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은 ‘생각’이며, 미술은 ‘경험’이다. 가장 비싼 것은 ‘생각’이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경험’이다. 그러므로 비싸고 흥미로운 것을 관객에게 유익하고 즐겁게 제공하는 것, 그것이 전시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에너지와 글쓰기의 결합
창작에너지와 글쓰기의 결합

창작에너지와 글쓰기의 결합

미술전문지 기자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한동안 ‘놀다가’ 돌아온 후 ‘페북’(페이스북)에 잠깐 매진하면서 많은 미술계 지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평상시 보아왔던 인물 느낌과는 달리 친근한 ‘프로필’ 사진으로 ‘친구 신청’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였다. 항상 ‘전문적인’ 용어를 구사하는 달변으로 ‘업계’의 전문가 ‘포스’로만 만나왔던 유 교수는 나무 모양의 종이 왕관을 쓰고 힘자랑을 하는 듯한 포즈로 필자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생각해보니 전문적인 ‘업계’ 이야기를 할 때도 유 교수는 항상 유쾌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그가 얼마 전 ‘2012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 없어 냉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유 총감독과는 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항상 현안이나 이슈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던 듯 했다. 그는 원래 미술작업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비평과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1993년 프랑스에서 돌아와(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대학원 예술공간과에서 유학했다) 한국에서 강의를 하다가 입대했다. 서른이 다 되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작업을 결과적으로 쉬게 되었다. 그리고 제대하고 계원조형예술대학에 교수로 채용이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생들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개인적인 작업보다 학생들에게 창작과정을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나중에는 이것이 비평적인 관점으로 전개되었다. 그때는 본업이 교수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좀 더 폭넓은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작업에 대한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창작과정에 대해 사색하고 연구하면서 점점 더 수준 높은 작업을 원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평적 글쓰기가 더욱 빈번해졌다. 결과적으로 비평가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시기획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되었는데, ‘공장미술제’가 처음이었다. 창작에너지와 글쓰기를 모두 활용하는 작업이 바로 전시기획이었다.”

2000년 서울 창동에 위치했던 구 샘표간장 공장에서 열린 ‘제2회 공장미술제’는 120여 명에 달하는 학생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공장 건물과 창고에 배치, 전시하는 ‘난이도 높은’ 작업이었다. 특히 이른바 ‘화이트큐브’라고 하는 일반적인 전시 공간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전시는 큐레이팅 측면에서는 하나의 도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첫 전시기획으로 어려운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유 총감독은 전시기획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전시기획은 공공과 예술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여기에 개인적인 사유들과 당대의 탁월한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전시된다. 전시기획은 일종의 글쓰기이기도 하고, 사소한 요소들이 전체의 느낌을 바꾸는 요리 같기도 하다. 감각을 필요로 하며 지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예술적 과정이지만,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독서와 관람, 작가에 대한 이해와 글쓰기의 경험을 요구한다. 이렇게 총체적인 과정을 통해 전시를 만들고, 이를 관객과 나누면서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짜릿한 경험이다. 또한 전시를 구성하면서 많은 배움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나에겐 큰 매력이다.”

좋은 기획이라도 좋은 작품이 없다면

첫 전시 이후 유 총감독은 다양한 전시기획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08년 조선일보와 가나아트갤러리의 아이디어로 시작해 유 총감독이 기획, 진행한 ‘아시아대학생·청년작가미술제(아시아프)’는 미술대학에 재학중이거나 갓 졸업한 미술작가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전시행사로 떠올랐다. 이 행사는 조선일보의 연중기획 ‘그림이 있는 집’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는데,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페어와 전시, 젊은 작가들의 데뷔 등을 한데 버무린 이 행사는 777명의 전시에 2천 3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1천 500여 점의 작품이 판매되었다. 이후 이러한 성격의 전시가 많이 등장했다. 마치 ‘슈스케’의 등장으로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양산된 것처럼.

“조선일보 측에서 기획을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처음에는 부담이 되어 거절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작업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익히 알고, 마음에 걸려왔던 차라 뭔가 작은 가능성이라도 타진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수락했다. 다행히 성공적이었고, 이후에도 계속 이 행사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니 꽤 뿌듯한 마음이다.”

《아시아프》 포스터 《추상하라!》 포스터
‘2008 아시아대학생·청년미술제’ 포스터 《추상하라!》 포스터

지난 해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전시를 기획한 외부 기획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사실 소장품 전시는 내부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게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배순훈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획 제안의 폭을 넓히고 다변화한다는 취지에서 외부 큐레이터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미술관의 가장 큰 임무라 할 수 있는 소장품 관리 중 관련 전시를 그가 맡게 된 것이다.

“《추상하라!》 전시였다.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외부 큐레이터 참여는 이전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아주 오래 전으로 한두 번 있었다고 알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인력운용 개선방안’ 이라는 주제로 전시기획 제안에 대한 경제 및 협력 요소 도입에 대해 발제한 바 있는데, 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미술관 측의 적극적인 협조로 전시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난 2000년 시작되었던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도 내년이면 일곱 번째 행사를 맞이한다. 올해 그는 국제적인 비엔날레 행사의 총감독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전시기획 경력에도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는 송미숙, 윤진섭, 故이원일 감독 등 좋은 기획자들이 진행했던 행사다. 또한 미디어아트에 집중하는 행사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어, 이 전시의 총감독이 되었다는 점은 큰 영광이자 부담이다. 많은 구상안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작품이다. 기획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작품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을 확보하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기획자와 관객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뉴 미디어 아트’를 하라고 의뢰한 전시이므로 방점은 ‘뉴 미디어 아트’에 찍히게 된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계와 서울의 현실이 반영된 전시여야 할 것이다. 커미셔너들과는 이런 점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할 것이다. 지난 12월 8일 열렸던 심포지엄과 워크숍에서 이런 부분들이 많이 거론되었다. 내년 가을의 행사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기획은 ‘생각’이며, 미술은 ‘경험’이다
기획은 ‘생각’이며, 미술은 ‘경험’이다

기획은 ‘생각’이며, 미술은 ‘경험’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 총감독도 어느덧 미술계의 중진이 되었다. 앞으로 미술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멘토로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천천히 나아가라고 하고 싶다. 미술은 서두를 필요가 없는 분야다. 느리고 즐겁게 가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독서다. 세 번째는 솔직하되 친절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 교수로, 다양한 기획 관련 업무, 집필, 2012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의 총감독,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바쁘게 활동하고 유 총감독에게 마지막으로 ‘라스’(TV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바로 ‘기획이란, 그리고 미술이란’ 무엇이냐고.

“기획은 ‘생각’이며, 미술은 ‘경험’이다. 가장 비싼 것은 ‘생각’이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경험’이다. 그러므로 비싸고 흥미로운 것을 관객에게 유익하고 즐겁게 제공하는 것, 그것이 전시기획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시가 복잡하고 흥미로운 경험이 되길 바란다. 예술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는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이니까 말이다. 물론 누가 관객인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관객의 수준을 높게 잡으면서도, 동시에 일반 관객들이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서비스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쇼’인 전시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은 기본이다.”

우문에 현답이란 이런 것일 게다. 자신이 맡은 일을 열정적이고 유쾌하게 해나가고 있는 유 총감독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집요하지만) ‘페북’의 사진이 생각난다. 이렇게 세상을 유쾌하게 바라보고 행하고 있는 그! 그는 바로 전시기획 세상의 ‘유쾌한 진상 씨!’였다. 우훗!!

“개인적으로 소설은 아니어도 로맨틱한 판타지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 여유가 더욱 진중한 작업을 하는데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다. 내가 즐거워야 다른 이들도 즐겁지 않겠는가.”

유진상은 198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까지 프랑스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와 파리 국립 1, 8대학에서 각각 조형예술학 및 철학 D.E.A(심화연구학위)를 마쳤다. 현재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아트&플레이 군 교수로 있으면서 평론가 및 전시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전시로는 2001년 ‘제2회 공장미술제’를 시작으로 ‘생방송 미술전시’‘리얼_인터페이스’ 등을 기획하였으며, 2012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릴 ‘미디어시티 :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을 맡고 있다. 다수의 미술비평 외에 역서로 질 들뢰즈의 『영화 1 : 운동-이미지』가 있다.

류동현 필자소개
류동현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0여년 간 [월간미술]의 기자로 일했다. 현재 마로니에북스 편집부의 기획팀장이자 미술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만지작만지작 DSLR카메라로 사진찍기』『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공저)『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등의 저서와 공역서 『고고학의 모든 것』이 있다. 《Retro展》《Sculpturespoken here展》을 공동기획했으며, 개인전 《미술기자 Y씨의 뽕빨 111번展》을 열었다. indyyu8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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