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두산인문극장 ‘예외’의 첫 번째 공연 <구름을 타고>는, 열일곱 살 때 레바논 내전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언어 능력을 상실한 야세르라는 인물을 무대에 세운다. 사고 이후 그는 무엇이든 실재하는 것만을 인식했다. 이를테면 사진 속 사물이 무엇인지는 분간해내지 못했지만, 연극 속 인물의 죽음에는 온몸으로 슬퍼하는 식이었다. 야세르의 형이자, 공연의 연출가인 라비는 이 상황의 모든 국면을 극장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야기는 가족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레바논의 현실이자 인류가 발명해낸 전쟁이라는 재앙을 꿰뚫는다. 작품은 언어와 재현의 문제를 경유해 결국 연극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연극과 영상, 설치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레바논 출신의 예술가 라비 므루에를 만났다.

연극은 재현하는가

김슬기 <구름을 타고>는 당신의 동생이 실제로 겪은 일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감정은 절제되어 있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은데.

므루에 나는 연극을 통해서 관객들과 감정이나 정서가 아닌 생각 혹은 개념을 나누고 싶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언어’에 관한 것이면서 ‘재현’에 관한 것이다. 야세르는 부상 이후 언어를 잃어버려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것은 곧 그가 재현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언어를 배워 결국 시인이 되었다. 시란 추상적인 것의 재현이기 때문에 이 지점이 나에겐 몹시 흥미로웠다. 비록 우리가 무언가 사고로 인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언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이다.

재현과 연결되는 또 다른 층위가 바로 연극이다. 우리는 연극을 어떻게 하는가,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야세르는 전문 배우가 아니지만 분명 무언가를 수행했다. 나는 그가 직접 무대에 서길 원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그 자신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아니기도 하고, 그 자신을 보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무대 위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연극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구름을 타고>는 이 문제를 조금 더 밀고 나간다.


김슬기 실제와 허구에 대해 논의하기에 연극이 매우 적절하다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 경계선을 무너뜨리거나 넘어가는 것, 그건 관객의 몫이니까. 개별 관객들은 공연을 보면서 현실을 해체했다가 다시 구성하길 반복하게 된다.

므루에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깨뜨리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지만 또한 연출가의 결정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연이 끝나도 무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관객들에게 박수받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에겐 그것이 매우 상징적인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자, 이제 허구는 끝났습니다. 박수를 하고 나서 현실로 돌아올까요?’ 나는 이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원칙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보통 우리는 아이들에게 슈퍼맨이나 그랜다이저 같은 역할을 해보라고 말한다. 어떤 연령대의 아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런 종류의 캐릭터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아니야, 너는 그냥 이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줘야만 한다. 그리고 그걸 확실히 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쳐주고 “잘했어”라고 한 다음 그 아이를 다시 현실로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연극에도 이와 동일한 기제가 작동한다. 우리는 무대에서 본 것이 허구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기 위해 박수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무대에서 몹시 거칠고 가학적인 역할을 연기한다고 쳐보자. 사람들은 내가 실제에서도 그런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관객들에게,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바로 이런 걸 내 작품에서는 빼버린 거다. 나는 이 경계선을 흐릿한 채로 유지하고 싶다. 어디에서 허구가 끝나고 어디서부터 현실이 시작되는지 어떠한 명확한 선도 만들고 싶지 않다.

재료 그 자체가 형식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김슬기 당신은 실제 삶으로부터 공연의 재료를 가져오니 더욱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찾는 것도 그 때문일 것 같은데.

므루에 내 공연의 모든 재료들을 일상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것들 혹은 인터뷰, 그런 것보다는 책에서 가져온 이론들, 내가 분석한 것들이 훨씬 많다. 물론 많은 것들이 실제 이야기로부터 왔지만, 그걸 그대로 올리는 게 아니라 그것에다가 어떤 식의 작업을 가하고 발전시킨다. 때로는 그것이 일상에 놓여 있는 맥락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현실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쳐보자. 하지만 이걸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이걸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일상의 무언가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건 다큐멘터리도,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내 작업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미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이건 연극이다.

김슬기 하지만 당신이 허구의 드라마를 만드는 건 아니지 않나. ‘진짜인 것’의 힘을 믿는 것인가?

므루에 내가 하는 건 허구의 드라마가 맞다. <구름을 타고> 또한 물론 허구이다. 이것은 야세르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것은 실제지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우리가 하고 있는 드라마는 실제 그의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이 진짜 나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인데, 혼란스러운 것으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과연 중립적인 ‘나’라는 캐릭터를 말할 수 있는가? 연극도 그런 것일 뿐이다.

김슬기 당신은 이 작품이 자전적인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건가?

므루에 이것은 자전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전기적인 것도 아니다. 자전적인 것은 누군가의 삶을 말하는 건데 이것은 내 동생의 삶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세 살 때 어땠는지 모르고 열 살 때 어떤 친구가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이다. 그는, 야세르라는 캐릭터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를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내가 작품에서 그의 유치원 기록을 보여준 것은 그게 바로 이 케이스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보면, 그가 유치원에 다닐 때, 1부터 20까지 셀 수 있었고, 단어를 섞어 말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말도 이해는 하지만, 언어에 매우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그의 부상 이후 발견된 것과 거의 완전하게 같은 정도의 수준이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그 자료를 선택한 이유다. 그의 유치원 생활에 대해 얘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 <구름을 타고>의 배우 야세르 므루에(Yasser Mroué)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클릭시 사진 확대)

예술 혹은 예술가의 윤리에 대하여

김슬기 특별히 레바논 출신의 예술가로서 갖는 사명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므루에 예술가로서 작품을 통해 레바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바논이나 혹은 베이루트가 될 수도 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해주기 위해서, 혹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나 매체로서 연극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 어떤 위계를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 내 나라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면, 그 순간 나는 무언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되고,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나의 사유, 의혹, 질문, 생각을 당신들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결론 같은 것은 없다. 공연이 끝나고 예술가와 관객이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나는 내 공연의 의도를 물어보는 질문에 얼마든지 대답하려고 한다. 의도는 나의 제안이 무엇인지, 나의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니까. 공연에서 그게 불충분하게 드러났다면 나는 더 설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메시지를 묻는 것은 싫다. 무엇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창작자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공연을 함께 본 친구와, 혹은 공연을 보지 않은 또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슬기 당신의 작품이 레바논의 내전을 다루는 것은 어떤 맥락인가. 당신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므루에 세상 모든 예술 작품은 다 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치’를 다루는 건 다른 문제다. 좌냐 우냐, 남이냐 북이냐를 다루는 게 정치라면, 정치적인 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과 생각을 말할 권리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동생 야세르의 이야기에서 관심 있는 부분이다. 모든 인간이 시를 쓰고, 추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은유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정치적인 면이다.

김슬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연극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므루에 매체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예술은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그건 오직 도구에 관한 것이지 플랫폼은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당신이 필요한 걸 쓸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번 공연에서도 그랬지만, 지금은 쓰이지도 않는 카세트테이프부터 시작해 공연에 온갖 종류의 기술을 사용한다.

기본적으로는 창작자와 관객 간에 지켜야 할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창작자와 관객은 완벽하게 동일한 선상에 있다. 관객들은 나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즉시라도 극장을 떠날 수 있다. 반면 그들은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르는 채 극장에 온다. 그럼으로써 창작자에게 일종의 권한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무대에서 무엇을 왜 하는가, 그들이 준 권한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온전히 창작자의 책임인 것이다.

사진촬영_박창현(Chad Park)

필자사진_김슬기 필자소개
김슬기는 창작을 위한 읽기, 기록을 위한 쓰기,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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