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에서 문화프로젝트의 중요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같이 작업하고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의 한 방법이기도 하고 무직자, 마약중독자, 보증인이 없는 등의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을 일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찾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사회복지 활동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문화 프리쉬 같은 프로젝트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참여시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참여한 이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일 시 l 2012년 11월 2일(금) 오후 4시 장 소 l 길담서원

2012년 11월 1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신화 또는 현실 : 정책·예술가·커뮤니티’라는 주제로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금천예술공장이 주관한 심포지엄으로 ‘지역에서 예술활동의 가치’, ‘예술의 자율성 vs 예술의 도구화’, ‘커뮤니티에 대한 문화정책 변화’ 등 각기 다른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목도되는 지역 문화활동의 복잡성 : 특정한 가치 그리고 다양한 충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 발제자로 참여했던 파브리스 라팽 교수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경년 심포지엄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오늘 좀 더 나누고 싶어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다. 논의에 앞서 당신이 말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주기 바란다.

1) 프리쉬(Friche)는 프랑스어로 황무지, 미개간지, 황폐화 된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용어를 용도 폐기된 산업시설물을 문화적으로 활용하는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파브리스 라팽(이하 라팽) 나는 문화적인 활동(cultural action)이란 언제나 ‘집합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의 각 단계들 즉 창작, 생산, 배포 등에 있어서 예술가는 자신의 분야에 집중하는 데 반해, 문화는 예술계를 규정하는 기존의 관례에 따라 기능하는 네트워크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문화적인 활동들은 미학뿐만 아니라 여러 의미들을 동시에 동원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문화 활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요소들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술은 문화적인 활동의 한 종류이다. 여러 종류의 문화적인 활동들이 존재하지만, 예술은 특별한 종류의 문화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다만 예술이 다른 종류의 문화적인 활동과 차이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학에 더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예술의 세 가지 특성을 인용하자면 예술작품은 보편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독특하다는 것이다. 예술의 독특함이라는 것은 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문화적인 활동의 한 종류로 본 예술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손경년 당신은 폐산업시설을 문화적으로 활용한 프리쉬(Friche)1)에 관한 연구를 통해 예술가, 지역주민 등과의 관계와 함께 문화공간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논문 및 저서를 발표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리쉬는 어떤 방식으로 조성되었고 운영되고 있는가? 당신이 방문한 금천예술공장은 인쇄공장을 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현재 예술가들이 거주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공간은 작가지원 및 육성, 시민문화향유, 그리고 도시재생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회학자로서의 당신은 금천예술공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팽 유럽에는 다양한 예술 프리쉬가 있으며, 주민들이 직접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것이어서 각각 차별성이 있다. 중요한 점은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는 예술가들이 아니라 주민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나 스위스 제네바의 예를 보면, 프로젝트팀에 예술가들이 함께 하고 있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은 해당 도시의 시민들이다. 이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시민들의 관심은 콘서트나 전시를 즐기기는 하나 창작이나 예술 그 자체에 있지 않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에 있다.

프랑스의 프리쉬와 금천예술공장과 비교할 때 바로 이점이 다르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금천예술공장은 예술프로젝트로 보인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금천예술공장이 인쇄공장이었다는 사실과 금천구라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이다. 금천예술공장의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작업을 하고 주민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과연 그러한지 결과물을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민들 관점에서 볼 때 예술가들이란 그 장소(금천)에 와서 예술 활동을 통해 주민들과 작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물론 내가 금천예술공장에 대해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프리쉬와 비교하면 성격이 다른 프로젝트라고 본다. 주민들이 어떠한 예술을 원하는지 알기 전에 예술가들이 특정 장소에 가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어서 그 결과는 프리쉬와는 다를 것이라 여겨진다.


프랑스 프리쉬 중 하나 마르세유의 라 벨 드메 프랑스 프리쉬 중 하나 마르세유의 라 벨 드메
▲ 프랑스 프리쉬 중 하나 마르세유의 라 벨 드메
(사진 출처 중앙일보)

예술가들이 어떤 장소에 와서 예술 활동을 하고자 하나 주민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면 그 관계(주민과 예술가)는 복잡해 질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술가들의 활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그들의 작업에 참여하려면 초대를 받아야만 가능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예술가들과 때때로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예술가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대개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그래서 그곳은 폐쇄된 공간이 된다. 예술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주민들과 공유하고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이런 경우에는 문화적 매개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내가 늘 주장하듯이 문화는 항상 정체성(identity)과 관련하며, 예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주민들은 예술가에 대해 가깝게 여기기도 혹은 멀게 여길 수도 있다.

제네바와 푸아티에의 프로젝트는 흔치 않은 사례로 평가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도시들은 이들 사례를 모방하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주민들과의 관계는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기능 중 하나는 시민권의 신장에 있다. 시민들은 의식적으로 문화를 만들거나 예술, 미학을 고려하기 보다는 단지 도시를 더 좋게, 더 활기차게 만듦으로써 도시의 운명에 관여하고 싶어 한다. “제네바는 밤이 없다 제네바는 지루하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은 콘서트와 파티를 열어서 밤에도 지루하지 않은 도시로 만들고 싶은 마음의 반영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시민들은 예술보급,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문을 열어두는 장소를 원하고, 예술을 담아내는 장소와 락음악, 댄스음악, 힙합을 틀어주는 공간도 원한다는 것이다.

한 도시에서 문화프로젝트의 중요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같이 작업하고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의 한 방법이기도 하고 무직자, 마약중독자, 보증인이 없는 등의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을 일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찾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사회복지 활동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문화 프리쉬 같은 프로젝트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참여시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참여한 이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손경년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미국의 도시계획학자인 클락(Clark)교수는 커피숍이나 상품매장 등 매력적인 건축물 등이 많이 조성되면 도시의 매력도가 올라가고 경제적인 효과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혹시 프리쉬같은 문화공간의 조성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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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팽 나는 클락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자로서의 나는 건축물이 우선인가 사람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할 수는 없다. 물론 건축물이 아름다운 프로젝트가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빈껍데기로 남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볼품없는 폐산업체 건물일지라도 주요한 사회활동이 가능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예술가가 한 공간에 흔적을 남기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라고 했다. 예술 프리쉬 프로젝트의 경우,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나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풍요로웠다. 그런 이유로 건축가가 어떤 장소에 들어와 멋진 건물을 짓는 정도의 프로젝트 나열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것보다 그 건물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손경년 한국의 경우 정부 주도의 예술공간이 많은 편이다. 물론 민간이 운영하는 공간도 있으나 규모면이나 경제적인 측면을 볼 때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말하는 프리쉬의 경우 민간주도라고 하였는데 프로젝트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른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라팽 많은 세계의 도시들이 프리쉬를 따라 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모든 도시들은 자신들만의 프리쉬를 갖고 싶어 하며 메종드 폴리(Maison Folie)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프리쉬는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이 아니라 협회로 이루어진 민간사업이다.

낭트(Nantes)시의 경우, 프리쉬를 만들고자 결정할 때 예술가에게만 초점을 두지 않고 민간과 공공 지역 협회 네트워크, 지역 프로페셔널 네트워크 등을 중요시 했다. 낭트는 예술과 관련된 공간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도서관, 전시관, 사우나, 유치원 등에서 문화 활동을 누릴 수 있도록 네트워크화 하였다.

프리쉬의 특징은 창작, 생산, 보급이 한 장소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서커스나 거리예술 같은 비주류예술을 포함하고 제과점이나 무술도장 같은 수익활동도 함께 있다. 나는 예술가들이 프리쉬라고 지칭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주민들과 작업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약간 두렵기도 하다. 과연 주민들은 그들과 작업하고 싶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주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낭트시에서 새벽 2시에 진행되었던 컨퍼런스에서 지역사람들과 술도 마시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화공간을 공공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공공공간을 이해할 때 길거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공간을 책방으로, 커피숍으로, 제과점 등으로 활용하는 순간, 그 공간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들’을 위해 열고 닫는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빵이 필요 없다면 당신은 제과점에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책방 창가를 통해 책을 보면, 나는 그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을 뿐만 아니라 특정 계층의 사람들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심의 초점을 예술적인 공간에서 문화적인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새로운 예술창작 공간을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푸아티에와 제네바가 성공적인 사례로 제시되는 이유는 도시의 모든 협회(association)들, 즉 뮤지컬, 연극, 음악 등 주민들이 만든 협회를 네트워크화 했다는 것이다. 이들 협회들이 모두 힘을 모았고 정부 또는 도시가 원하는 공간이 아닌, 주민들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시정부에 예산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원한 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베를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례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주민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나가는 상향식(bottom-up) 문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상향식이든 하향식이든 이러한 결정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지역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문화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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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 네트워크가 한 공간과 연관될 때 마다 탄생하는 세계를 정의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며, 이를 연구하고 있다. 네트워크는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사회적인 활동도 항상 공간을 통해 이뤄진다. 프리쉬는 창작, 생산, 보급이 한 곳에서 이뤄지며, 모든 사람이 한 곳에서 작업한다. 따라서 시간도 중요하다. 내가 만약 예술가로서 한 지역에 머물면서 콘서트나 전시를 가진 후 바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1년 동안 그 곳에 머무르면서 주민들과 작업을 할 것이냐는 전혀 다른 작업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 지역에서 10년, 20년을 있느냐, 아니면 팀을 매번 바꾸면서 진행하느냐의 경우도 다를 것이다. 누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냐가 중요하다.

손경년 문화정책가들은 어떤 지역에 들어가서 예술 활동을 하도록 예술가를 지원할 경우 그들의 활동이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하도록 요구한다. 지역 커뮤니티에 들어가게 되면 예술가는 자신들과 다르다고 여기면서 흥미롭게 예술작업을 지켜보는 주민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들의 문화적 요구를 반영해주도록 강력하게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아스테릭스>는 르네 고시니가 쓰고 알베르 우데르조가 그린 만화로 골족의 영웅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펼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라팽 예술가들이 어느 지역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지역의 주민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의 활동은 지역주민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가를 매우 싫어하기도 한다. 내가 1990년에서 1991년, 마르세유의 프리쉬에서 일 할 때 주민들은 기존에 도살장으로 사용되었던 예술가의 작업공간을 &ldquo;그들(예술가)은 우리와 같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rdquo;는 의미에서 아스테릭스 빌리지(Village of Asterix)2)라고 불렀다. 예술가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예술가와 주민이 서로 대립과 갈등을 만들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현상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책가들(혹은 행정가들)은 예술가들을 지역에 배치하면 주민들과 갈등 없이 함께 즐겁게 생산성을 높이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심포지엄 발표 때 내가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듯이, 예술가들은 사람들을 서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나 합의된 비전의 반대를 제시하는 역할을 위해 그곳에 가 있기 때문에, 갈등의 발생은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시간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다.

프리쉬는 거의 20년이 지나 아직도 존재하지만 그 기능은 이전과 동일하지는 않다. 하나의 장소가 &lsquo;모든&rsquo;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젊은 층과 나이 든 층이 원하거나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내가 프리쉬에서 일할 때만 해도 18-20세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이제는 나와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곳이 되었다.

많은 경우 예술가를 위한 정책을 우선하며 시민들의 문화적인 활동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문화정책을 만든다. 프리쉬의 특징은 주민들이 자신들만의 문화정책을 세운 사례라는 점에 있다. 푸아티에나 제네바의 사람들은 도시정부에서 제공하지 않는 펑크록, 연극 등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 전부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문화가 무엇인지 학자처럼 정의내릴 수는 없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들의 문화라고 정했고, 스스로 장소를 만들었고 그곳을 차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이 스스로 문화정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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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문화예산 대부분은 순수예술 즉 공식적인 형태의 예술에 책정되는데 나는 이 점을 문제라고 본다. 상위계층의 경우 &lsquo;우리&rsquo;의 문화를 지원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보면 &lsquo;그들이 원하는 예술&rsquo;에 투자한 것이다. 사실 공공지원의 문제는 어떻게 합의 하는가 혹은 어떻게 싸우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문화를 지원해야 한다고 합의하면 공공재원은 그렇게 쓰여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술가가 지역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하면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다문화적인 국가이다. 부유한 사람이나 작가, 백인,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 모두 프리쉬의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 삶은 항상 정체성(identity)과 연관되어 있으며 문화는 사회적 관계, 영토, 경제 등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 건물이나 공공장소는 도시와 시민들의 정체성을 갖는 관계적이며 역사적인 공간이다. 나의 관심은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손경년 당신은 폐산업시설을 활용한 프리쉬의 경우를 통해 문화민주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대규모의 예산을 들여 하향식(top-down)으로 진행하는 문화프로젝트나 고급문화의 범주로 좁혀서 정의되는 예술개념이 시민을 수동적 관계로 만들어서 배제하는 논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보다는 시민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의 질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자기 결정권과 일상생활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상향식(bottom-up)을 지지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당신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의 문화정책 실현에 있어서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 긴 시간의 대화가 매우 즐거웠고 감사하다.

파브리스 라팽(Fabrice Raffin)


이승민 필자소개
손경년은 영국에서 문화정책과 예술경영을 전공했으며, 부천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문화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추진기획단(현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도시조성실장 등을 거쳐 현재 부천문화재단 문화예술본부장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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