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주한일본대사관 앞에는 한 소녀가 앉아있다.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맨발에 두 주먹을 쥐고 전방의 주한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고통을 받은 소녀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일반적인 공공미술 작품들과는 달리 상당히 절제된 형상 표현을 보인다. 평범한 소녀상의 외형을 가진 이 작품 <평화의 소녀>는 예술적 소통에 있어서 장소성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한다.

&lsquo;의자에 앉아있는 소녀&rsquo;에서 &lsquo;평화의 소녀&rsquo;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는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lsquo;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rsquo;가 열리고 있다. 그 집회가 1000회를 맞이한 2011년 12월 14일에 부부 조각가 김서경(1964)과 김운성(1965)은 기념비적인 조각 작품을 현장에 설치했다. 이 작품은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한국여성의 상처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고 있다. <평화의 소녀>를 세운 김서경과 김운성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부부 작가로 대학 졸업 후부터 &lsquo;조소패흙&rsquo; 동인활동을 시작으로 형상조각 작업을 해왔다. 김운성은 얼마 전에 또 다른 기념비 조각을 세웠다.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middot;효순양 10주기 추모 조형물인 <소녀의 꿈>으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에 설치했다.

&lsquo;의자에 앉아있는 소녀&rsquo;라는 다분히 상투적인 어법으로부터 출발한 이 작품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을 지칭한다. 이 소녀상이 놓인 공간의 바닥에는 그림자가 있다. 세월이 흘러 꼬부라진 허리의 할머니의 그림자이다. 소녀상 옆에는 빈 의자가 놓였다. 아픈 역사를 지나 온 소녀의 손을 관객들이 잡아줄 수 있도록 유도하고 배려한 장치이다.

현재 이 소녀상은 온 국민으로부터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위안부 소녀라는 특별한 뜻을 담고 있고, 특히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놓여 탁월한 장소성을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놓인 장소에 따라 의미생성의 맥락이 달라진다. 얼마 전에 일본의 한 우익 인사가 현장을 방문해서 &lsquo;다케시마는 일본땅&rsquo;이라고 쓴 팻말을 의자에 묶고 동영상을 찍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소녀상 말뚝테러가 발생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외면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국민적 공분을 유발했고, 이 작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촉발했다.

근대 이후의 미술에 있어 소녀상은 가장 평범한 예술적 표현의 소재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자상, 소녀상, 여인상 등의 형태로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특정한 관념, 가령 현모나 양처, 사색하는 소녀, 독서하는 소녀, 성적으로 대상화한 객체로서의 관능적인 여성 등의 모습이 그것이다.

소녀상에게 도착한 익명의 편지

▲ 소녀상에게 도착한 익명의 편지

그런데 이 소녀상은 그러한 통속적인 맥락의 여인상들과는 다르다. 여성의 신체를 예술작품 제작의 소재로 대상화해온 근대적 예술가들의 관행과 달리 이 작품<평화의 소녀>는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시민들이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예술적 소통을 만들어냈다. 시민들은 평화의 소녀에게 자아를 투영한다. 그들은 이 작품 앞에 서서 소외와 억압의 역사를 살아온 20세기 한반도의 한국인들의 힘겨운 역사를 자신의 현실에 비춘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근현대미술 특별기획전: 여기 사람이 있다》(2012.6.15-8.26)에 <평화의 소녀>의 두 번째 에디션이 출품되어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00명의 작가 작품 가운데 이 작품의 인지도가 단연 높다. 관람객들은 이 소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소녀의 손을 꼭 잡아 줌으로써 고난의 역사를 살아간 소녀를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과 우리에게 주어진 팍팍한 현실을 성찰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는다. 이처럼 공공미술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예술적 소통의 주제로 채택하여 의제화하는 사회적 소통기제인 것이다.

김준기

필자소개
김준기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예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기자 일을 시작으로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공공미술팀장으로 일했으며, 사비나미술관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일했다. 2006년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 전시팀장으로 일했으며,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으로서 <아트인시티 2006> 프로젝트 매니저 일을 했다. 2007년에 석남미술상 젊은 이론가상을 받았으며, 경희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2007-2010), 현재는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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