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한다. 각각 따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귀퉁이엔가 다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해결하려고 하면 뭔가가 꼭 걸린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한방에 성큼성큼 앞으로 가는 것만 진화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반 보 뒤로 갔다가 한 발 앞으로 가는 것도 전진이다. 뒤로 간다 싶을 때 잠시 기다려봤다가 앞으로 밀고 나갈 줄 알아야 한다.”

그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그를 두고 ‘허허실실’이라고 표현한다. 겉으로만 보면 옆집 아저씨 같은데, 일하다 보면 놀랍도록 날카롭고 치밀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을 볼 때나 작품을 볼 때, 그의 ‘부드러운 예각’은 주저 없이 핵심을 찌른다. 심재찬 국립극단 사무국장은 정작 이러한 평가에 대해 ‘허허’ 웃고 만다. 그는 “국립극단은 나를 괴롭게 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방에서 연습하고 공연하니 힘들다. 배우들이 쉬는 시간에 건물 밖에 좍 나와 앉아있는 모습을 사무실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실로 장관이다.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저 안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눈을 돌려 사무실을 보면 이곳에서도 열정이 넘친다.” 현장과 사무실, 그가 30년 넘게 지켜오고 있는 두 장소다. 20대 중반 연극판에 뛰어들었다가 어느새 ‘행정의 달인’으로 변신(?)해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에게 예술가와 행정가의 두 길에 대한 고민과 고언(苦言)을 들었다.

국립극단 전경 국립극단 전경
▲ 국립극단 전경

요구와 제약 사이에서 완급을 조절하다

신정선 사무국장으로 서류와 서식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현장에 대한 감이 여전히 탁월하다고 들었다. 감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심재찬 따로 연구를 하는 건 아니다. 현장에서 연극하는 후배들과 얘기를 많이 하는 게 제일 도움이 된 것 같다. 대화 속에는 다른 분야 얘기가 많지만, 결국 그 안에 공연 생태계의 문제점이 다 들어 있다. 모든 것은 사람 얘기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행정 쪽에 요구하는 것은 늘 비슷하다. 상황이 어렵고, 대우가 박하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 속에 구체적인 부분을 귀를 열고 들으면 앞으로 바꿔가야 할 방향도 함께 보인다.

신정선 남들이 ‘행정의 달인’이라고 한다. 예술 행정을 해보니,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심재찬 백년대계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 행정은 1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한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타계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진짜 달인은 아니지만, 그나마 성과를 낸 부분이 있다면 융통성을 발휘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리하게 이루려 하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요구 사항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시험적으로 해보게 유도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행정 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성만을 강조해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냉정하게 말하면 행정과 예술은 갑과 을의 관계다. 행정 쪽은 돈을 지원하고 예술가는 받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을이 갑에게 예술을 이해하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면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어렵다. 예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면 행정도 예술을 이해하게 된다. 알아야 된다고 요구만 하면 소통하기 어렵다. 행정이 예술을 전폭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예술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 아닌가. 인간적으로 감화시키겠다는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신정선 양측간 갈등을 조절하는 게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가장 도움이 된 시기가 있다면?

심재찬 예전에 차범석 선생님과 임영웅 선생님 아래에서 조연출을 하면서 행정이 무엇인지 배운 것 같다. 따로 배워서가 아니라 몸으로 배우면서 터득했다. 무서운 분들의 심부름을 하다 보니 눈치껏 요령껏 감을 잡게 됐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서류를 써내야 하고 어디 가서 인사해야 하는지부터 배웠다. 맨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배워서 그런지 혼은 많이 났지만 그만큼 소중한 경험이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일이 성사돼도 진짜 이유를 몰랐다. 영향력 있는 선생님들 덕분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분들은 긴장과 이완의 관계를 적절하게 조절할 줄 아셨다. 요구할 건 하되,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10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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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보 뒤로 갔다가 한 발 앞으로 가는 것도 전진이다

신정선 예술 행정의 벽에 부딪혀본 현장인들이 많다. 어떤 점을 알고 접근하면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심재찬 속된 말로 행정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봤더니 여러가지 일이 각각 따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귀퉁이엔가 다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해결하려고 하면 뭔가가 꼭 걸린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한 건의 일이 차츰 해결되면서 뒤에 있는 것도 저절로 풀리는 측면이 있다. 한방에 성큼성큼 앞으로 가는 것만 진화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반 보 뒤로 갔다가 한 발 앞으로 가는 것도 전진이다. 눈앞의 현상에만 급급하지 말라. 뒤로 간다 싶을 때 잠시 기다려봤다가 앞으로 밀고 나갈 줄 알아야 한다. 또 한가지, 행정 쪽 사람들의 애로 사항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갑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갑도 괴롭다. 갑의 갑이 또 있다. 그런 점을 이해해주면 당연히 좋아한다. 이해해주면서 함께 풀어가는 자세로 접근하면 갑도 을의 편이 될 수 있다.

신정선 행정과 예술 쪽 양측이 서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심재찬 당장 완성작을 내놓으라고 해서는 안 되고, 일단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특히 행정 쪽은 작가 지원에 대한 체감도가 낮다. 그냥 쓰면 되지, 뭘 중점적으로 지원까지 해야 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배우 지원은 쉽게 이해한다. 훈련시키는게 눈에 보이니까. 그런 면에서 아까 말한 갑의 갑을 설득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갑이 상부에 작가 육성과 중점 지원에 대한 논리를 펼 수 있도록 도와줘야한다. 그것도 모르냐고 우습게보면 을이 손해다. 갑이 갑의 갑에게 가서 이기고 돌아올 논리를 우리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희곡 하나가 작품 전체를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정보와 자료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현장을 배우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갑을 무조건 배타적으로만 보지 말라. 손해다. 행정적인 사항을 먼저 이해하는 자세로 접근하면 저쪽도 예술을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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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는 ‘예술’에 대한 신뢰로 접근해야한다

신정선 현재 지원정책의 전체적인 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심재찬 지금 상태는 과하게 표현하자면 숲을 해치고 있다. 숲을 넓히고 육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와 나눔에 지나치게 쏠려 있는 게 문제다. 예술적인 역량을 쌓고 기르는 데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다. 양극화 해소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면서부터 이 방향을 쏠리게 된 것 같다. 이제는 예술 역량을 기르고 예술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제도가 있어야 한다.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초기 단계에서는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작가 지원과 같은 맥락이다. 신진 창작자들이 올린 공연을 보면 정말로 수준이 안 된다 싶은 경우가 꽤 있다. 나는 그렇더라도 ‘이게 무슨 공연이냐’고 하지 않는다. 공연은 엉망이더라도 그 안에 창작자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그 부분을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잘하건 못하건 하고 있는 단계에서 못하게 하지 말고, 일단 격려해서 하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신진 예술가는 본인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기간은 믿고 지켜보는 끈기가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신뢰로 보지 말고. 예술에 대한 신뢰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신정선 공연 지원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심재찬 가장 중요한 것은 희곡이다. 연극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공연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국립극단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갖게 됐다. 작품이 좋으면, 연출도 잘하게 되고 연기도 잘하게 된다. 각자 가진 에너지가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 힘이 공연에 들러붙는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에 대한 지원을 더 강화해야한다고 본다.

신정선 예술 행정가로서 보람이 있다면?

심재찬 내가 직접 연출할 때는 내 작품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잘 되는 것에는 신경 쓰기 어렵다. 하지만 행정을 하다 보면 내가 도와줘서 다른 예술가가 인정을 받고 도약하는 걸 볼 수 있다. 창작자로만 일할 때는 맛볼 수 없던 보람이다. 가끔 그 사람들이 내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할 때가 있는데, 나는 내게 보람을 느끼게 해준 그 사람들이 고맙다.

신정선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심재찬 연극은 팀워크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내가 공동체 안에 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공동체를 안고 가는지 상반된 시각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흔히 자신이 공동체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연극판 사람들은 사실 모두 개인주의자다. 작가, 연출가, 배우 다 똑같다. 항상 호시탐탐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게 치열함이다. 그 치열함을 잃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악랄할 정도의 치열함을 보고 싶다.

심재찬은 극단 전망을 창단하여 연출가 및 대표로 활동했다. 이후 (사)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한국연출가협회 회장, 기초예술연대 공동상임위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국립극단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소개
신정선은 고려대 언어학과를 나왔다. 2001년 조선일보 수습으로 입사해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하고 있다. 무식해서 용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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