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사회가 인정하는 범위를 벗어난 다른 삶의 태도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는 일상의 사각지대에서 묻혀있었던 의미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네 삶이 좀 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전시기획의 목표일 것이다.

임근혜 큐레이터와의 첫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쓰고 있던 저작물의 마무리를 하면서 갤러리 초년병이었던 나에게 이미지 저작권과 관련된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감사의 글 안에 필자의 이름을 넣은 자신의 저서를 가지고 갤러리를 방문했었다. 미술계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던 『창조의 제국』본지 71호 관련기사 리뷰 ‘현장의 역동성을 담고 있는 두 권의 입문서’ 보기 이 바로 그 책이었다. 책이 출간된 2009년도는 미술의 중심이 영국으로 이동한 상태였고, 그만큼 ‘핫’한 시류와 맞물려 영국미술의 구석구석을 훑은 그의 저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책을 쓰는 저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늘 머릿속 한편에 머물렀다. 지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근황을 듣는 정도였던 나에게 인터뷰 기회가 주어져 바로 영국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황이 궁금했다.


“최근 박사논문 쓰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국내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풀리지 않는 고민들을 영국까지 들고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영국미술에 대한 책을 썼듯이, 영국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논문을 쓰는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웃음). 논문의 주제가 ‘한국의 문화정책과 미술관 운영’이기 때문이다. 내부자의 시각으로는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 두 번째 유학이라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다.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공공미술관의 운영체제 변화를 정책과 시스템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한국 근대화 과정의 특수성 및 글로벌한 상황을 연결 지어가며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전시는 태도와 형식을 담은 소통

국내 공공미술관인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에서 큐레이터직을 수행하면서 굵직굵직한 전시를 기획하고 한국 미술관의 경쟁력을 위해 다시 그 어렵다는 만학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전시기획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는 법. 언제부터 그는 이 전시기획이라는 분야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그에게 전시기획은 어떤 의미일까.

임근혜
임근혜

“홍익대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다. 당시에는 예술학과가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큐레이터는 줄곧 꿈꿔왔던 직업이었다. 재학 당시 학생회 주최로 매년 기획전을 개최했는데, 주제토론을 하고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이를 전시와 도록으로 엮어내는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이런 경험이 자연스레 기획자의 길을 걷도록 한 것 같다. 전시기획은 각각의 목적과 형식에 따라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기획자, 관람객이 다양한 층위에서 무언의 소통을 이루는 과정이 가장 큰 매력인 듯하다. 언젠가 전시장에 주말마다 오는 관람객이 있었는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머리와 가슴에 어떤 생각을 담고 사는지 궁금해서’ 작품을 보러 온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일상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대화와 소통의 가치를 미술전공자가 아닌 일반 관람객을 통해 확인한 경험이었다.

전시는 기획자의 발언도 아니고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도구도 아니다. 한마디로 기획은 예술을 통한 지적, 감성적 소통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하나의 전시는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언어가 아닌 태도와 형식으로 담아내는 고도의 지적, 감성적, 감각적 소통이어야 한다.”


‘소통’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반가웠다. 사실 최근 들어 미술이 우리네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고 하지만 막상 미술관의 문턱을 높이는 것이 바로 전시에서의 소통의 문제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미술계에서 전시의 평가기준이 ‘난해함’이라는 불만이 얘기될 만큼 전시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조차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푸념할 정도이니.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이 전시를 보며 느끼는 괴리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법. 전시작품을 둘러보고 전시장 벽의 설명을 읽어보아도 설명 따로 작품 따로인 전시를 마주하면서 과연 얼마만큼의 관객들이 소통이라는 것에 동의할까. 미술은 고매한 자들의 잔치라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 아닐까. 소통을 기획의 첫째로 꼽는 그에게 기억에 남는 기획을 물었다.

“굳이 미술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전시를 꼽으라면, 2004년에 첫 기획을 한 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미술관 봄나들이》전(展)을 꼽고 싶다. 당시 하이서울페스티벌 기간 중에 가족단위 관람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서울시의 지시에 따라 제안한 기획안 중 채택된 것인데, 미술관 진입로부터 앞마당에 이르는 야외공간을 활용하여 ‘봄’(Seeing)의 즐거움을 선사하려는 의도의 설치미술 전시였다. 작품들이 설치단계부터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라 관리에 무척 애를 먹었지만, 미술관의 문턱을 넘기 어려워하는 많은 일반인들, 특히 미술관 주변의 직장인들과 그 가족들이 미술관 홈페이지에 감사의 글을 남기는 등 예상 밖으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관람객층이 미술인이 아니라 일반시민이고, 미술관을 통해 작가와 대중들 간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던진 전시였다고 자평한다.

또 다른 전시로서 《시티넷 아시아》전이 있다. 역시 2004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격년제로 열리고 있는데 첫해에 동료와 함께 공동기획을 맡아 전시방향을 잡고 개념을 설정하는 기초 작업을 담당했다. 당시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간의 네트워크 프로젝트가 한참 유행이었는데, 유사 사례를 리서치하면서 각국의 문화정책과 긴밀한 연관 하에 움직이는 공공미술관들 간의 공통 의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들 간에 협력망을 구축하고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구중심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에 대한 대응논리와 대안적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해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예산과 준비시간의 한계로 애초에 기대했던 큐레이터 워크숍이나 컨퍼런스는 시도도 못해보고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아 아직까지도 아쉬움이 크다.”


책이나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가장 큰 희열감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큐레이터 또한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어원과도 같이 세상을 또 다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창조하는 창조자임에 틀림없다. 임근혜 큐레이터가 수년간의 전시기획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다름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린 시선이다.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범위를 벗어난 다른 삶의 태도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는 일상의 사각지대에서 묻혀있었던 의미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네 삶이 좀 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전시기획의 목표일 것이다.”

김시하 <꽃피는 젊은 예술>

김시하 <꽃피는 젊은 예술>

손민영, 이재광, 최정완 <말(言)타기> 이순주 <국제규격 만인공용 이해요구판> 《2004 미술관 봄 나들이》전시 중
손민영, 이재광, 최정완 <말(言)타기> 이순주 <국제규격 만인공용 이해요구판>
《2004 미술관 봄 나들이》전시 중

한국미술과 비판적 거리두기 중

그는 현재 박물관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평가를 받는 영국의 레스터대학(University of Leicester)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중이다. 이렇게 영국에서 박사논문에만 매진한다는 겸손함을 보이는 그이지만, 최근 『창조의 제국』 개정판을 다시 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2009년에 출간된 이 책은 여전히 영국 현대미술의 &lsquo;현재&rsquo;를 보여주는 주요 저작물로 꼽힌다. &lsquo;영국 현대미술의 센세이션&rsquo;이라는 책의 부제만큼이나 미술판의 센세이션이 되었던 이 책은 주요 50여명의 작가들의 홈페이지 정보뿐 아니라 런던의 주요 화랑, 미술관 등의 미술지도정보까지 실어내어 영국미술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ldquo;영국에서 유학을 했던 때가 마침 미술계에서 yBa(young British artists)1980년대 말 이후에 나타난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가 무섭게 떠오르던 시기였다. 게다가 yBa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를 배출한 골드스미스대학은 내가 공부를 한 대학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으로 많은 정보들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당시 뉴욕 미술계에 대한 책을 기획했던 한 출판기획자가 &lsquo;이제는 런던&rsquo;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나와 인연이 닿았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주요작가와 미술기관을 소개하는 쪽으로 가볍게 방향을 잡았는데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겪은 경험과 견주어가면서 나 스스로가 궁금했던 부분을 찾아가다 보니 폭이 훨씬 넓어져갔다. 결과적으로 창조의 제국은 yBa의 탄생배경을 시작으로 세계대전 이후 현대영국의 문화사적인 배경, 미국 미술계와의 관계, 미술관과 화랑 그리고 미디어의 역할, 공공미술과 지역경제 등의 이슈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몇 주 전에 나온 증보판에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의 변화들과 런던올림픽과 함께 열리고 있는 문화올림피아드를 중심으로 최근의 상황을 다룬 한 챕터를 추가했다.&rdquo;

현대미술의 메카인 영국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대면하고 경험하고 있으니 따끈따끈한 &lsquo;지금&rsquo;의 영국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을 거쳐 경기도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한 경력 또한 객관적으로 영국미술계와 한국미술계를 비교, 진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근혜 임근혜

&ldquo;영국미술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1990년대 이후 yBa를 중심으로 한 현대미술과 이들의 달콤한 성공담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아쉽다. 사실 영국미술의 성공은 소수의 작가들이 일궈낸 산물이 아니다. 이는 소수의 재능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학교, 화랑, 미술관, 대안공간, 정부기관 등 각 처의 노력이 이루어낸 시너지 효과라고 봐야 한다. 이들이 1990년대 후반 영국사회의 문화적 황금기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각 부분의 역할과 기능이 분명하고 서로 간의 벽이 높지 않아 수평적인 협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정치논리나 자본논리에 상응하는 예술의 논리가 존중되는 분위기다. 최근 영국의 미술시장과 공공 프로젝트가 극소수의 작가들에 독식 당하고 있어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이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미술인들의 비판론이 점차 개진되고 있어 다시 균형을 잡아가리라고 믿는다.

영국미술의 이런 현황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상황이 녹녹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과거 미술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 너무 많은 문제와 한계에 부딪혔고, 그 고민을 학문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 공공미술관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우선 정부사업소이기 때문에 기관의 독립성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늘 정치나 행정논리에 지배당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일례로 전시 하나 기획하는 데 담당 큐레이터가 작성해야 할 행정문서가 70~80건에 이른다. 그 시간에 작품연구를 한다면 전시의 질은 훨씬 좋아질 텐데 말이다. 최근 공공미술관들이 &lsquo;책임운영제&rsquo;로 전환되면서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유연한 경영과 양질의 전시기획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공공기금 외에 민간후원에 의지하면서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기획과 내실 있는 조직력이 먼저 갖추어져야 가시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 같다.&rdquo;


최근 그는 LG패션 헤지스가 주최하는 &lsquo;아트-패션 콜라보레이션&rsquo;과 런던 레지던시 지원이 결합된 프로젝트의 아트디렉터를 담당하며 여전히 기획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렇게 기획과 한국 미술계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그의 다음 행보는 어디일까.

&ldquo;공부를 마치고 국내에 들어오면, 화려한 건축과 블록버스터 프로그램보다는 작가, 미술관 직원, 관람객으로 이루어진 인적 구성원들이 효율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과 프로그램이 함께 공존하는 글로벌급 미술관을 만드는 일에 노력을 쏟고 싶다. 하지만 당분간은 박사논문 쓰는 데 집중할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전시기획, 글쓰기, 강의를 중심으로 우리 미술계를 위한 자그마한 힘을 보태는 삶이 이어지지 않을까.&rdquo;



임근혜


이승민 필자소개
이승민은 이화여대 불문과와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했다. 서미갤러리 큐레이터와 국제갤러리 디렉터를 역임했다. 공역서로 『This is Art』가 있다. [노블레스], [중앙SUNDAY] 등 다수의 잡지에 미술관련 글을 기고했다. 현재 기획자 겸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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