, 백제 고도 부여의 정림사탑을 일본풍의 색다른 풍경판화로 찍은 히라쓰카 운이치의 작품들에서는 어떤 대상이든 도전적으로 직시하면서도, 여문 조형적 고민을 풀어내는 의기가 느껴졌다. 일본과 조선 화가들이 겪은 주체적 근대와 비주체적 근대가 감각과 색감, 구도의 측면에서도 이런 차이로 드러난다는 것을 필자는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박물관 아시아부 관계자는 일본 현지에서 언론의 대대적 보도와 더불어 이 그림 전시를 보기 위한 투어 프로그램까지 마련될 정도로 관심이 높다는 후문을 귀뜸해 주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지난한 입씨름

유감스럽게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덕수궁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그림들은 두 기관 사이의 알력으로 한 자리에 전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 박물관 소장 일본 근대 그림의 귀속처는 성격상 덕수궁미술관의 상부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과 이를 거부하는 박물관 사이에 90년대 이래 지난한 입씨름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사석에서 두 기관의 전시기획을 책임지거나 책임졌던 전ㆍ현직 관계자들이 소장처의 향방을 놓고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게다가 지금 국내 최대 규모의 근대 작가 그림전을 벌여놓았다는 덕수궁 석조전 동관 전시장도 해방된 지 60년이 지나도록 대한제국 황실 전시관 전용을 주장하는 문화재 학계와 미술관 활용을 주장하는 미술계의 대립으로 용도조차 확정짓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시장 안에 걸린 작품뿐 아니라 전시장 바깥의 풍경도 착잡한 우리 근대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21세기 들머리에도 여전히 우리 문화판에는 근대의 유령들이 떠돌고 있는 셈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근대의 미몽 속에서 시지푸스처럼 논란을 거듭해야 할 것인가.


노형석필자 소개
노형석 편집위원은 홍익대 대학원(미술사)를 수료했고,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시사주간지 한겨레21 문화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겨레신문 문화부 대중문화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예술경영 NO.11_2009.1.8], 정보공유라이선스 2.0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