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화'는 담론이라기보다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위'가 아닐까. 그럼에도 경영의 현장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면서 또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weekly@예술경영]은 창작단위(단체, 개인 아티스트)와 환경(축제, 공간)을 키워드로 예술경영의 현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지형을 살핌으로써 특성화의 '당위'를 확인하는 데에서 나아가 예술경영의 현 단계를 점검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① 예술단체
나는 이 기획의 '특성화'를 '전문화'로 이해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단체를 경영했던 사람으로서 이 주제를 논하는 것은 일종의 고통을 동반한다. 나 또한 이 주제를 놓고 순수한 열정으로 꽤 씨름했던 터라, 자칫 관계된 이야기가 나올까 우려하는 바가 없지 않아 청탁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허락했다. 어차피 ‘문화예술계’라는 한 배에 탄 이상 누구든 필요하다면 내 목소리 보태는 일은, 진화(찰스 다윈을 기리며)라는 대전제 하에서 피할 바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다만 내 실전 경험을 이 글에 직접 언급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허심탄회하게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면, 그때 가서 내외적인 한계상황들에 대해서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싶다. 상황이 된다면 자청해서라도 말하고 싶은 바가 많다.




다름을 통한 생존력 키우기


각설하고,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해 보자. 나는 이 기획의 ‘특성화’를 ‘전문화’로 이해했다. “예술단체가 남과 구별되는 분명한 색깔(브랜드 밸류라고 할 수도 있겠다)을 가지고, 프로페셔널한 운영을 통해 독자적인 행보를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특성화를 거론하면서 상정하는 목표치는 최소한 이 언저리가 아닌가 ‘해석’했다. 한마디로 ‘다름을 통한 생존력 키우기’라고 할까.


우선 ‘다름’을 드러내는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해외로 시선을 돌려 세계적으로 저명한 현대발레단인 네덜란드댄스씨어터(NDT)를 예로 들어보자. 50년 전통의 이 단체는 예술감독이었던 안무가(현재는 고문) 지리 킬리언을 통해 최정상에 우뚝 섰다. 내한 공연도 했던 이 무용단이 세 개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웬만한 무용 애호가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NDT1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무용수로 구성된 대표선수이고, NDT2는 21살 이하의 젊은 무용수로 구성된 상비군, NDT3은 40세 이상 노련한 무용수로 짜인 올드보이(OB)팀이다.


나는 이런 구성의 NDT를 통해 우리가 논하는 예술단체 특성화의 좋은 양태 하나를 차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낭만ㆍ고전발레에서 벗어나 현대발레로 특성화하고, 나아가 조직 또한 무용수들을 나이와 역량에 맞게 재배치함으로써 이 무용단은 발레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나이 마흔이 넘은 발레리나(노)는 ‘퇴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근사하게 깨고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멋진 시도를 보라. NDT는 장르적인 특성화뿐만 아니라 운영의 특성화를 통해 그야말로 유니크한 발레단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사례를 한국의 예술단체에 적용한다면?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단체를 지목해서 거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름 장르 중심의 특화를 지향하고 있는 국공립단체들 가운데 이런 방식으로 운용의 미를 살릴 수 있다고 본다. 국공립단체는 인력들의 적체도 문제지만 제한된 인원으로 인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소화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 작품의 질적 향상(또는 다양한 시도)을 가로막는 운용의 경직성 해소 차원에서 시도할 만하다.


예를 들어, NDT처럼 예술가들을 연령대 별로 나누어 몇 개 팀을 만들고 (실력 차 우열반으로 나눴다간 사생결단할 일이니 안 될 테고, 외부와의 경쟁 오디션은 더욱 단체의 존립 목적을 거론하며 반발할 터이다) 그 그룹에 맞는 훈련과 작품 제작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합 무대를 선보이는 식으로 하면 안 될 일도 아니다. 이럴 경우 작품을 통해 팀별 수준이 드러날 가능성이 농후한데, 이런 편차를 줄이면서 다 함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한다는 게 이런 운용의 대원칙이 돼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국내 예술단체의 특성화 유형


NDT의 특성화와 국공립단체의 연계 방안에 대한 언급은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은 한국의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시도할 (혹은 시도해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단체 특성화 방안을 사례 중심으로 엮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한 연구를 통한 구분은 아니니 사실 관계가 좀 다르다고 해서 실명 거론한 단체에서 오해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① 독자적 양식 창조 _ 극단 미추 형


연출가 손진책이 이끄는 미추는 식구로서 ‘지속 가능한 단원’을 가진 대표적인 연극단체다. 느슨한 관계의 단원으로 프로젝트별로 이합집산을 하는 여느 극단보다 결속력이 훨씬 강한 게 이 단체의 장점이다. 이런 형태 또한 특성화 사례지만, 미추 형을 앞세운 것은 장르적인 특성을 언급하기 위해서다.


미추는 남들이 하는 연극도 잘 하지만, 이 극단이 남과 확실히 구분되게 제일 잘하는 것은 마당놀이다. 마당놀이는 미추의 트레이드마크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유의 상표이다. 개발자로서 독점적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기도 하다. 이 덕에 미추는 수익을 도모할 수 있고, 거대한 단원구조를 유지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을 다른 단체라고 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 예를 들어, 국립창극단만 하는 창극을 민간의 예술단체라고 특성화해서 시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추의 마당놀이는 ‘창조형 특성화’의 모범사례로 꼽고 싶다.


② 스타, 그 자체의 강력한 브랜드 _ 연희단거리패 형

형식 창조형 특성화에 성공한 마당놀이의 미추와 비교해 연희단거리패는 ‘스타 특성화’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연희단거리패는 후배들이 극작, 연출에 가담하고는 있지만 이윤택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여전히 유효한 단체다.


이윤택은 손진책이 시도했던 고유 형식의 창조보다는 연극의 ‘다양한 해석과 실험’에 중점을 두어 단체를 이끌었다. 그게 이 단체 특성화의 전제이지만, 이윤택이 전면에 서 있기 때문에 더욱 힘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런 스타형 특성화는 그 스타가 힘을 잃을 때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젊은 연출가로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양정웅과 극단 여행자’의 관계가 이 유형에 속하는데, 이 극단의 고민이 바로 그것이다.


극단 미추의 <쾌걸 박씨>, 연희단거리패의 <오구-죽음의형식>



③ 주류의 틈새 뚫기 _ 서울발레씨어터 형

김인희, 제임스 전 부부가 이끄는 서울발레씨어터는 낭만ㆍ고전발레 중심의 발레 풍토에서 벗어나 전문적으로 모던발레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lsquo;한국의 NDT&rsquo;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운용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말이다.

이 단체는 전문 직업발레단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특성화의 한 유형으로 거론했다. 척박한, 그래서 승자독식이 유별난 한국 발레계의 풍토에서 미들급인 서울발레씨어터는 대단한 모험이었는데, 결국은 그런 모험심 덕에 특성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헤비급인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 같은 주류 시장의 틈새를 현대발레로 특화한 경우로, 여러 분야에서 이런 틈새 전략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④ 새로운 형식 개발 _ 극단 몸꼴 형

새로운 형식 개발을 특성화의 기치로 내건 사례로 극단 몸꼴 형을 꼽을 수 있다. 몸꼴은 그동안 연극에서 외면 받던 &lsquo;피지컬 씨어터&rsquo;를 단체의 특성화 전략으로 내세웠다. 그 수준에 대한 평가는 더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이 단체의 색깔을 규정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와 유사한 &lsquo;새로운 시장 개척 형&rsquo;은 최근 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젊은 남성무용가들로 구성된 LDP무용단의 활동을 그 예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런 유형의 경우는 부단한 연구를 통해 완성도를 높이는 게 급선무다. 참신한 시도가 완성도로 보상받지 못하고 &lsquo;시도&rsquo;로 머물 때 그 수명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극단 몸꼴의 <구도>, LDP무용단의 <사운드 익스프레스>



⑤ 통합적 단체 브랜드 _ 신시뮤지컬컴퍼니 형

이 단체를 하나의 유형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뮤지컬 전문단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lsquo;통합적인 단체 브랜드 형&rsquo;으로 소개하기 위해서다.


신시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뮤지컬을 쉼 없이 선보이고 있다. 이는 단체 유지 차원의 고육책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꾸준한 제작 활동 덕에 이젠 &ldquo;신시 뮤지컬은 신뢰할 만하다.&rdquo;는 인상을 관객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런 유형이 정착하기까지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뮤지컬보다 제작 여건이 열악한 연극이나 무용 등에서 이와 같은 유형을 찾기는 힘들다. 기획력을 기치로 내세웠던 악어기획 등의 활동이 주춤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⑥ 독립예술가 _ 무용가 홍승엽, 안애순 형

흔히 말하는 &lsquo;독립예술가 형&rsquo;이다. 온전히 예술가의 창의적인 발상에 단체의 운명을 걸고 있는 경우다. 이런 단체는 자신의 이름을 단체의 명으로 내세우는 게 특징인데, 작품의 수준이 뒷받침된다면 마니아적인 브랜드 파워를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의 경우 특히 재원과 주류 세력과의 갈등 등 &lsquo;고난의 행군&rsquo;을 각오해야 한다.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자나, 돈트>, 안예순무용단의 <원>




특성화는 외부의 힘에 의한 기획이 아니다


두서없이 유형화를 시도해보았다. 이미 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를 취합 정리한 수준이지만 예술단체 특성화 논의를 진전시키는 단서는 될 수 있겠다 싶다. 최근 정부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체를 선별해 지역극장의 상주단체로 연결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논의 구조에 들어가 있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지역극장이 불만 없이 그 제안을 받는다면 좋은 사례들이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러면서 한 가지 걱정되는 바가 있다. 바로 예술단체의 특성화는 외부의 힘에 의해 &lsquo;기획&rsquo;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예술단체나 예술가들의 각성에 의한 산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 재원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단체는 시장(흐름)의 여건에 따라 요모조모 살펴 어느 수준에서 특성화를 기획할 수 있으나, 민간영역에서 이런 기획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인위적인 특성화의 성과는 너무나 뻔하다. 다만 그것, 특성화가 단체의 생존력을 키우는 당근의 하나라는 사실을 설득하고 지원하는 자세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정재왈

필자소개
정재왈은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서 공연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를 취재했다. 현장을 알고 싶어, LG아트센터 기획운영 총괄부장으로 3년을 일한 뒤 문화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 겸 예술감독으로 공직을 경험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예술 현상을 거시적이며 통합적으로 전망,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원이며 지금은 여러 대학에서 현장 경험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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